작가의 말
어느 상황에서나 통하는 스토리텔링 원칙
일본 여행을 가서 차를 렌트했을 때의 일이다.
나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차가 운전석이 반대라는 사실에 겁을 먹었었다. 운전석이 바뀌면, 차량의 진행 방향이 바뀌고, 신호를 받아서 가야하는 좌회전과 우회전도 반대가 되니 한 순간 방심하면 대형사고가 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근데 실제로 운전을 해보니, 그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앞차의 꽁무니만 졸졸 따라가니 모든 게 자연스럽게 해결되더었던 것이다.
문제는 건물 주차장에서 홀로 빠져 나올 때였다. 앞서 가는 차가 없으니, 램프에 진입할 때 오른 쪽으로 가야 하는지, 왼쪽으로 가야하는지 순간 헷갈렸던 것이다. 이때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 못하면 램프에서 내려오는 차와 정면으로 부딪힐 수도 있는 것이고, 실제로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 동승자를 혼비백산하게 만들기도 했다.
"주차장에서 나갈 때 헷갈리지 않고 싶어!"
나는 당시 일본에서 10년 째 살고있던 후배에게 하소연을 했다.
"형, 한국과 일본이 운전에 있어서 모두 정반대인 것 같지만, 양쪽에 다 통하는 단 하나의 원칙이 있어."
"정말? 그게 뭔데?"
"그건 바로 운전석 옆이 중앙선이라는 사실이야."
순간, 뇌정지가 왔다.
우리나라는 차의 운전석이 왼쪽에 있고, 일본은 오른쪽에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차가 도로에서 중앙선 왼 편에서 달리고, 일본에서는 오른 편에서 달린다. 그러니 달리는 운전석에서 고개 돌렸을 때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중앙선이 보이는 게 당연한 것이었다.
운전에 관한 후배의 통찰은 내게 충격이었다.
이후 나는 차선을 잘 못 타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일본 렌트카 사무실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한국인을 보면, 슬그머니 가서 '운전석 옆이 중앙선이라는 사실만 명심하세요!'라고 복음을 전파하기도 했다. 나는 뭔가를 알면 남을 가르쳐 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다.
'운전석 옆에 중앙선이 있다.'
제가 작법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올렸던 것이 바로 이 문장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통하는 스토리텔링의 원칙을 담은 책, 스토리의 망망대해를 헤치고 나아갈 때 길을 잃지 않게 해줄 '밝게 빛나는' 등대같은 책을 말이다.
나는 왜 스토리텔링 공식에 집착해 왔는가?
나는 이과 출신이고 공대 출신이다.
국문학과나 문예창작과를 나오지도 않았고, 또한 그 쪽을 전공한 지인이나 친척도 없었다. 따라서 막연하게 작가가 되기로 맘 먹었던 대학시절, 도움을 받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때 어리석게도 나는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쓰는, 어떤 정리된 공식이 있는 줄 알았다. 왜냐, 공대에서는 대부분 공식으로 시작해서 공식으로 끝나기 때문이었다. 공식을 달달 외우고 있으면, 어떤 문제가 나오더라도 공대생들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당시 나와있었던 몇 권 안 되는 작법책들을 모두 독파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내가 애타게 찾아헤매던 공식 따위는 없었다. 국문과나 문창과에서도 그런 걸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작법책에 공식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작법책을 놓을 수는 없었다. 작가의 길을 가면서 뭔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마다 뭐라도 찾아야겠다는 심산으로 작법책을 손에 들었다. 근데 그렇게 읽다보니까 그 책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어떤 것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들이 내 작가적 경험과 맞물리면서 공식처럼 다가오게 되었다.
공대 출신의 작가가 드디어 공식을 찾아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지기까지.
몇 년 전, 나는 작가로서 심각한 슬럼프를 맞이했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했던 작품들이 편성 직전에 엎어지는 일들이 반복되자 작가라는 직업 자체에 회의가 일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고, 쓰고 있는 작품도 잘 써지지 않았다. 번아웃이었다.
한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살다가 문득, 내가 여태 제대로 써온 것이 맞나 생각했고, 또한 앞으로 제대로 써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리곤 뭔가에 홀린 듯 작법에 관련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공부해 왔던 것을 정리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카카오에서 운영하는 글쓰기 플랫폼인 브런치(Brunch)에 '공식으로 배우는 스토리텔링'이란 타이틀로 연재를 시작했다. 생각보다 반응은 뜨거웠다. 몇 개 연재하지 않았는데 구독자 천 명을 돌파했고, '좋아요'와 칭찬하는 댓글도 많이 달렸다.
출판하고 싶다는 제안들이 밀려 들었다. 나는 그 모두를 거절했다. 단행본으로 낼만큼의 분량을 쓰려면 2년 정도 걸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밀리의 서재'에서도 연락이 왔다. 거기에선 지금까지 쓴 열 꼭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오케이. 밀리의 서재에서 <시작은 가볍게, 드라마 한 편 써볼까>라는 타이틀로 출판이 되었다. 이 책은 당시 베스트셀러 목록에 6위까지 올라가면서 화제를 모았다. 담당자 말에 의하면, 작법책치곤 대단한 성과였다고 한다.
