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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더 잘 쓰게 된다 05

모든 스토리의 주인공은 매버릭이다.

by 이기원

모든 스토리는 주인공에 대한 것이다.


조연이나 조조연, 단역 등에게는 서운한 말일지 모르지만 사실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단 한 명이다.


공동 주인공에게 서운한 말일지 모르지만 이 말도 사실이다. 아무리 동등하게 대한다고 해도 무게추는 미세하게나마 한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누군가의 이름은 타이틀 롤에서 반드시 먼저 소개 된다. 그가 바로 진짜 주인공이며, 스토리는 바로 그의 이야기인 것이다.


두 번째 주인공이 자기도 주인공이라 우기고, 연출도 그렇게 생각하고, 심지어 시청자들마저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작가는 거기에 부화뇌동해서는 안 된다. 두 번째 주인공에게 립 써비스로 '니가 진짜 주인공이야'라며 사기를 진작시킬 순 있어도, 마음 속으로는 '진짜 주인공은 오직 한 명이아'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스토리는 한 명의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렇게 접근해야지만이 스토리가 정리되고, 작품이 제대로 써지기 때문이다.


당신이 <겨울 왕국>을 집필한다고 생각해 보자.


언니인 엘사가 주인공으로 알거나 공동 주인공으로 사람이 많지만, 사실은 동생 안나가 주인공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할 지라도 작가인 당신은 안나가 주인공임을 알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당신이 <겨울 왕국>을 쓰려면 안나 중심으로 플롯을 짠 뒤에 엘사 스토리를 입히는 식으로 작업을 해야 한다.


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모든 스토리는 바로 주인공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공식을 보자.


캐릭터(주인공) = 테마(주제) = 스토리


주인공의 캐릭터에서 테마가 발생하고, 그것은 바로 스토리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이 세 가지 요소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게 연결되어 있다.


고립된 어린 시절을 보낸 안나는 키스가 사랑이라 생각할 정도로 사랑에 미숙한 캐릭터이다. 하지만 언니 엘사를 찾아 떠나는 여정 끝에 진정한 사랑은 자기 희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겨울 왕국> 스토리는 자기 희생이라는 숭고한 사랑을 깨닫기까지의 여정이 스토리가 되는 것이다.


<들장미 소녀 캔디>를 예로 들어보자.


주인공 캔디는 주제곡 가사에도 나와 있듯이 ‘괴로워도 슬퍼도’ 안 우는 캐릭터이다. 때문에 스토리는 캔디를 울게 만들기 위해서 괴롭고 슬픈 상황에 계속 처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전개가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울지 않는 캔디라는 캐릭터를 통해 ‘어렵고 힘든 일을 꿋꿋하게 견디면 행복이 찾아온다’는 주제를 구현한다(내 주제 공식으로 말하면, 어렵고 힘든 일을 꿋꿋하게 견디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미래를 위해서 낫다).


결국, 모든 스토리는 주인공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고 당신은 작가로서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스토리가 써지고, 주제가 결정된다. 공동 주인공에게는 이런 공식에 적용할 수가 없다. 공동 주인공은 서로 다른 주제를 갖고 있거나, 같은 주제를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한 쪽이 종속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주인공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를 해보자.


주인공에게는 (강력한) 욕망이 있어야 한다.


모든 작법서에서 주인공에 대해 설명할 때 제일 먼저 나오는 문장이다. 주인공의 욕망의 시작이 바로 스토리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앞서 '로그라인'을 설명한 장에서 말했지만, 스토리라는 것이 주인공에게 욕망이 생기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야기가 선명해지고, 흡입력도 배가 되며, 감정적으로도 강하게 작동한다.


주인공이 욕망에는 외적 욕망과 내적 욕망이 있고, 외적 욕망은 원하는 것(want)이고, 내적 욕망은 필요한 것(need)이다. 그리고 내적 욕망은 처음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주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클라이맥스에 주로 드러난다.


