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북도 개성에서 드시던 추억의 맛을 선사하며
“엄마! 우리 할아버지 댁 가서 팬케이크 해 먹을까요?”
할아버지가 팬케이크 좋아하시잖아요. 팬케이크에 꿀 잔뜩 뿌려서~~~ ”
“그래~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왜 팬케이크를 좋아하시는지는 알고 있니?”
“부드럽고 단 음식이니까요.”
주말 아침! 우리 집 먹보대장 둘째 아들이 시럽을 뿌리는 시늉을 해 가며 팬케이크를 해 먹자고 말합니다. 그것도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이시니 할아버지 댁에서 가서 만들어 먹자고 말입니다. 할아버지와 팬케이크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지만 아버님은 정말 팬케이크를 좋아하십니다. 손주가 알고 있는 대로 팬케이크가 단순히 달고 부드러워서만은 아닙니다. 그 옛날 젊은 날의 추억의 맛이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은 올해 92세이십니다. 한국전쟁을 거쳐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지내오신 어르신께서 서양 음식에 무슨 추억을 지니셨겠는가 싶지만 대한민국의 슬픈 역사는 아버님께 팬케이크의 추억을 선물했습니다. 아버님은 개성에서 서울로 유학 와 대학 2학년을 다니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나 밀리고 밀려 부산으로 피난을 가셨고 그 곳에 있는 미군부대에서 접시를 닦고 청소도 하며 생계를 이어 가셨다고 합니다. 미군들이 먹던 음식을 나눠주곤 할 때 팬케이크를 접하셨다니 그 강렬한 달콤함이 오죽했을까 싶습니다. 전쟁은 터지고 부모형제 없이 외지에서 어떻게든 먹을 것을 구해서 살아야 했던 시절. 젊고 가난하고 불행했던 대한민국 한 청년에게 팬케이크야 말로 천상의 음식이었을 것입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아이들과 서둘러 시댁에 가서 팬케이크를 신나게 해 먹었습니다. 밀가루에 베이킹파우더를 섞고 계란을 풀어 한데 섞어 팬케이크를 만들면 접시에 내놓기가 무섭게 사라져 준비한 모든 반죽이 바닥을 보이고 맙니다. 연로하신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주들이 함께 즐기는 이 곳이 바로, 팬케이크 맛집입니다.
그러나 며느리인 저는 아버님의 추억 음식이 따로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팬케이크처럼 뚝딱뚝딱 만들어 낼 수 없을뿐더러 노하우는 물론 시간과 정성이 절대 필요한 것! 바로 보쌈김치입니다. 보쌈김치 하면 족발이나 수육을 먹을 때 곁들이는 빨갛고 먹음직스러운 김치를 떠올릴 터이나 아버님이 추억하는 보쌈김치는 아버님의 고향이신 평안북도 개성에서 드셨던 개성식 보쌈김치, 일명 쌈 김치입니다. 보쌈김치는 대접 같은 보시기에 개성에서 나는 폭이 넓은 배춧잎을 깔고 낙지, 명태, 굴, 밤, 대추, 잣, 배 같은 각종 부재료와 나박하게 썰어 절인 무와 배추, 갓과 미나리 등 각종 주재료를 함께 양념하여 넣고 낙지 잣 감 등을 고명으로 올려 쌈을 싸는 것입니다. 그리고 북어 끓여 식힌 물을 붓고 익혀 먹습니다. 해물 등이 들어가 있어 통배추로 담그는 김장김치처럼 일 년을 저장해 먹을 수도 없어 많은 양을 담글 수도 없습니다. 고급 재료들이 들어가고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지금은 임금님이 드시던 김치라고도 불리고 있지만 아버님 고향 개성에서는 웬만한 가정에서는 두루 보쌈김치를 드셨답니다.
