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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뚜두 May 18. 2020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시한부 선고

가끔은 살려고 노력하느라 진짜 살 시간이 없는 것 같아


영화를 생각하면 비쩍 마른 매튜 매커너히의 몸부터 자동적으로 떠오른다.

에이즈에 걸린 주인공 론 우드루프, 에이즈 이전에는 쾌락을 으며 살았고 동성애자를 혐오하던 그가 어느 날 AIDS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1980년대 에이즈에 대한 정보가 생소하던 시절)

에이즈는 호모들이나 걸리는 병이라고, 일종의 인과응보라고 생각했던 그는 큰 충격에 빠지게 되고 이때부터 살기 위해 발버둥치기 론.

겨우 몇 달 살 수 있을 거라 진단 받았던 그는 새로운 약을 통해 7년을 더 버틸 수 있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그토록 혐오했던 부류 트렌스젠더 레이언을 만난다(자레드 레토)

영화를 소개하고자 하는 글이 아니기에 줄거리는 이쯤에서 각설하고…….


‘가끔은 살려고 노력하느라 진짜 살 시간이 없는 것 같아’

저 대사를 통해 생각해 본다.

그는 왜 살고 싶었을까? 너무 당연한 질문일까.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기 전까지

그렇다면 그는 왜 진짜 ‘살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 삶을 살지 않았던 걸까?

내게도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산다는 것, 삶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시간들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진짜 살고 싶어 하는 순간들.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진짜를 산다는 건’ 삶의 형태를 의미하는 것일까?  

트렌스젠더 레이언과 친구가 되고 깊은 유대를 느끼게 되는 론.  

같은 사람으로서,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에이즈 환자로서, 따스한 온기가 있는 누군가로서 론은 레이언을 다시 보기 시작하고 자신의 삶 또한 다시금 마주하게 된다.

  

누구나 그렇듯 레이언은 결국 죽는다.

론은 그 죽음을 통해 다른 ‘선고’를 받게 된다.  

의사에게 받았던 무미건조한 ‘시한분 인생’ 진단과는 다른 선고를.

죽음 이전에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삶의 진실한 모습들을 놓치고 살았음에 대한 선고를...

왜 울고 있는 거야...

제대로 된 삶은 무엇일까?

‘지금 여기’

나와 관계된 것들에 진실하게 다가가는 것?

정의는 각자가 내릴 일이다.  

정답은 알 수도 없고 정해진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의 시간을 다른 속도로 흐르 만들어주는 것만 같다.

마치 '진실된 삶이라는 블랙홀'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처럼..


정말로 진짜, 살려고 노력 하느라 ‘진짜 삶’을 살 시간이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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