<겨울 왕국>에서 안나가 원하는 것은 언니를 찾아 관계를 회복하고, 왕국의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고, 안나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사랑은 희생이란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가 원하는 것은 코무두스 죽임으로써 복수를 하는 것이지만, 그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마음의 평화였다.


<해리포터>는 해리포터가 원하는 것은 볼드모트를 물리쳐 부모의 복수를 완성하는 것이지만, 해리에게 필요한 것은 운명을 받아 들이고, 희생과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주인공에 대해서 좀 더 탐구해 보자.


제임스 홀이 쓴 <베스트셀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Hit Lit)>이라는 책이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시작해서 <대부>, <죠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다빈치 코드>까지, 출판계를 강타한 전대미문의 초대형 베스트셀러 12권을 선정해서 그 책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특징들을 찾아내 분석한 책이다.


그 특징들 중에서 주인공에 대한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주인공은 이단아(매버릭)이다.


초대형 베스트셀러, 즉 수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품의 주인공은 모두 이단아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영어에 이단아를 지칭하는 매버릭(Maverick)이란 단어가 있는데, 이 초대형 베스트셀러의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매버릭이라고 한다.


미국 서부시대에 섀뮤얼 매버릭이란 농장주가 있었다. 당시 농장주들은 모두 자기가 키우는 가축에 낙인을 찍어서 소유주를 표시했는데, 유독 매버릭만이 자신이 키우는 소에 낙인을 안 찍었다고 한다. 그래서 낙인이 안 찍은 소를 보면, 모두가 매버릭 소유임을 알았다고 하고, 이때부터 남들 다 하는데 혼자 하지 않는 사람, 아무도 하지 않는데 혼자만 하는 사람 등을 매버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저자가 책에서 소개하는 매버릭에 속하는 캐릭터는 다음과 같다.


반역자, 보헤미안, 개척자, 반항아, 외톨이, 불복 주의자, 극단주의자, 불평분자, 독립투사, 반란군, 괴짜, 자유로운 영혼, 아웃사이더, 은둔자, 이방인, 왕따, 유배자, 말괄량이 등등


매버릭은 보통 그가 속한 사회의 가치체계를 거부하거나, 가치체계에서 거부당하는 인물이며, 자기 나름의 저항방식으로 사회, 제도, 관습 등과 싸워 나가는 캐릭터이다. 이들이 동시대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는 이유는, 이들이 우리들을 대신해서 불공정, 불합리, 불만족 등과 싸워주기 때문이다.


<겨울왕국>의 안나는 매버릭적 측면에서 볼 때 말괄량이가 맞아 보이며, <글래디에이터>의 막시무스는 반역자나 반항아이고, <해리포터>는 아웃사이더나 왕따 정도가 된다.


책 내용을 조금 소개하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는 귀족인 어머니와 소작인 아버지에게서 영민한 머리와 거친 성격을 물려 받았는데, 조신한 상류층 여자로 보이고 싶어 하는 한편, 말괄량이로도 보이고 싶어 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대부>에서 마이클 코를레오네는 마약 조직원들인 형제들과는 달리 대학을 졸업하고, 전쟁에도 참전한 인물로 마피아 입장에서 봤을 때 철저한 이단아이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로버트 킨케이드는 소설 속에서 자신을 도덕성에 지배받지 않는 사람이라 말한다.


물론 모든 주인공이 매버릭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매버릭에 가까울수록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기 쉽고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36년만에 만들어진 <탑건>의 속편의 제목이 <탑컨 : 매버릭>인 것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일단, 매버릭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면, 그다음 주인공이 갖춰야 할 것을 생각해 보자.


주인공에게는 결함이 있어야 한다.


오래 전 나는 할리우드 대형 제작사의 아시아 총괄 담당자에게 내가 쓰고 있는 작품에 대해서 신나게 얘기했던 적이 있었다. 상대는 미소를 지으며, 으응, 으응 하며 내 말에 부응하며 흥미로워 했고, 나는 그에 자극을 받아 살벌한 구라의 향연을 펼쳤다. 그 순간만은 내가 할리우드에 진출해 존경해 마지않는 아론 소킨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작가가 될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 담당자는 내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이렇게 물었다.


