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 워커에 진청 카고 바지, 오버핏 셔츠, 눌러쓴 비니, 흔들리는 링 귀고리. 이십대 초반쯤 됐을까? 을지로입구역에서 올라탄 한 남자가 내 맞은편에 앉았고 나도 모르게 그에게 시선이 갔다. 사람을 잘 쳐다보지 않는 성격이기에 평소 같았으면 눈길을 주지 않았을 텐데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흘끔거린다고, 그것도 같은 남자가 그런다고 불쾌해하면 어쩌나 걱정이 들면서도 시선을 거둘 수 없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무엇이 내 신경을 끌고 있는지 곧 알 수 있었다.
츗츗 춧. 트드트드.
스틱으로 약하게 드럼의 심벌을 건들이듯 툭툭 밟는 스텝. 서서히 움직임을 빨리하며 경쾌하게 움직이는 앞발.
고개를 까딱거리는 동작.
살짝 웃고 있는 입꼬리.
들썩거리는 검정 셔츠.
그에게서 느껴지는 비트감.
자리에 앉자마자 흘러넘친 그루브, 그의 발재간은 그렇게 시작됐다. 조금은 경박스럽다 생각하면서도 그가 뿜어대는 리듬감에 나도 모르게 빠져갔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옆자리 승객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는 앞발을 슬쩍 들어 올렸다가 뒤꿈치를 좌우로 흔들었고 충정로쯤 왔을 때엔 미세하게 어깨를 흔들어댔다.
워커가 만드는 규칙적인 소음과 들썩이는 무릎 앞뒤로 쳐주는 어깨의 동작을 느끼고 있다 보면 어느새 나 역시 그를 흉내 내게 됐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열기가 싫지 않았고 2호선을 탈 때마다 느꼈던 피곤함과 무력감에서 조금씩 해방될 수 있었다.
주로 9호선과 4호선을 이용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목요일만은 꼭 2호선을 타게 되는데 항상 지칠 대로 지쳐 전철에 오르게 된다. 팟캐스트 녹음에 단체 수업까지 있는 날이어서 모든 일정을 마치고 몸을 실을 때면 어느새 정신은 곤죽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루브 전도사그를 만난 날도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볼륨 없는 머리, 뒷머리가 눌릴까 슬쩍만 뒤로 누워 반쯤 눈을 감고 있었다. 사람들도 대부분 스마트폰을 보거나 초점 없는 눈으로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그보다 두 정거장 앞서 전철에 몸을 실었고 그가 오기 전까지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던 중이었다.
그런 내 눈에 들어온 그의 그루브. 이상하리만큼 청량한 느낌. 전해지는 유쾌함.
그래서 눈을 뗄 수 없었는지 모르겠다.
때때로 그는 눈을 감고 슬쩍 미소를 짓기도 했다.
'이제는 물아일체의 선경에 들어선 거니?'
그 퓔링~ 내게도 나눠준다면....
그 순간, 2호선 끝에서 두 번째 칸을 지배하고 있던 건 그가 만들어 내는 그루브였고 나는 그가 운전하는 전철에 몸을 실은 승객처럼 함께 그루브를 탔다.
전철은 합정을 지나 지상으로 나왔고 어슴푸레한 한강을 건넜다. 당산철교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야경. 강변북로를 메운 차량의 행렬. 강가 수풀 사이엔 낚시꾼들이 켜 놓은 랜턴이 주변을 환하게 비추기도 했고 이따금 낚싯대를 힘껏 던지는 사람도 보였다. 검푸른 강물에는 길고 긴 빛이 줄지어 달렸다.
우리가 타고 있는 전철이었다.
창을 열어 바람을 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동안 전철은 한강을 건넜다. 그리고 당산역 도착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새어나왔다.
너도 당산?
가방을 메고 일어서는 날 따라 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볼에 바람을 잔뜩 불어 넣고는 입술을 씰룩거렸다.
입으로라도 비트를 맞추고 있는 거야?
밖으로 나와서는 사람들 틈에 섞여 서로를 떠나보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2번 출구 근처에서 그를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는 한쪽 구석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그런 그에게 한 아주머니가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화들짝 놀란 그가 자신 앞에 서 있는 중년 여성에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카드 떨어졌어요.”
여성은 그 말을 전하고 곧 자리를 뜨려했는데 남자에게서 아무 반응이 없자 다시금 얘기해 주었다.
"아유, 카드 떨어뜨렸다고요. 밑에 봐. 여기 여기."
그래도 그는 얼른 카드를 줍지 않고 왠지 알 수 없는 손짓만 반복했는데 여자가 답답했던지 직접 카드를 주어 남자에게 건넸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남자가 여자에게 넙죽 절하며 고맙다는 표시를 했다. 그러고는 알아듣기 힘든 소리와 손짓으로 뭔가를 표현했다.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중년 여성은 곧 상황을 이해해했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자리를 떴다.
그는 농인이었다.
내가 아주 컴팩트한 이어폰으로 오해했던 물건은 보청기였던 모양이다.
김포로 가는 광역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정류장 앞 편의점에서 뭔가를 사서 밖으로 나와 골목을 향해 걸었다. 그는 그렇게 멀어져 갔고 선선해진 바람이 긴 줄 끝에 선 내 얼굴을 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