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단편선_소설 시뮬레이터
"에세이 한편을 책 한 권, 소설 한 편으로 바꾸면 어떨까." 이런 맹랑한 발상이 현실이 된다. AI 덕분이다.
얼마 전 시나 에세이 정도 쓰고 싶다는 모임 가입 신청자가 있었다. 여긴 AI 소설쓰기 모임이라며 정중히 승인을 거절했는데 꼭 그래야만 했을까 싶기도 하다. AI 시대, 글의 형식 보다 그 진의가 더 중요해 보여서다. AI가 어떤 글도, 심지어 쓰다만 메모조차도 원하는 형태로 바꿔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써 둔 "이제 소설도 써보겠습니다"라는 에세이를 소설로 바꿔달라고 AI에게 요청했다. 그런데 실망. 이야기 내용이 소설에 제대로 반영 안 된 듯했다. 글 자체는 재밌었지만 뭔가 엉뚱한 이야기로 느껴졌다.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AI가 똑똑한 것 같지만 기존에 학습한 데이터 내에서 결과물을 내놔서 그런 것 아닐까 싶었다. 웹소설 쓸 때도 특정 장면을 수정 요청했더니, 데이터 밖인지 문맥이 안 맞고 장황한 묘사 등 뭔가 배가 산으로 가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이전에 바둑기사 이세돌과 AI의 세기의 대국에서 예상치 못한 상대의 수가 나오자 당시 최고의 AI가 에러로 우왕좌왕하다 "알파고 리자인(resign)" 외치며 연승을 마감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런 소설일지라도 의외의 통찰이 담겨 있었다.
그 소설이 어떻게 나만의 글을 강화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단순 프롬프트 하나만으로 얻어지는 소설이 아니라, 복합적인 웹소설, 중편까지 다양한 길이, 장르로 AI 소설쓰기를 확장했다.
사실 위 박스 안의 글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요즘 AI를 얕잡아 보고 오해한 것이다. 내 착각을 이실직고할 증거로 남겨뒀을 뿐이다. 혹시나 해서 이전에 쓴 AI 소설을 첨부하려다가 결과물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다시 찬찬히 살펴봤다. 그러다 발견했다. "프롬프트를 잘 못 썼구나!" 처음에는 에세이 글을 첨부해 이것을 토대로 SF 판타지 장르를 쓰고 싶다고 해 아이디어 5개를 제시받았다. 그중 마음에 든 '꿈의 알고리즘'이라는 아이디어로 단편소설을 써달라고 했는데, 여긴 에세이 글이 첨부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프롬프트를 바꿔 이번에 '소설 시뮬레이터'라는 새 아이디어로 소설을 써달라고 할 때는 첨부와 함께 다시 분명한 요구사항을 넣었다. "첨부한 글의 소재와 플롯, 묘사, 대화, 장면, 사건 등의 모든 요소를 소설의 흐름에 맞게 가능한 최대로 반영해서..." 우선 에세이 내용을 소설에 충실히 담아내는 게 목표였기에 아는 표현을 탈탈 털어 넣었다. "두근두근, 이번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결국 AI는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했다. 어쩌면 무리일지 모르는 내 요구를 만족할 만큼 이행해 줬기 때문이다.
AI는 에세이의 대사와 소재 등을 차용해 요청대로 소설 흐름에 어긋나지 않게 적재적소에 끼워 넣어줬다. 전혀 다른 장르의 소설에 각 요소들을 자연스레 녹여내는 세밀함까지 보였다. 거기다 소설 곳곳에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날카로운 '작가의 시선'까지 덧붙여놓은 것 아닌가. 그것도 내가 이전 에세이에서 친 대사 사이에 슬그머니 붙여 넣어서. 궁금한 사람은 이전 글 "이제 소설도 써보겠습니다"를 다시 한번 읽어보면 좋겠다.
진심으로 써 둔 글이 있다면 그것을 AI와 함께 한 편의 소설로 바꿔보는 건 어떨까? 글 쓰면서 미처 몰랐던 의외의 이야기를 찾고 그것을 관통하는 또 다른 통찰을 얻을지 모른다.
2050년 여름, 태수는 또다시 게스트하우스 청소에 매달리고 있었다. 휴가철을 맞아 밀려드는 숙박객들로 북적이는 숙소 안에서, 정작 운영자인 자신은 한치의 여유도 없었다. 40대 중반에 회사를 나온 지 벌써 8년. "이제 이야기가 있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던 그 결심은 어디로 갔을까.