"주인공의 결함이 뭐야?"


갑자기 내 머리 속이 하얘졌다. 나는 그때까지 스토리를 만들면서 주인공의 결함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 그게 말이지. 그러니까... (얼굴이 빨개짐) 내 주인공은 말이야... (손까지 떨림)"


아론 소킨을 만나야겠다는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날 이후, 나는 스토리의 등장인물을 만들 때 꼭 결함(또는 결핍, 약점 등)을 제일 먼저 세팅하는 버릇이 생겼다. 할리우드 진출이라는 '원하는 것'은 못 얻었지만,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얻은 셈이었다.


간혹 공모 심사를 하다가 주인공을 무결점의 완벽남이라 시놉시스에 소개해 놓은 것을 볼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그런 설정한 작가에게 결함이 있다는 판단을 한다. 물론 내용도 재미없다.


완벽한 사람은 매력이 없을뿐더러 개연성도 없고, 인간으로서 존립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하지만 이렇게 설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주인공이 자신을 무결점 인간이라 생각하는 것인데, 이럴 경우 그의 결함은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이 된다. 예를 들어 <하얀 거탑>의 장준혁 같은 캐릭터 말이다.


불세출의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이렇게 말했다. 한 인간을 제대로 전달하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그 사람의 결함을 기술하는 것이라고.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 아리스토텔레스도 <시학>에서 인간의 결함에 대해 얘기했다. 이야기는 비극과 희극 둘로 나눌 수 있는데, 비극은 결함을 극복하지 못해서 행복에서 불행으로 떨어지는 이야기이고, 희극은 결함을 극복해서 행복해지는 이야기라고.


결함에는 신체적 결함과 정신적 결함 등이 있다. 여기서 신체적 결함은 종종 정신적 결함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미드 <하우스>에서 닥터 하우스는 천재 의사지만 원인 모를 통증에 시달리며, 다리까지 절고 있다. 이로 인해 그는 아주 괴팍한 성격을 결함으로 가진 캐릭터로 표현된다. 결함만을 볼 때 역시 천재 의사인 <굿 닥터>의 박시온도 못지않다. 그는 자폐증이란 캐릭터적 결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슈퍼 히어로에게는 치명적인 결점이 필수불가결의 요소이다.


슈퍼맨을 예로 들면, 그는 크립톤 운석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는 신체적 결함이 있으며,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정서적 결함이 있다. 크립톤 운석은 그가 지구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할 때 종종 장애가 된다. 그의 수줍은 성격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인 그를 인간답게 보이고 또한 연민의 대상으로 만들기도 한다.


슈퍼맨의 청소년기를 그린 <스몰빌>이란 시리즈에서 이 내성적인 슈퍼맨은 좋아하는 여자와 천신만고 끝에 데이트를 하게 될 때 지구를 지켜야 할 일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악당과 싸워 세상을 지키고 돌아오면, 그녀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슈퍼맨을 원망하거나 아쉬움을 표한다. 이런 슈퍼맨의 비애는, 즉 세상을 구원하는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것을 누리지 못하게 하여 연민을 자아낸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슈퍼맨의 연애가 잘 되길 바라면서 <스몰빌>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사랑을 해야 할 때 지구를 지켜야 하는 <스몰빌>의 스토리 알고리즘은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도 발견된다. 비밀 특수부대원인 유시진 대위(송중기)는 여주인공 강모연(송혜교)과 사랑이 이루어지려 하면 국가를 위한 특수임무로 차출된다.


다시 주인공의 결함으로 돌아와서.


질 체임벌린의 <시나리오 넛셸 테크닉>을 보면 주인공의 결함을 통해 어떻게 스토리를 만드는지에 대한 예를 명작 영화 <사랑의 블랙홀>로 들고 있다.