"개성에서는 으레 보쌈김치를 담가 먹었지. 김장철이 되면 수레에 배추를 한가득 싣고 와서 아낙네들이 쭉 둘러앉아 쌈을 쌓지. 여자들은 막김치를 담가 먹고 남자들은 쌈김치를 먹었어. 손님이 오시면 쌈을 상에 올리곤 했지.”
남자들이나 손님들만 먹을 수 있는 김치였으니 1950년 한국전이 발발하기 전, 아버님이 태어나고 자라던 시대에는 당연히 남녀가 유별하여 하는 일은 물론 먹는 음식에서도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서울에서 홀로 유학 중에 전쟁이 터져 부모형제가 있는 고향 개성은 가지도 못하고 남쪽으로 밀려 밀려 내려가 살아내야만 하는 상황이셨으니, 보쌈김치는 전쟁통에 언감생심 꿈도 못 꾸셨겠지요. 전쟁이 끝났지만 아버님은 더 이상 개성에 발길을 옮기지도, 고향에서 어머니가 담가 주셨던 보쌈김치의 맛을 더 이상 맛보지 못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각인된 추억의 맛은 결코 잊힐 수 없는 법입니다. 개성에서 피난 온 형제자매, 친지들과 한 고향이신 어머님을 만나 가정을 꾸리셨기에 개성식 보쌈김치는 해마다 김장 때면 그 옛날의 맛을 추억하는 부활 음식이 됐습니다. 겨울이면 보쌈김치를 싸서 새 해에 기분 좋게 꺼내 드셨고 솜씨 좋게 만든 집에서는 고향을 생각하며 나눠 드시기도 했답니다.
음식도 시대를 잘 만나야 합니다. 분주한 도시문화와 여자들의 노동력이 부엌에만 머물 수 없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개성식 보쌈김치의 명맥을 유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녔습니다. 서른이 훌쩍 넘어 결혼했지만 제게 부엌은 가장 힘들고 어려운 공간이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익숙하지 않아 낯설고 어색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직장생활을 하며 집안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기에 좀처럼 관심 밖의 영역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당연히 김장날이면 속이 시끄러웠습니다. 어머님께서 각종 재료들을 준비하시고 보쌈김치 담그는 법을 알려주신다 하는데도 좀처럼 손에 익질 않아 고전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김장을 털어낼 양으로 배춧잎 속에 재료를 많이 넣었더니 치마 차락에 포옥 싸인 고운 자태는 간데없고 들쑥날쑥 성나게 뻗친 머리카락처럼 삐쭉삐쭉 재료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어머님의 한마디를 들을라치면 평양감사도 제 하기 싫으면 고사한다고 그 귀한 김장 재료들이 어느 것 하나 귀히 여겨지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왜 아버님은 유난하게 이런 김치를 좋아하시냐며 속으로 투덜거렸습니다. 결국 서 너번의 김장을 끝으로 시댁에서 김치를 담그는 행사가 사라졌습니다. 어머님이 연로해지신 것이 이유였지만 혹여 며느리 상황을 먼저 헤아리셨던 것은 아닌지 어른들의 마음이 떠오릅니다.
결혼 14년을 훌쩍 넘어선 지금 신혼 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웃음보가 터집니다. 설거지 하나 하는 것도 힘들어 버벅거리며 온 바닥을 물 천지로 만들고 계란말이는 요리인 듯 거창하게 여겼으며 시금치 한번 무치려면 반나절은 걸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코노라19라는 바이러스로 집콕 시대가 되니 세 아이들에게 삼시 세 끼를 차려주는 열혈 주부로 눈썹이 휘날리도록 부엌에서 음식과 관련하여 각종 재주를 부리고 있습니다. 마지막 보루라고 여겼던 김치마저도 올해 들어 깍두기부터 시작해 물김치, 오이지까지 담가 세 아이들을 먹였지요. 늦둥이 막내가 김치를 먹겠다 하니 어느새 저는 유튜브 요리 채널을 보며 김치를 담그고 있더군요. 부모 사랑은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집니다. 신혼 초 철없는 며느리가 담근 볼품없는 보쌈김치를 환한 미소와 함께 “아~ 시원하다”하시며 드시던 아버님 음성이 귓전에 맴도는 듯합니다.