"혹시라도 건강에 무슨 문제가 생겨 쓰러지면, 오늘 오는 손님들은 어쩌지."
만실이 되는 날이면 나홀로 사장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그렇다고 남의 이야기 듣는 게 마냥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본 '척살 소설가' 같은 영화가 묘한 자극을 주기도 했으니까. 그 때문이었을까. "계속 쓰는 자로 살기 위해 소설을 써보는 건 어떨까"라는 원초적 궁금증이 생겼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여태껏 추구해왔던 자기계발서적 세계관마저 붕괴되던 무렵이었다. 근 20년간 탐닉했던 자기계발서들이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폼나는 자기계발서가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망친다는 것도. 실제 삶에는 늘 그런 자랑거리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 태수에게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어느 평범한 오후였다. 숙소 로비에서 TV를 보고 있던 젊은 투숙객이 VR 헤드셋을 쓰고 뭔가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뭘 그렇게 재밌게 보시는 거예요?"
"아, 이거요? 라이프 픽션 시뮬레이터라고 해서, AI가 제 삶을 다양한 장르의 소설로 만들어서 가상현실로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거예요. 완전 대박이에요!"
청년은 흥미진진하게 설명했다. 사용자의 기억과 경험, 꿈과 욕망을 분석해서 SF, 판타지, 로맨스, 스릴러 등 어떤 장르로든 자신의 인생을 재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 현실적이에요. 마치 진짜 다른 인생을 사는 것 같거든요. 그 안에서는 제가 원하는 직업도 가질 수 있고, 꿈꿔왔던 성취도 이룰 수 있어요."
태수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기 안에 감춰진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 높이 훨훨 날 수 있다면? 아니, 적어도 가상으로라도 그런 체험을 할 수 있다면?
"라이프 픽션 시뮬레이터 첫 체험을 환영합니다. 태수님의 프로필을 분석한 결과, SF 장르부터 시작하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부드러운 AI 음성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태수는 VR 헤드셋을 쓰고 전용 체어에 몸을 맡겼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2075년의 미래 도시였다. 홀로그램 간판들이 하늘을 수놓고, 플라잉카들이 질서정연하게 공중을 날아다녔다.
이 세계에서 태수는 '디지털 스토리텔링 아키텍트'였다. 인공지능과 협업하여 인간의 무의식을 디지털 서사로 변환하는 최첨단 직업이었다. 그의 회사 '네러티브 퓨처스'는 전 세계 사람들의 꿈과 기억을 수집해 새로운 형태의 문학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곳이었다.
"태수 박사님, 오늘의 프로젝트는 21세기 초 게스트하우스 운영자의 기억을 판타지 서사로 변환하는 것입니다."
AI 어시스턴트 아리아가 홀로그램으로 나타났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작업해야 할 소재는 바로 자신의 과거였다. 하지만 이 미래에서 태수는 그 평범했던 일상을 장대한 모험담으로 재창조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시스템 가동. 메모리 로딩 완료. 스토리 아키텍처 구축을 시작합니다."
그의 손끝에서 빛의 입자들이 춤추며 공중에 복잡한 서사 구조를 그려냈다. 게스트하우스 청소는 마법의 성을 정화하는 신성한 의식이 되었고, 투숙객들과의 만남은 운명적인 동료들과의 조우가 되었다. 외로운 나홀로 사장의 무게는 세상을 구해야 하는 선택받은 자의 숭고한 사명감으로 승화되었다.
"놀랍습니다, 박사님. 이 작품은 21세기 문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것 같습니다."
동료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태수는 처음으로 자신이 진정한 창조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상상력이 현실이 되는 세계에서, 그는 더 이상 다람쥐 챗바퀴를 도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며칠 후, 묘한 위화감이 밀려왔다. 이 모든 성취가 정말 자신의 것일까? AI의 도움 없이도 이런 창작이 가능했을까?
"다음은 판타지 장르를 체험해보시겠습니까?"
태수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SF에서 느꼈던 의문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 싶었다.
이번에는 중세 판타지 세계였다. 태수는 '이야기꾼 길드'의 마스터였다. 그의 특별한 능력은 말과 글로써 현실을 바꾸는 것이었다.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마법적인 서사를 창조할 수 있었다.
