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만원짜리 집이 있으면 전국 어디라도 가겠다." 올해 '경매할 결심'이다. 전국에 경매 바람이 다시 거세지고 있다. 확실히 3-4년 전처럼 입찰할 물건이 늘었다. 처음 경매에 입문하고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때 같다. 대출 이자 부담이 피크를 치고, 부동산 경기가 꽁꽁 얼어붙으면서다. 영원할 것 같던 서울 부동산을 비롯해 전국에 반값 아파트들이 속출하고 있다. 체감 경기 최악을 느끼는 지금부터 올해 하반기, 내년 초가 되면 경매 물건들이 더 많이 쏟아질 것이다. 경매 절차 개시일부터 입찰이 가능한 시점까지 보통 6-7개월 이상 걸리기 때문이다. 적절한 가격까지 2-3회 유찰될 것을 감안하면 1년 이상 훌쩍 넘기는 경우도 예사다. 아직 한 겨울 같은 부동산 시장에서 유독 따뜻한 곳이 있다. 바로 경매 시장이다. 부동산 경기가 침체될수록 경매 물건이 늘고, 더 싸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남쪽 나라 제주도에 봄바람을 넘어 벌써 더위가 찾아온 것처럼, 제주도 경매 현장도 치열했다. '경매의 시간'이 돌아오고 있다.
전국 경매 현장을 누비는 이유는 꼭 수익만이 아니다. 소액경매를 전문으로 하기 때문에 1차적으로는 1천만원대 주거용 부동산 낙찰이 목표다. 조건은 1건당 1천만원 내외 매매 차익이다. 임대 시에는 전세로 투자금 전체를 바로 회수하거나, 월세로 연 20-30%대의 수익률을 거둬 4-5년 안에 원금을 회수하는 것이다. 2차적인 목표는 전국에 한달살기 네트워크 구축이다. 그래서 좀 부족한 1천만원대 집이라도 괜찮다. 비록 지방 시골집 같아도 잠깐 세컨드하우스로 쓰기에는 전혀 문제없기 때문이다. 이미 이렇게 포항, 거제, 서산, 안동, 김천, 진주, 경주 등의 지역에 소형 물건 9채를 경매 낙찰받았다. 앞으로 이런 한달살기용 세컨드하우스를 해외까지 확장할 계획이다. 이런 목표가 생긴 건 지금 숙박업소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꿈이 글로벌 CEO로, 세계 각국에 100개의 자회사를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외 법인 회사는 못 만들망정 작은 집 정도는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해외 경매는 없더라도 임대나 공동 투자 등은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집에서 소규모 그룹을 만들어 같이 해외 한달살기를 하는 것이다. 취향이 맞는 사람들과 여행하면서 공통 관심사에 대한 책도 쓰고, 취미나 직업 생활의 또 다른 의미를 찾는 것이다. 청년 때 꿈을 현실 버전으로 리사이클링한 것이 국내외 한달살기 네트워크 구축이다. 그리고 경매가 그 핵심 수단이 되었다. 이렇게 자기 삶의 목표에 경매를 활용하면 효율적이면서도 오래 투자 활동을 지속하기 좋다.
임장 여행도 그래서 나왔다. 훗날 해외 한달살기 공동 콘텐츠 개발, 최근 계획한 지역 취향 여행 글쓰기 프로젝트의 토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부터 먼저 실천해 보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마인드세트를 바꿔야 했다. 출장, 일상적 관광 등을 여행으로 바꾸는 약간의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무슨 말인가? 집을 떠나면 다 여행 아닌가. 적어도 사전적 의미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진정한 떠남은 장소적 개념에 국한되지 않는다. 집을 떠나도 여전히 과거의 습관과 사고에 머물러 있을 수 있어서다. 결코 익숙한 자신과는 결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여행'하면 '노마드'를 떠올린다. 노마드(유목민)란 정착민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여행을 생존 방식으로 삼고 특정한 가치나 삶의 방식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들이다. 더 나은 삶을 향해 끊임없는 자기 혁신을 실천하는 창조적 부류를 일컫는다. 마지막 직장도 그래서 나왔다. 마냥 안정적이었지만, 더 이상 발전 가능성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후 직업 노마드로, 여행자적인 삶을 살기로 했다.
한때 국제교류 기관에서 일했다. 한 해 몇 번씩 해외출장을 갔다. 공짜 해외여행이 일이니 분명 남 부럽지 않은 직장이었다. 하지만 이때 아무리 멋진 관광지를 가고, 고급진 음식을 먹어도 마냥 신나지만은 않았다. 무사히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올 날만 손꼽아 기다릴 때도 있었다. 여행이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퇴사 후 전국 경매 임장을 다닐 때도 처음에는 좋았다. 꽉 막힌 일상 속에서 모처럼 여행 가는 기분이 들어서다. 하지만 이것도 습관처럼 반복되자 그저 일처럼 되었다. 아무리 새로운 곳을 가도 별 감흥이 없었다. 서둘러 입찰을 끝내고 돌아오기 바빴다. 형식적으로 여행을 하지만 전혀 '여행'이 아닌 경우가 분명 있는 것이다. 직업적 여행자에게도 부러움의 대상이 있었다. 여행 중의 여행은 장거리, 해외여행일 것이다. 국제 기관에서도 이런 여행을 종종 갔지만, 외교관만 할까. 외교관은 여러 나라에서 오랜 기간 직접 살아보며, 일하고 그곳의 문화를 만끽한다. 한번은 외교관 출신 상관을 모시고 출장을 간 적 있었다. 그 상관은 평생 직업 외교관으로 여러 나라 대사를 역임하고 퇴직한 분이었다. 그가 꼽은 외교관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바로 '호기심'이었다. 그때는 좀 의외라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도 왕성한 호기심 보였다. 잠에서 막 깬 아이처럼, 사람과 역사 유물, 배경 등 보고 들은 것에 대해 묻고 또 물었다. (물론 그때 옆에 따라다니던 통역사(=나)는 좀 힘들었다.) 이처럼 감각적으로 여행과 비여행을 구분하는 잣대가 있다. 바로 주변과 자신에 대해 '깨어있음'과 '무감각해짐'이다.
