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 모양 지우개
4학년 체육 시간, 남녀 애들이 섞여 발야구를 하고 있었다. 2번째 주자로 나선 나는 땅볼을 차는 바람에 금방 아웃이 됐고 선생님께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말을 한 다음 교실로 돌아갔다. 그 당시는 누구나 핸드폰을 휴대하던 시절이 아니어서 당번 같은 게 필요 없었기에 나는 조용히 교실 문을 열고 맨 뒷자리의 정헌이 책상 앞으로 갔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서랍을 뒤졌지만 과자 봉지, 몽당연필, 두 권의 공책과 국어 교과서만 나올 뿐 내가 찾는 그것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르고 2층 교실 창가로 가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내 대신 누군가가 들어갔는지 이미 공수가 교대됐는데도 날 찾는 것 같진 않았다. 얼른 정헌이 자리로 돌아간 나는 빠르게 가방을 뒤졌지만 공책과 리코오더 외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다른 애한테 잃었나? 아닌데... 정헌이가 다 따먹었는데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신발주머니를 열어 흔들었더니 그곳에서 온갖 종류의 지우개 수십개가 쏟아져 나왔다. 세모 지우개, 야광 지우개, 향기 지우개, 건담 지우개 등 정말 다양한 종류의 지우개가 그 안에 담겨있었다.
신발주머니에다 모아 놓고 있었네?
나는 그 수십개의 지우개 중 오로지 그것만을 찾았다.
어디 있지? 이상하네... 어! 여깄다.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고 얼른 다른 지우개들은 다시 신발주머니에 넣어 둔 채 내 자리로 돌아갔다. 창 밖에서 아이들의 와! 하는 함성이 들렸다. 누군가 홈런을 찬 모양이었다. 나는 서둘러 짝꿍 윤미의 서랍을 뒤져 필통을 꺼냈다. 핑크공주가 인쇄된 플라스틱 필통이었는데 옆에 있는 작은 플라스틱 버튼을 누르자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가지런히 깎인 연필 세 자루와 2센티 남짓의 소형 연필 깎기 그리고 어째선지 귀이개가 들어 있었다. 맨 위에 있는 넓은 공간은 지우개를 위한 곳이었는데 그곳만이 텅 빈 채였다.
나는 손에 들고 있는 토끼 모양 지우개(한 번도 안 썼는지 닳은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를 그곳에 내려놓았다.
윤미는 가끔 졸음이 오거나 선생님 말씀이 지겨울 것 같으면 토끼 지우개를 꺼내 안 그러는 척 하며 자기 코에 대고는 했다. 나는 그런 윤미의 행동을 모른 척 지켜보곤 했는데 몇 초간 맡고는 다시 얼른 핑크공주필통에 넣어 두는 식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나도 만져볼 기회가 있었는데 슬쩍 맡아 보니 은은한 멜론 향이 났다.
친척 언니가 일본에서 사다줬어.
뭘?
이거!
앞으로 내민 윤미의 손에 토끼 지우개가 들려 있었다. 묻지도 않은 말을 하는 걸 봐서 그 지우개를 정말 아끼는 모양이었다.
둘째 수업이 끝나고 가지고 있던 지우개(점보 지우개를 포함해서) 4개를 정헌이에게 몽땅 잃어버린 나는 이성을 잃고 윤미의 토끼 지우개에 손을 댔다. 그러나 애초에 그런 인형 같은 지우개로 슈퍼점보지우개를 당해낼 리 없었다. 윤미는 국어 시간 내내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필통이며 서랍, 바닥까지 싹 다 훑었지만 정헌이 신발주머니에 들어간 그것이 나올 리는 없었다.
체육 시간이 끝났고 아이들은 부산스럽게 교실로 돌아왔다. 곧바로 점심시간이 이어지는 통에 애들은 먼지를 잔뜩 묻힌 채로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 통을 꺼냈다. 윤미는 여전히 풀이 죽은 채로 자리에 앉아 밥을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윤미야! 밥 안 먹어?
같이 점심을 먹는 3총사 막내 은주가 윤미를 찾아왔다.
응 갈게...
윤미는 도시락 통을 집어 들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한 번 필통을 꺼내 그 안을 살폈다.
어머!! 어떻게 된 거지?
깜짝 놀란 윤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있다가 하늘을 날아갈 듯이 소리를 질렀다.
뭐야? 왜 그래?
은주랑 희주가 얼른 달려왔고 윤미는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 내 토끼공주...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이거 사촌언니가 일본에서 사다준 건데.. 정말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거든.
나는 도시락 통을 들고 자리를 옮기기 전 윤미를 보며 말했다.
야, 지우개가 발 달렸나? 앞으로 잃어버리지 말고 잘 보관해.
윤미는 웃을 때 왼쪽에만 보조개가 들었고 머리에는 보라색 땡땡이 무늬가 들어간 머리띠를 하고 다녔다. 4학년 2학기 말 때쯤 윤미는 전학을 갔다. 아마 서울이었던 것 같다. 그 뒤로 다시 볼 수는 없었지만(아이러브 스쿨이 한창 유행할 때도 윤미 소식을 아는 애들은 아무도 없었다) 가끔 지우개를 보면 그 아이가 생각난다.
윤미는 참 예뻤고 무엇보다 자주 졸던 내가 선생님께 혼나지 않도록 잘 깨워주던 친구였다.
팬시점을 지날 때 마다 생각이 나는 아이, 그리고 토끼 지우개.
오늘 하루도 그것을 추억하며 말한다. 그걸로 족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