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자, 조력자, 멘토
"제 이야기에 인물을 어떻게 세팅해야 할까요?"
이런 질문은 작가(또는 지망생)으로서 참 하기 어렵다. '아니, 그것도 못하면서 무슨 작가를 하려고 해요?'라고 되치기를 당했을 경우, 이렇다할 항변을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질문을 하고 싶어하는 작가들이 무척 많다고(당신을 포함해서). 때문에 이번 글 역시 당신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글이 될 거라 확신한다.
단, 본능적으로 인물 세팅이 저절도 되는 분들은 이번 장을 패스하고 넘어가도 좋다. 하지만 평소 스토리에 불필요한 인물들을 많이 만들거나, 캐릭터가 겹치는 비슷비슷한 인물들을 만들어 내거나, 또한 정작 필요한 인물을 빼놓는 작가가 바로 당신이라면, 이번 글을 금과옥조로 삼기를 바란다.
이야기에서 기본적으로 세팅해야 하는 캐릭터를 기능적으로 볼 때 딱 네 가지이다.
주인공, 적대자, 조력자, 멘토
작법 이론가에 따라 캐릭터를 많게는 10개까지 분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캐릭터 분류들의 공통분모을 뽑아보면, 위에 열거한 4개의 캐릭터가 딱 떨어진다. 주인공은 물론이고, 주인공이 목표를 향해 나아감에 있어서 훼방을 놓는 적대자가 반드시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 조력자의 도움이 필요하며, 깨달음을 주는 멘토의 역할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당신에게도 마찬가지 아닐까? 일단, 당신이 있고, 굳이 필요하진 않지만, 주변에 적대자가 있을 것이고, 함께 어울리거나 언제나 내 편인 조력자가 있을 것이며, 중요 고비마다 자문을 해주는 멘토가 있을 것이다.
이 네 종류의 기본 캐릭터는 인물이 가지는 기능을 통해 나눈 것인데, 이 기본 캐릭터 외의 모든 캐릭터는 이 기본 캐릭터에서 분화되거나 조합된 거라 보면 된다.
분화된 캐릭터는 이런 것이다. 가령, 광대라는 캐릭터가 있다면, 주인공의 입장에서 봤을 때 어느 쪽에 서 있는지에 따라 조력자인지 적대자인지 설정하면 되는 것이다. <해리포터>에서 프레드와 조지 위즐리는 말썽꾸러기 쌍둥이로 해리에게 유쾌함과 용기를 주는 조력자형 광대 캐릭터라 할 수 있다. 한편, 벨라트릭스는 장난스러운 말투와 과장된 행동으로 주변을 조롱하며, 해리 포터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광대형 적대자이다.
조합된 캐릭터는 두 개 이상의 기능을 하는 캐릭터를 말한다. 조력자이면서 멘토인 경우도 있고, 적대자이면서 멘토인 경우도 있다. 또한 조력자이면서 적대자이거나 그 반대인 경우인 긍/부정의 변절자 캐릭터가 있다.
캐릭터를 세팅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공에게 있어서 적이냐, 아군이냐의 판단이다(멘토도 그냥 멘토인가, 다크 멘토인가를 판단해야 한다). 이 판단을 근거로 스토리에 꼭 필요한 기본 캐릭터들을 세팅한 뒤, 꼭 쓰고 싶은 캐릭터를 추가하고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그때그때 인물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스토리를 시작하기도 전에 수많은 인물들을 세팅하는 것은, 신을 흉내내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 권장하고 싶지 않다.
가끔 공모용 시놉시스에 인물 관계도가 첨부된 것을 보게 되는데, 공모자 입장에서는 스토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든 것이겠지만, 정작 심사위원은 그 관계도에 적대자가 얼마나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가를 본다. 적대자가 많으면, 그만큼 갈등이 많기 때문에 극의 텐션이 올라가고 다이내믹해진다. 하지만 조력자가 많으면, 스토리가 이지 고잉하기 쉽고 나이브하며 지루해지기 쉽다.
캐릭터에 대한 개요는 이 정도면 됐고, 이제 각 캐릭터가 갖춰야 할 자질에 대해서 알아보자.
주인공에 대한 얘기는 이미 했기 때문에 간단하게 리마인드만 하고 넘어가겠다.
주인공은 '결함을 지니고 있으면서 이야기의 중심 갈등을 이끌고, 목표를 향해 능동적으로 나아가면서 선택하고 행동하며, 그 과정에서 뚜렷한 내적/외적 변화를 겪는 인물'이다. 이런 문장은 원문 그대로 달달 외워서 당신이 주인공에 관한 내용을 쓸 때, 해당 내용이 제대로 들어가고 있나 항상 확인해야만 한다. 그리고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을 볼 때도 이제는 감상만 하지 말고, 작가의 눈으로 위 내용들을 체크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는 내공이 쌓여서 본인 작품을 쓸 때 저절로 되는 것이다.