아버님! 저는 아버님께서 꾸준히 운동하시고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하시니 현역 100세는 당연하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안경 도수를 변경하러 안경점에 가셨을 때 정밀검사를 받으라는 말씀을 들으시고 황반변성이라는 진단을 받으셨을 때 정말 놀랐습니다. 또 이빨이 불편하셔서 엑스레이를 찍으셨더니 이빨을 지탱하는 뼈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더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육신의 나이가 쇠하는 절대불변의 진리를 무시하며 지내던 어리석은 저를 보았습니다.
음식에 대한 미각은 강하고 또렷해서 선명한 추억이 된다고 합니다. 이제는 못 먹어서 굶어 죽는 사람은 없는 시대라건만, 대한민국에서 아내는 연로해 담글 수 없고 자식들은 바쁘고 분주해서 집에서 담근 그 시원하고 개운한 보쌈김치를 머나먼 추억의 한편에 묻어두고 빗장을 채우셨다고 생각하니 자식의 도리가 앞서며 코끝이 찡합니다.
아버님! 제가 그 추억 속 보쌈김치를 재현하려 합니다. 김장철까지 기다리려니 마음이 다급하여 발걸음은 이미 마트로 향합니다. 한여름을 향해 가는 중이라 배추가 있으려나 우려했건만 커다란 통배추를 보는 순간 얼마나 반갑던지요. 어느 것이 푸른 잎이 많은지 이리저리 살피며 처음으로 절여있지 않은 통배추를 골라 좋아합니다. 메모지에 적어간 대로 재료를 하나둘 챙기는데 생 굴은 구하기 쉽지 않아 포기했지만 보쌈김치용 장바구니가 넘쳐나니 신이 납니다.
집에 와서 재료들을 다듬고 김치명인이 만드는 보쌈김치 동영상을 틀어넣고 만반의 태세를 갖췄습니다. 전문가의 능숙함과는 다른, 서툴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김치를 자르고 양념을 버무리며 쌈을 싸는데 여기저기 실수투성이입니다. 어머님께 전화를 드려 방법을 여쭤볼까도 했으나 깜짝 선물을 드리고픈 마음에 혼자서 끙끙거리다 흐트러진 쌈을 폈다 오므렸다, 김치 속을 넣었다 뺐다 우왕좌왕합니다. 몇 번의 실수를 거듭하다 모양새가 잡히자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쉽니다. 푸르고 넓은 배춧잎에 양념해 둔 납작하게 썬 배추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그 사이에 나박하게 썬 무와 배를 넣고 해산물과 대추와 밤 등의 고명을 얹습니다. 그리고 보자기를 잘 오므려 넣기를 10여 차례 하고 나니 통이 꽉 찹니다. 보를 쌀 배춧잎도 떨어지고 김치도 자잘한 것들만 남아 이것들은 섞어 따로 먹어야겠습니다.
아버님! 개성식 보쌈김치가 한 여름의 코 앞에서 맛있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푸르고 넓은 잎을 가진 배추 안에서 살포시 자리 잡은 배추와 무, 낙지와 전복, 새우와 밤이 어우러져 북어와 각종 야채를 우린 육수 속에서 맛의 향연을 펼치고 있습니다. 일주일 뒤면 맛있게 익은 보쌈김치를 상 위에서 시원하게 펼쳐 드리겠습니다. 개운하게 한 조각 한 조각 꺼내 드실 때마다 아버님의 추억의 맛도 되살아나 건강하게 백세 인생을 펼쳐가시길 기도하며 말입니다.
“아버님! 개성식 보쌈김치 드시고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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