댓글 중에는 후속편을 내달라는 요구가 많았고, 나 역시 파트 2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본업에 충실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차일피일 미룰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지금은 파산했지만, 유튜브와 비슷한 알고리즘으로 글쓴이에게 보상을 해주는 '얼룩소'라는 플랫폼에서 '공모에 당선되는 극본 쓰기'란 이름으로 기존의 글들을 리뉴얼하고, 새로운 글들을 추가해서 연재를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래 읽어줄수록 수익이 좋은 시스템이라, 작가 지망생들이 많은 네이버의 기승전결 카페의 자유게시판에 홍보를 했다.
그 결과, 얼룩소가 생기고 2년이나 지나 시작한 후발주자임에도 불구하고, 2위와는 거의 두 배 차이로 압도적인 팔로워 1위의 얼룩커가 되었다. 또한 일주일 동안 내 글을 읽은 누적 시간이 다른 글쓴이들은 한두 시간 정도일 때 나는 평균 100시간이 넘기 일쑤였다. 많은 팔로워들이 얼룩소에서 내가 쓴 글을 읽고 또 읽었다는 뜻이었다.
얼룩소에서 보상금도 많이 받았다. 이때 나는 작가를 진정 춤추게 하는 것은 칭찬보다 현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친 듯이 글을 써서 올렸고, 독자들의 칭찬과 감사 인사, 그리고 현금 보상 때문에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다.
하지만 얼룩소는 플랫폼으로서 자체 수익구조를 만들지 못했고, 결국 파산을 하고 말았다. 나는 파트 2까지는 썼지만, 파트 3를 쓰지 못한 채 집필을 멈추고 말았다. 많은 분들이 아쉬워해 주셨고, 나 또한 많이 아쉬웠다. 처음에는 집필을 완료한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3분의 2가 넘어가니 어떻게든 마무리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브런치에 연재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당신은 더 잘 쓰게 된다>라는 제목으로.
'작가의 말'부터 써서 올리고, 새로 구성한 목차에 따라 챕터를 보강하고 추가했다. 그리고 '기승전결'에 글을 올릴 때마다 공지를 하며 마무리를 해나갔다. 혼자만의 약속으론 끝을 맺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신을 못 가르칠 자신이 없다.
나는 30년 동안 작법책을 끼고 살았고, 20년 동안 작가 지망생을 가르쳤으며, 게을렀지만 작가의 길을 꾸준하게 걸어왔다.
나는 한국 방송작가 교육원에서 강의를 했고, KBS 아카데미에서도 했다. 중앙대 문창과에서도 2년 동안 학부생들을 가르쳤다. 한류 열풍이 확 불었을 때 중국 방송인을 상대로도 강의를 했고, 심지어 남미 방송인들에게도 했다.
상하이 미디어 그룹에서 국내로 연수를 왔을 때는, 나를 강사로 꼭 섭외해 달라는 조건이 걸리기도 했다. 한 번은 중국 본토에 가서 강의를 했는데, 그때 스토리텔링 강의로 중국 투어를 하자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을 한 바퀴 도는데 2년 걸린다고 해서 기겁하고는 줄행랑을 쳤었다.
리사 크론은 ‘스토리는 뇌의 언어’라고 했는데,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어릴 적부터 많이 읽고 써왔으며, 또한 재능마저 갖춘 사람은 따로 배우지 않아도 스토리를 네이티브 스피커퍼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하지만 뒤늦게 스토리 업계에 뛰어든 사람들이 네이티브 스피커처럼 스토리를 만들면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다(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바로 당신 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스토리라는 언어의 문법책이다. 문법을 열심히 공부하고, 패턴 등을 암기해서 활용하면 스토리 네이티브에 가까이 갈 수 있다.
나는 <당신은 더 잘 쓰게 된다>가 스토리텔링의 문법책으로서 기능을 충분히 할 거라 자신한다.
이 책은 드라마 작가가 쓴 책이지만, 시나리오, 소설, 웹소설, 웹툰 등 스토리를 다루는 모든 작가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습작 중인 작가 지망생들은 물론이고, 현업 작가들에게도 그러하다. 또한 스토리를 즐기는 많은 분들에게 이야기를 더 재미있고 깊이 있게 즐길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몇 년 전에 유명한 성우 한 분에게 스토리텔링을 가르쳤었다. 2회 정도 수업을 했을까?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무 통화하고 싶어서 내 번호를 여기저기 수소문했단다.
‘선생님, 제가요. 성우 생활 30년을 하면서 정말 수많은 원고들을 읽었는데요, 재미있는 건 왜 재미있고, 재미없는 건 왜 재미없는지 잘 몰랐었거든요. 근데 선생님 강의를 듣고 원고를 보는데, 이젠 알겠는 거예요. 너무 감사합니다.’
이것이 스토리텔링 공부의 시작이다.
당신도 그렇게 된다.
나는 못 가르칠 자신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