주인공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캐릭터는 무엇일까? 아니,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주인공보다 더 중요한 캐릭터는 무엇일까?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적대자이다. 적대자는 보통 악인, 악당, 경쟁자, 빌런 등을 통칭하는 단어로 주인공의 반대편에 서 있는 캐릭터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은 '악당이 훌륭할수록 영화도 훌륭해진다'고 말했고, 리들리 스코트는 '주인공의 매력은 적대자의 강렬함에 비례한다'고 말했다. 이 말들은 적대자 설정이 주인공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초심자들이 만들어 내는 적대자는 '무늬만 악당'인 경우가 많고, 단지 잔혹하기만 한 경우도 허다하다. 뿐만 아니다. 코믹한 악당이나 바보 같은 악당들을 습관적으로 만드는 작가들도 있는데, 그런 것이 요즘엔 거의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자고로 악당은 악당다워야 하는 것이다.
사실 초심자만 악당을 잘 못만드는 것은 아니다. 나름의 경력을 갖고 있는 작가들 중에서 악당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 허다하다. 주인공은 스토리의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부터 구체화 되기 시작하지만, 악당은 주인공만큼 오랜 시간 공을 들이지 못한다. 또한 각 스토리들의 주인공들의 끼리는 쉽게 변별성을 갖지만, 악당들은 어쩐 일인지 대동소이하다. 때문에 악당다운 악당, 차별화된 악당을 그리는데 주인공만큼, 때론 그 이상으로 공을 들여야 한다.
<범죄도시>가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재미가 없어지는 것은, 주인공 캐릭터를 포함한 이전 작품의 자기 복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점점 잔인해지기는 하지만, 1탄에 나왔던 '장첸(윤계상)'을 능가하는 매력적인 빌런이 등장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적대자가 갖춰야 할 요건을 살펴보자.
적대자는 주인공과 목표가 같거나, 목표를 이루는데 강력한 위협이 되어야 한다.
<반지의 제왕>는 프로도는 '절대 반지'를 파괴해서 중간계를 구하려 하고, 사우론은 반지를 되찾아 악의 지배력을 되찾으려 한다. 즉, 둘은 절대 반지를 두고 대결을 펼치는 것이다. <쇼생크 탈출>에서 앤디는 자유와 정의 실현을 위해서 탈옥을 하려하고, 교도소장 노튼은 그가 탈출하지 못하게 감금하고 감시를 한다. 여기서 교도소장은 앤디가 목표를 이루는데 장애가 된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는 과거의 사랑인 데이지를 되찾으려 하지만, 현재의 남편 톰은 그것을 방해한다. <타이타닉>에서 가난한 화가 잭은 로즈를 두고 약혼남 칼과 대립한다.
적대자는 힘과 지략, 실력 등 어느 한 가지 이상에서 주인공보다 확실하게 우위에 있어야 한다.
<반지의 제왕>에서 사우론은 모든 면에서 프로도를 압도하는 힘을 가졌고, <해리 포터>에서 몰드모트 역시 해리를 능가하는 엄청난 힘을 가졌다. <글래디에이터>에서는 일개 검투사인 막시무스에 비해 코무두스는 막대한 권력을 가진 로마 황제이다.
스포츠물을 보면, <록키>에서는 3류 복서인 록키는 실력과 명성에서 그외 비교도 안 되는 세계 챔피온 아폴로와의 대결을 펼치고,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에서는 기술과 체력, 조직력 등 모든 면에서 한국보다 강한 전력을 갖춘 외국팀과 대결한다.
적대자는 자기만의 논리와 철학으로 무장되어 있을 때 빛을 발한다.
적대자가 갖춰야 할 요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주인공보다 더 유명한 적대자는 바로 이 요건을 제대로 갖췄을 때 나온다.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는 자신을 괴물이 아니라, 예술가 또는 심미적 도덕주의자로 여기며, 탄탄한 이론적 논리를 갖추고 있다. 그는 아무나 죽이지 않으며 무례한 자, 교양없는 자, 탐욕스러운 자 등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사람들만 매우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한다. <어벤저스>에서 타노스는 세상의 생명 절반을 없애면 나머지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신념으로 부자든 가난한 자든, 강자든 약자든 간에 공정(?)하게 절반을 없애려고 하는 인물이다. <어 퓨 굿 맨>에서 제섭 대령은 자신이야 말로 나라를 지키는 진짜 군인이라 생각하며,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법이나 윤리를 초월하는 조치도 필요하다고 믿는 인물이다. <배트맨>에서 조커는 배트맨이 추구하는 세상의 정의와 질서가 위선적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고담을 무정부 상태로 몰고 간다.
다음은 조력자 차례.
조력자는 말 그대로 주인공을 직/간접적으로 돕는 인물인데, 보통 ‘조연’ 또는 ‘버디 캐릭터’라고도 한다. 하지만 조력자라는 캐릭터는 단순히 주인공 옆에 붙어있는 인물이 아니다.
조력자는 주인공의 약점을 보완해주며, 플롯의 진행에 꼭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행동을 함께함으로써 극의 밀도를 높이는 존재이다.
