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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뚜두 May 27. 2022

하루에 기분 좋은 추억 하나

필통 속 달랑이

달팽이는 색이 바랜 커다란 고추장 단지 표면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애들 엄지 손톱만한 명주달팽이는 우선 껍데기 밖으로 나온 몸을 길게 늘였다가 앞으로 당긴 다음 작디작은 더듬이를 허공에 대고 허우적댔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지만 자기 나름은 냄새도 맡고 바람도 가늠하고 초음파?(ㅋㅋ)도 쏘며 방향을 잡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비에 젖어 미끄러울 텐데도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잘도 기어가는 달팽이가 신기했고 또 귀여웠다. 몸을 보호하고 있는 패각의 바탕색은 연노란 겨자색이었는데 세로로 굵게 두 줄이 그어져 있고 군데군데 검은 점이 박혀 있었다. 살짝 손을 들어 그 패각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생각보다 미끄러운 건 덜하고 딱딱하긴 했지만 단단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렇게 연약한 껍데기로 몸을 보호한단 말야? 

어린 내게도 달팽이의 갑옷은 너무 아쉽게 느껴졌다. 

그렇게 조심스레 쓰다듬고 있는데 달팽이도 내 손길을 느꼈는지 더듬이를 휘저으며 사람으로 치면 누가 자길 부르는지 궁금한 듯 뒤돌아보며 몸을 꿈틀거렸다. 

앗 미안!     

초등학교 2학년 땐 마당 있는 집에 살았는데 흔히 말하는 양옥이 아니어서 비만 오면 바닥이 진창으로 변하는 그런 오래된 구옥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가 온 날에는 신발에 진흙이 들러붙지 않도록 상체를 바짝 수축한 채 종종 걸음으로 지나치곤 했고 다들 짜증난다는 듯 한 마디씩 던지고 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어린 내겐 그러한 환경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신발이 걱정이었다면 장화를 신으면 됐고 좁은 공간 탓에 여기저기 부딪히는 우산이 짜증이라면 우비를 입으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나는 비가 그칠 무렵이면 언제고 우비를 입고 마당으로 나가 장독대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사실 마당이랄 건 없었는데 큰 장독대 몇 개 놓을 자리 그리고 그 앞의 두 평이 채 될까말까한 텃밭이 전부인 공간이었다. 그곳에 쭈그리고 앉아 기다리고 있으면 얼마 안 있어 달팽이들이 기어 나오곤 했다. 

나는 달팽이의 심기를 살피면서도 그 부드러우면서도 떨리는 느낌(조금은 징그러웠다)을 놓치고 싶지 않아 움직임을 멈추고 손을 가만히 대고 있었다. 그러자 달팽이는 뭔가가 해결되었다고 느꼈는지 다시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기어올랐을까? 달팽이는 장독 뚜껑 부근(살짝 깨져 홈이 파져 있었다)에 이르러 허둥대기 시작했다. 왜 하필 그쪽으로 갔는지, 아니 왜 굳이 고추장 단지를 기어올랐는지 모르겠지만 달팽이가 그렇게 허우적댈 때 엄마가 밖으로 나왔다. 한 손에는 커다란 사기그릇과 나무 주걱을 들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아니 그냥... 

그냥 뭐 하러 거기 있어. 단지 깨지면 어쩌려고. 비가 와서 바닥 미끄러운데. 

엄마는 정확히 고추장 단지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아 어떡하지? 

나는 얼른 손을 뻗어 달팽이를 집었다. 패각을 잡고 있었지만 몸부림치는 달팽이의 힘이 느껴졌다. 

그날 저녁, 오랜만에 등장한 불고기 반찬에 상추와 깻잎 고추가 상에 올라왔고 나는 상추 두 장을 챙겨 둔 다음 다시 한 번 씻어 안 쓰던 철제 필통 바닥에 깔았다. 

나는 수업 시간에 몰래 필통을 열고 달랑이(내가 붙여 준 이름이었다)가 뭐하나 구경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짝꿍 윤미도 슬쩍 곁눈질하며 웃곤 했다. 

어디서 잡았어? 

마당에서. 달랑이야

달랑이? 

응. 얘 이름. 

웃기다 

그치?    

이틀인가 지나서 나는 달랑이를 학교 정원 어딘가에 놓아주었다. 사람 손길이 닿지 않는 축축하고 고요한 곳을 골라... 


달팽이 때문에 사람이 죽고 살진 않는다. 행운을 가져다주지도 않고 달팽이로 인해 인생 바뀔 일도 없다. 하지만 30년이 훌쩍 지난 후에도 생각나는, 그런 존재는 흔치 않다. 

아무리 가깝게 지낸 사람이라도 10년만 지나면 흐릿해지기 마련이다.

비가 올 때마다, 많든 적든 달랑이 생각을 한다. 초록 상추 위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더듬이를 휘젓던 아이. 

비릿한 냄새와 어딘가 시골 냄새가 섞여 있던 달랑이. 비가 온 어제 하루. 달랑이를 생각했다. 그렇게 하루를 온전히 달랑이를 추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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