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듀! 뭍이여
해가 질 무렵이었지. 그날은 유난히도 노을이 붉고 아름다웠어. 하지만 해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파티를 즐기느라 마젠타 빛깔로 물들어가는 바다도 수평선 너머 가라앉는 바알간 태양의 마지막 따스함도 쳐다볼 여유가 없는 듯했어. 오직 이 파티의 주인인 브랜든의 충실한 친구이자 반려견인 골든 레트리버 브렌다만이 모래사장 한편에 누워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어. 그때였어. 넘실대는 파도 속에 황금빛 미역줄기 같은 것이 흐느적대고 있었지. 파도가 솟구칠 때마다 드러나는 창백한 얼굴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보랏빛의 영롱한 비늘에 브렌다는 깜짝 놀랐어.
사람인가? 아냐 어쩌면 그 아인인지도 모르겠어. 벌써 몇 주 동안이나 조가비 바위 위에 몸을 숙이고 앉아서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그 인어. 오 이런... 어쩌지? 정신을 잃은 것 같아.
브렌다는 벌떡 일어나 달렸어. 바다 수영은 자신이 없었지만 무작정 뛰어든 거야. 오직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사실 소녀는 흠모하는 사람을 훔쳐보기 위해 정신을 놓고 있었는데 그만 짓궂은 돌고래의 꼬릿짓 장난에 정신을 잃었던 거야.
인어 소녀가 눈을 떴을 때, 매력적인 금발의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어. 물을 토하고 가쁜 숨을 몰아쉰 소녀는 인어인 자신이 인간에게 존재를 들켰다는 사실에 두려웠지만 한편으론 행복했어. 그토록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인간 남자를 바로 코앞에서 만나게 됐으니까. 남자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생각했어.
도대체 이 아름다운 인어는 어디에서 왔을까? 그리고 어째서 바다 속에서 정신을 잃고 뭍으로 떠밀려 온 거지……. 그래 언젠가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 아름다운 인어의 전설을.
이봐요. 에리얼 정신이 좀 들어요?
푸른산호바다의 신 카라스의 딸인 소녀는 모든 생명의 말을 들을 줄 알고 또 할 수 있었기에 브랜든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었어. 그의 음성은 따스하고 또 부드러웠지. 마치 파랑갯민숭달팽이의 살결만큼이나 부드럽다는 생각이 들었어. 얼마 안 있어 그들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왔어. 그리고 소녀는 조심스레 말했어.
에리얼이라고요? 절 그렇게 불렀나요? 소녀는 인간의 이름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정신이 없는 통에 그저 네, 하고 말하고는 뜸을 들이다 다시 말을 이었어.
당신이 절 구해주셨나요?
그때 브랜든 곁에 있던 골든 레트리버가 환하게 웃으며 자그마하게 짖었어.
살아났구나. 정말 다행이야.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소녀는 그 따스한 눈빛과 촉촉한 콧잔등 그리고 커다란 귀를 보며 방금 전에 일을 떠올렸어. 그러곤 고맙다고 인사하려는 순간, 브랜든이 소녀를 번쩍 안아든 거야.
당신 정말 인어공주인가요? 세상에... 이럴 수가. 내가 인어를 만나다니.
브랜든은 자신이 인어를 만났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그녀를 간호하기 위해 자신의 별장으로 돌아갔어. 사람들 역시 그들을 따라갔지. 브렌다 또한 에리얼이 걱정돼 집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지만 사람들은 브렌다를 들어오지 못하게 했어. 어쩔 수 없이 브렌다는 두 발을 창가에 기댄 채 소파에 누워 있는 소녀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았어. 아쉬웠지만 한편으론 기뻤어. 자신이 작은 소녀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어 아이를 살려냈다는 사실이. 그리고 지금 그녀가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에.
하루 이틀 그리고 많은 여름밤이 깊어갔어. 그들은 사랑에 빠졌고 브랜든이 자신을 구해줬다고 믿은 소녀는 브랜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알려주었어. 브랜든도 그녀를 사랑했어. 하지만 브랜든은 진정한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 것에 대해 슬퍼했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브랜든은 평범한 사람들처럼 삶을 누리고 싶어 했거든. 푸른 산호를 닮은 사랑스런 소녀의 눈빛으로도 달랠 수 없는 일이었어. 브랜든의 마음을 알게 된 소녀는 처음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했어.
왜 난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한 걸까!
소녀는 슬펐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끝내는 가장 소중한 것까지 먹어버리는 슬픔이었어. 결코 헤어날 수 없는 바다 소용돌이처럼.
만월의 어느 밤, 달의 기운이 바다 깊은 곳까지 뻗어 있을 무렵 소녀는 긴 꼬리를 모래사장에 끌며 바다로 나아갔어.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던 브렌다가 얼른 곁으로 다가갔어.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거니?
브렌다, 날 좀 바다에 데려다주겠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그건 아니야. 하지만 사랑하는 브랜든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생겼어.
오, 뭔가를 희생하려 한다면 제발 그러지마.
걱정하지 마. 날 위해 하는 일이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일이고...
그렇게 소녀는 바다 속으로 들어갔어. 스무 하루를 쉬지 않고 깊은 잠영을 한 뒤에 에리얼은 한 수중 동굴 앞에 멈춰 섰어. 그곳은 먼 옛날, 신이 이 세상을 벌하기 위해 육지에 뿌린 빗물이 모여 있는 곳으로 모두들 두려워하는 곳이지. 그리고 그곳에는 깊은 흑암의 샘을 지키는 사자이자 악마, 마녀 그리고 타오르는 얼굴이라고 불리는 하루카가 살고 있었지.