<해리 포터>의 론과 헤르미온느, <겨울왕국>의 올라프, <타이타닉>의 잭 등이 모두 조력자이다. 이들은 주인공 혼자서는 이겨내기 힘든 시련을 함께 이겨내고, 때로는 갈등도 겪으면서도 결국 주인공을 목표로 이끌어가는 ‘동행자’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조력자가 지나치게 많으면 오히려 스토리를 느슨하게 만들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특히 모든 상황에서 항상 도와주는 전천후 조력자는 주인공의 능동성을 갉아먹고, 서사의 긴장을 떨어뜨린다.
따라서 조력자는 주인공의 성장에 도움을 주되, 모든 문제를 대신 해결하지 않도록, 작가의 적절한 조절이 필요하다.
다음은 멘토.
멘토는 주인공에게 통찰과 조언을 주고, 결정적인 순간에 깨달음을 유도하는 존재이다. 단지 정보 제공자라기보다 세계관의 규칙과 주제를 대변하는 인물로 보는 것이 옳다.
<스타워즈>에서 루크 스카이워크에게 포스와 제다이의 길을 가르치는 오비완 케노비와 제다이의 정신적 스승 요다, <해리 포터>에서 해리 포터의 인생 큰 스승인 덤블도어, <라이온 킹>에서 심바의 아버지인 무파사와 현명한 주술사 원숭이 라피키,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에게 매트릭스의 비밀 등을 알려주는 모피어스와 네오의 존재와 운명을 깨닫게 해주는 오라클, 그리고 <반지의 제왕>에서 모험의 여정을 인도하는 간달프 등이 대표적인 멘토이다.
이들은 보통 주인공보다 연장자이거나 더 많은 지식과 통찰을 지닌 존재로 등장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동년배 친구일 수도 있고, 때론 순진무구한 동심의 어린 아이일 수도 있다. 가령, <해리포터>에서 나오는 해리포터의 친구 루나 러브굿이 그런 멘토이다. 그녀는 해리나 친구들이 절망했을 때 그들과 같은 아픔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공감해주고 용기를 준다. 이런 인물은 조력자로 구분할 수도 있지만, 조력자 겸 멘토로 구분하는 것이 집필할 때 더 도움이 된다.
멘토는 죽음이나 퇴장의 방식으로 ‘멘토의 부재’를 극복하게 만드는 스토리텔링의 변곡점을 제공하기도 한다.
<해리포터>에서 덤블도어의 죽음은 해리포터를 보호 받는 어린 아이에서 스스로 싸움을 선택하는 전사로 탈바꿈 시켜준다. <라이언 킹>에서 아버지 무파사의 죽음은 아들 심바에게 왕으로서의 책임감을 받아 들이게 한다. <스타워즈>에서 오비완 캐노비의 죽음은 루크 스카이워크가 포스를 받아 들이고, 영웅의 길을 가게 만든다.
멘토의 부재는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그 동안 의지해 왔던 어떤 보호막이 소멸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멘토가 사라지는 순간, 주인공은 자신의 힘으로 운명과 맞설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그 순간부터 더 이상 조언자나 방향을 제시해 줄 사람의 도움 없이 홀로 이야기의 완결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멘토 중에는 꼭 선하고 따뜻한 존재만 있는 게 아니다. 멘토의 기능을 하되, 어둡고 위험한 통찰을 주는 존재도 있는데, 이를 '다크 멘토'라고 부른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배트맨의 적대자이자, 다크 멘토이기도 하다. 그는 배트맨에게 ‘진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내적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는 FBI 수습요원 클라리스에게 결정적 단서를 주지만, 동시에 그녀의 내면을 해부하고 시험에 빠뜨리는 위험한 다크 멘토이다.
조커나 한니발 렉터 같은 캐릭터는 기능적으로 두 가지 캐릭터를 동시에 수행하는데, 이렇게 기능이 조합된 캐릭터를 '복합 캐릭터'라고 한다. 이런 인물들은 그 자체로 입체성을 띄며 스토리를 풍성하게 만드는데 일조한다.
<타이타닉>의 잭은 주인공 로즈의 조력자이면서 멘토이다. 로즈와 사랑에 빠지는 것과 동시에 그녀를 주체적인 여성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멘토 역할을 한다. <해리포터>에서 스네이프 교수는 적대자인 줄 알았는데, 후반부에 조력자임이 드러나는 긍정적 변절자 유형이다. 이런 캐릭터는 단지 선악만으로는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입체적이면서 매력적인 인물이 될 공산이 크다.
결국, 캐릭터 세팅에 있어서 당신이 명심해야 할 것은 이렇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태양과 같은 주인공이 있고, 모든 인물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공전을 하면서, 주인공과 호불호의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각 인물들이 주인공의 여정을 위해 어떤 기능, 즉 순기능을 하냐, 역기능을 하느냐이다.
그런 원칙으로 필요에 의해 캐릭터를 하나씩 만들어내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