<사랑의 블랙홀>은 매일 같은 날이 반복되는 타임 루프 구조를 갖고 있다. 주인공인 필은 매우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정신적 결함으로 갖고 있다. 그에게 반복되는 매일은 반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남들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변하면서 그 반복되는 매일은 새로운 의미가 된다. 예를 들어, 피아노를 전혀 치지 못했던 그는 매일매일 조금씩 연습을 해서 끝내는 멋진 피아노곡을 연주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게 된다. 이런 식으로 그는 이타적인 사람이 되고, 결국 한 여자의 마음을 얻음으로써 반복되는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겨울왕국>의 안나는 성급함이나 사랑에 대한 미숙함이 결함이며, <글래디에이터>의 막시무스는 복수심에 눈이 멀어 얻게 된 잔인성과 폐쇄성이 결함이고, 해리 포터는 감정에 휘둘리기 쉬운 성격인데다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고집과 자기 중심성이라는 결함이 있다.


다음은 주인공에 대해 지극히 당연한 공식이지만, 신인들은 자주 망각하는 공식을 말해 보겠다.


주인공은 능동적이어서 항상 선택하고 행동한다.


사실 모든 이야기는 주인공이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을 다루고 있다고 보면 된다. 즉, 우리는 주인공의 어려운 선택에 감정이입을 하고, 어려운 행동에 감동하게 되는 것이다. 왜? 우리는 주인공처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주인공을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고


작가 지망생 시절, 동료들 중에는 고집스럽게 수동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데뷔를 하지 못했다. 즉, 수동적인 인물을 내세워서는 이야기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수동적인 인물은 선택하지도 않고 행동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주변에 수동적인 주인공을 고집하는 망생이(작가 지망생)가 있으면, 부디 작가 생활을 포기시켜 주기 바란다. 당장은 좀 욕을 먹어도, 나중에는 고마웠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러면,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는 주인공으로 쓸 수 없겠네요?"


한 번은 내 수강생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히키코모리들은 거의 99%가 수동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주인공으로 쓰기 쉽지 않다. 하지만 선택과 행동을 하는 1% 능동적인 히키코모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히키코모리를 찾아내거나 창조해 내면 그 캐릭터는 주인공의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계기로 히키코모리가 욕망을 갖게되면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욕망은 히키코모리에게도 선택과 행동을 강요하게 만드니까.


가령, <구경이>에서 이영애가 맡은 구경이 캐릭터가 그렇다. 구경이는 히키코모리의 탈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의뢰받은 사건을 계기로 방 밖으로 나오게 된다.


선택과 행동에 대해서 더 이야기 해 보자.


한 번은 어느 스릴러 드라마를 보는데, 선택과 행동을 하며 시청률 고공행진을 주도하던 주인공이 어느 회차에서 그만 커다란 부상을 입어서 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스토리는 주인공이 입원한 상태로 다음 회차까지 이어졌다.


나름 선수 입장에서 나는 시청률이 폭락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 예언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시청률이 떨어진 이유는 단 하나였다. 주인공이 병상에 누워 있느라, 그 회차 내내 선택하고 행동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했어야 할까?


주인공은 병원에 입원하자마자, 탈출이라는 선택과 행동을 하거나, 누군가 주인공을 죽이러 오자 킬러를 상대로 자신을 지키는 선택과 행동 등을 해야 한다. 만약, 꼼짝할 수 없는 중병이라면 시간을 점프해서 다음 회차가 시작될 때 치료를 마치고 퇴원시키는 것도 고려해 볼만하다.


소설이나 드라마나, 대중들이 보고 싶은 것은 주인공의 선택과 행동이다.


로버트 맥키는 <스토리(STORY)> 한 사람의 전체 인생을 영화 한 편에 담고 싶다면, 그의 삶에 벌어진 ‘스토리 이벤트(중요한 사건)’만을 선별해서 배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스토리 이벤트란 주인공이 중요한 선택을 하고,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져 삶의 궤도를 바꾸는 사건을 말한다(이쯤에서 당신은 당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떤 선택을 하고 행동을 했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그리고 진짜 중요한 거 하나.