소녀는 소원을 말했어.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루카는 세상에서 가장 검게 빛나는 눈동자로 답했어. 언약의 소원과 그에 따른 저주는 그 무엇도 깨트릴 수 없다고. 그러고는 그 대가를 물었어.
제가 무엇을 드려야 하죠?
오로지 같은 무게의 슬픔 혹은 사랑으로 그것을 갚을 수가 있단다. 네가 원하는 게 현재의 사랑이지? 그렇다면 미래의 사랑을 그 대가로 포기해야 돼.
좋아요. 하겠...
아니 아니. 어린 소녀야 잘 생각해야 돼. 너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독한 저주를 밑천 삼아 소원을 빌고 있는 거야. 그 소원이 배신당할 땐 또 다른 저주가 널 덮칠 텐데 상관없겠어?
사랑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겠어요.
하루카가 거대한 두 손을 물 위로 뻗고는 바다 위로 떨어지는 별똥별을 잡아채고 말했어.
좋아. 이 별똥별에 대고 우리의 계약을 언약하지. 라훌라아바!
인간이 된 소녀는 커다란 공기방울에 담겨 육지로 실려 갔어. 그리고 하루카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바다를 울렸어. 사랑을 이루지 못할 때 저주가 되어 돌아오리라. 그렇게 되기만 하면 넌 바다 생물 중 가장 독하고 징그러운 존재로 변할 것이며 네 손 끝에 닿는 모든 것이 너와 같이 변해 영원히 사랑을 받지도 하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걱정 속에 기다리던 브랜든은 사람이 되어 나타난 소녀를 보고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어. 그리고 입을 맞췄지. 사랑의 맹세를 하면서 말이야.
그 둘은 행복했어. 미래를 꿈꾸었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는 깨달았어. 자신이 대가로 지불한 미래의 사랑이 무엇이었는지. 소녀는 사람이 되었지만 진정한 사랑을 자신의 몸속에 품을 수는 없게 된 거야. 브랜든은 개의치 않다고 말했지만 그의 눈빛은 생기를 잃어갔지. 인간에게는 세월이라는 게 있었던 거야.
겨울이 오고 봄 그리고 몇 번의 여름이 다시 왔을 때쯤 브랜든은 슬픈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어. 어쩐지 쓸쓸하고 구슬퍼보였어. 소녀가 바람에게 물었어. 그리고 갈매기에게도 물었지. 지나가는 바닷게에게도 물었고 산란을 하러 나온 바다거북에게도 물었지.
브랜든의 가슴은 뛰고 있나요? 그의 마음은 무슨 색으로 물들어 있죠?
바람이 소녀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어. 바닷게도 비눗방울을 통해 말했어. 야자수 위를 비행하던 갈매기도 날갯짓으로 말했지. 소녀의 눈에 투명하고 몽글한 뭔가가 맺혔어.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어. 그리고 그건 세상에서 가장 짠, 그 어떤 바닷물보다도 짠 맛을 냈어. 가슴에서부터 올라온 그 물은 소녀의 속눈썹을 적시고는 턱을 타고 흘러 가슴 그리고 다리를 타고 모래에까지 닿았어. 그 순간 소녀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어. 아니 똑바로 설 수 없었어. 소녀가 쓰려지려던 찰나 지켜보고 있던 브렌다가 뛰어와 소녀를 안았어,
오! 이런, 숨을 쉴 수 없나봐. 어쩌면 좋지?
날 바다로 데려다 줘.
소녀의 몸은 변해갔어. 아름답던 머리털도 흩어져 사라져버리고 부드럽던 피부도 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지.
소녀야, 정신 차려... 제발 죽지 마. 날 두고 떠나지마
바다에 도착한 소녀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바뀌고 말았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독을 가진 오색해파리로. 소녀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지 촉수가 사방으로 뻗어나갔고 금방이라도 브렌다를 찌를 것 같았지.
브렌다, 날 떠나. 제발 부탁이야. 난 이제 더 이상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게 됐어. 인어로도, 사람으로도 그리고 너와 같은 모습으로도 될 수가 없어.
바보! 넌 결코 그 누구도 닮을 필요가 없어. 모르겠니? 너 자신이면 돼. 지금 네 모습 그대로. 너를 위해 내가 너를 닮을 거야. 내가 너를 받아들일 거야. 내가 네 곁에 있어 줄게.
뜨거운 태양이 뭉근한 빛을 넘실거리며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중이었어. 브렌다는 소녀의 긴 촉수를 들어 자신의 가슴을 찔렀지. 그러면서 말했어.
이걸로 우리는 하나가 됐어. 그거면 족해.
브렌다 역시 오색해파리로 변해갔고 마침내 소녀가 웃었어. 그들은 서로의 촉수를 누가 더 멀리 뻗나 내기를 하며 저물어가는 노을빛을 구경하며 나아갔어. 하늘은 맑고 파도는 잔잔했어. 어쩌면 오늘 밤에라도 태풍이 몰아칠지 몰랐지만 그들은 상관없었어. 이 세상 어떤 끈보다도 더 질긴 촉수로 서로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