깨어있는 여행을 위해 한 가지 방법을 고안했다. 한 편의 글이 될만한 여행을 하는 것이다. 그럼 좀 더 내용적으로 특별한 여정을 짜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형식적으로는, 주변을 관찰하며 기록하고 매 순간 만물이 자신에게 속삭이는 의미를 찾기 위해 귀를 기울이게 된다.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여행 전후 깨어있는 시간이 자연히 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 몇 가지 '관전 포인트'를 정했다.
1) 제주도 해변가에서 지는 노을 보기- 언제부터인가 지는 노을이 그렇게 예쁘다. 자신을 닮아서일까. 건물 사이사이로 수줍게 떨어지면서도 은은한 노란빛으로 온 세상을 물들이는 노을. 그 따스한 색감에 반했을까. 먼 바닷가에서 직설적으로 내려앉는 모습은 어떨까. 사뭇 궁금해졌다.
2) 걷기 좋은 도서관 탐방- 자신의 일상을 지배하는 2가지 주요 키워드가 바로 '걷기'와 '도서관'이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도서관 주변 길을 걸으며 일하는 동시에 쉬는 것이 취미가 됐다. 지금은 그것을 또 하나의 콘텐츠로 만들어 보고자 한다.
3) 게스트하우스 체험 등- 게스트하우스 운영자답게 숙박 여행시 빠지지 않는 코스다. 덕분에 게스트하우스 여행자 지수 같은 것도 만들어 보았다. (전 세계 물가를 비교하는 맥도날드 가격지수처럼, 전국 여행지 게스트하우스 수와 요금 등으로 얼마나 핫한 여행지인가를 가늠해 보는 자신만의 척도다.)
이렇게 시나리오를 쓰자 기분이 조금 달라졌다. "갈까 말까. 경매하러 거기까지 가야 돼?" 하는 마음이 "한번 가보지 뭐. 재밌겠다." 약간의 설렘으로 부풀었다. 일정 코스와 할 일 등은 자신의 여행 성격을 고려하는 것이 좋다. 동선, 취향, 일 등 평소 자신만의 관심사나 글쓰기 주제 등을 반영하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임장 여행이라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았다. 장거리 임장의 특성상 당일 임장(입찰할 집을 현장에 직접 가서 보는 것)과 다음 날 경매 법정 입찰까지 함께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임장지와 법정이 같은 도시 내에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른 작은 도시의 경우 임장지와 달리 경매 법정은 몇 시간 더 가야 되는 곳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주도 임장을 마치고 돌아가는 시간에 노을을 보기로 했다. 그때가 마침 저녁이고 부근에 꽤 이름난 협재 해수욕장이 있어서다. 도서관은 경매 법정 일정을 마치고 들르기로 했다. 하필 경매 다음날이 휴일이라 항공편을 못 구해 1박을 더 머무르는 바람에 시간이 좀 남았다.
협재 해수욕장 노을 보기는 행운이었다. 공항에서 버스로 1시간 남짓 달려 임장지 부근에 도착했다. 여기서도 한 20여분 걸었는데 왕복 2차선 도로에 보행로가 거의 없었다. 생생 달리는 차들 속에서 위협을 느꼈다. 실제 도로에 죽어 널브러져 있던 작은 들짐승도 그새 2마리나 봤다. 임장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마침 협재 해수욕장으로 가는 샛길이 있었다. 이 길은 주로 보행자용이었고, 양 옆으로 별장촌 같은 것이 쭉 펼쳐져 있었다. 여기서 진짜 제주도의 전원생활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그려볼 수 있었다. 콧노래와 함께 한적한 시골 정취를 느끼며 모처럼 여유롭게 걸었다. '여행'을 선택했기에 받을 수 있었던 선물이랄까. 길 저편 구름 사이로 해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저녁 5시 반, 거의 일몰 시간이 다 된 것이다. 발걸음을 재촉해 협재 해수욕장에 다달았다. 비시즌이고 작은 해수욕장이지만 주차장 앞쪽부터 여행객들이 꽤나 북적였다. 바닷가를 거닐고 포토존에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의 관심은 한 가지, 일몰이었다. 입구부터 노을 풍경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눈을 돌렸다. 바닷가를 서서히 물들이던 노을은 백사장 왼쪽 끝에서부터 뻗어 나오고 있었다. 노을의 근원을 향하자 눈이 부셨다. "아, 노을도 이렇게 강렬할 수 있구나."
"벌써부터 사라질 결심만 키울 것이 아니라 좀 더 뜨거워도 괜찮겠다." 평소 생각했던 그 노을과는 분명 달랐다. 노을 앞에서 나이, 세월 탓하던 자신이 한없이 작게 보였다. 비록 한 점 빨간빛이 되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지언정, 캄캄해지는 세상 속을 끝까지 붉게 물들이던 그 모습이 정녕 아름답지 않았던가. 마지막을 아끼지 않고 뜨거운 손을 뻗어 차창 속 한 여행자를 배웅해주던 그 해는, 다음날 또 다른 찬란한 모습으로 다시 떠올랐다. 그 덕분이었을까. 아침에 입찰을 위해 게스트하우스를 나서며 생각했다. "보통 때는 경매 임장에 여행은 덤이었겠지만 이미 여행자에게 경매 낙찰은 덤이 되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