주인공이 이야기 전개 중에 일시적으로 선택과 행동을 남에게 떠넘길 수 있다. 하지만 클라이맥스에서는 반드시 주인공이 선택과 행동을 해야 한다. 그 선택과 행동에서 보통 주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돈과 사랑 중에서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사랑이 돈보다 더 소중하다는 주제를 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간혹 주인공 대신 다른 인물이 클라이맥스에서 선택과 행동을 하기도 하는데, 그 작품이 나름 괜찮은 작품이라면 주인공이 클라이맥스까지 밥상을 다 차려놓고, 다른 인물이 숟가락을 얻도록 유도하는 것이라 보면 된다. 즉, 주인은 밥상을 차린 사람이고, 주제도 그를 통해 구현되는 것이라 보면 된다.


<반지의 제왕>을 보면 프로도가 갖은 고통과 유혹을 견디며 클라이맥스까지 이끌고 가지만, 막상 절대 반지를 버리지 못해 망설이다가 골룸에게 빼앗기게 된다. 하지만 골룸은 좋아서 날 뛰다가 실수로 용암에 절대반지와 함께 빠진다. <레미제라블>에서는 장발장이 도망자이자 구원자로서 모든 사건을 끌고 가는데, 클라이맥스에서는 그를 잡기 위해 추적하던 자베르로 하여금 회개하고 자살하게 만든다. 장발장이 결과적으로 자베르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인공은 변해야 한다.


주인공은 스토리라는 여정을 통해서 자신의 결함을 극복하거나, 욕망의 본질을 깨닫거나, 처음에 몰랐던 더 큰 가치를 발견하면서 변화한다.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핵심이며, 관객이나 독자가 주제에 감동받는 지점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야기가 끝났는 데도 재미나 감동이 없다면, 주인공이 변화하지 않았을 확률이 매우 높다.


리사 크론은 만약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감동이 없다면, 클라이맥스로 되돌아가 주인공이 더 큰 대가를 치르게 하라고 했다. 클라이맥스는 이야기의 절정으로 주인공의 운명이 결정되고, 주제의 메시지가 강력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그런 지점에서 대가를 크게 치른다는 것은, 단순히 극적인 사건을 더 넣으라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변화를 더 명확하고 진실되게, 그리고 더 깊게 만들라는 것이다.


주인공의 변화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글래디에이터>의 막시무스는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로마의 정의를 세우고, 또한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겨울왕국>의 안나는 엘사를 구하기 위해 자기 몸을 던지는 희생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내면의 성장)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해리 포터는 시리즈 마지막인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에서 볼드모트와의 최후의 대결에서 스스로 죽음을 수용하는 대가를 치름으로써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닌다.


그러나 캐릭터가 변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보통 시리즈물의 주인공이 그렇다.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나 <하우스 M.D>의 닥터 하우스, <셜록>의 셜록 홈즈 등이 그렇다. 이들 시리즈는 주인공의 성장보다는 주인공의 능력치로 주어진 사건을 어떻게 해결해 내느냐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이런 시리즈물은 매번 제 자리로 돌아오는 리셋 구조(Reset Structure)를 가지는데, 그 이유는 그래야 새로운 사건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리즈 캐릭터가 변화를 시작하면, 그것은 시리즈가 끝나는 징조라고 보면 된다.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다이엘 크레이그의 007 시리즈의 종장이었다. 이 영화에서 제임스 본드는 바람둥이에다 절대 죽지않는 캐릭터를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순정남이 되어 죽는다.


또 하나 변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하얀 거탑>의 장준혁과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는 변화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경우, 변화지 않는다가 아니라, 주인공이 스스로의 의지로 변화를 거부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그 대가는 대부분 비극이다.


장준혁은 끝까지 권력과 의사로서 자존심을 놓지 않은 채 죽음을 맞이하고, 개츠비는 과거에 대한 집착과 환상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파멸한다.


위에서 얘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면, 비극의 주인공은 '결함'을 극복하지 못해서 파멸에 이른다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다소 역설적이지만 변화를 거부하는 것 또한 변화의 한 형태라 볼 수 있다.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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