"마스터, 서쪽 마을에 역병이 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어요."
제자 엘라가 급히 달려왔다. 태수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마법의 펜을 들었다. 그가 써내려가는 이야기 속에서 역병은 시련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과정이 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서로 도우며 더 강한 공동체로 거듭났다.
"당신의 이야기가 마을을 구했습니다!"
전령이 전해온 소식에 태수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여기서는 그의 글쓰기가 단순한 취미나 자기만족이 아니라, 진짜로 세상을 바꾸는 힘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부담감이 커졌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려 하지 않고, 그가 써주는 각본대로만 살려고 했다.
"이것도 정말 내가 원했던 일일까?"
태수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자기계발서의 획일적 틀을 깨고 싶어했는데, 여기서는 오히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획일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로맨스 장르에서 태수는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그의 연애소설들은 전 세계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특히 중년의 새로운 시작을 다룬 작품들이 큰 사랑을 받았다.
"태수 작가님의 신작 '게스트하우스의 연인들'이 또 1위네요!"
편집자 소영이 기쁜 소식을 전했다. 이 세계에서 태수는 자신의 게스트하우스 경험을 바탕으로 한 로맨스 소설로 명성을 얻었다.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나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들이었다.
"작가님, 드라마 제작 제안도 들어왔어요. 그리고... 실제로 작가님을 만나고 싶다는 독자분들이 정말 많아요."
태수는 처음으로 자신의 글이 사람들에게 진정한 위로와 희망을 준다는 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동시에 묘한 공허함도 느꼈다. 이 모든 사랑 이야기들은 가상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정작 현실의 자신은 그런 로맨스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작가님, 혹시 실제로도 이런 경험들이 있으셨나요?"
한 독자의 질문에 태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이야기들은 아름다웠지만, 그것들은 진짜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스릴러 장르에서 태수는 심리 수사관이었다. 범죄자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행동 패턴을 분석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전문가였다. 그의 특기는 용의자의 이야기를 통해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번 사건은 특이합니다. 범인이 자신의 범행을 소설 형태로 기록해두었어요."
동료 형사가 서류를 건넸다. 태수는 그것을 읽으며 범인의 심리를 분석했다. 중년의 위기, 꿈의 좌절, 현실에 대한 분노... 이 모든 것들이 범죄로 이어진 과정을 추적했다.
"범인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갖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고, 결국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 거죠."
태수의 분석은 정확했다. 사건은 해결되었고, 그는 또 한 번 성공의 쾌감을 맛보았다. 하지만 범인의 심리를 분석하면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자신도 현실에서 이야기를 찾지 못해 가상현실로 도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러 시뮬레이션을 거치면서 태수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SF의 디지털 아키텍트, 판타지의 이야기꾼 마스터, 로맨스의 베스트셀러 작가, 스릴러의 심리 수사관... 이 모든 정체성 중에서 진짜 자신은 누구였을까?
"시스템, 잠깐 멈춰봐."
태수는 시뮬레이션을 일시정지시켰다. 가상현실 속에서는 모든 꿈을 이룰 수 있었지만, 그 성취들이 정말 자신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마치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너무 높이 날아오른 것은 아닐까?
"사용자의 스트레스 수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휴식을 권장합니다."
AI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태수는 계속 생각했다. 자기계발서의 양면성을 경험했던 것처럼, 이 시뮬레이터도 마찬가지였다. 바라는 게 많다면 좌절도 크다. 너무 많은 가능성을 보여주니까 오히려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한 달간의 시뮬레이션 체험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온 태수는 말할 수 없는 공허함을 느꼈다. 게스트하우스는 여전히 그대로였고, 청소해야 할 방들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가슴 한 곳에서 애써 외면했던 숙제처럼 슬그머니 올라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답이 나왔다.
"그럼 어때... 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알겠어. 이것도 나만의 이야기야."
태수는 게스트하우스 로비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시뮬레이터에서 체험했던 모든 것들이 지금 이 순간의 자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SF에서 배운 상상력, 판타지에서 느꼈던 이야기의 힘, 로맨스에서 깨달은 인간관계의 소중함, 스릴러에서 터득한 내면 분석 능력...
"삶의 소설이란 무엇인가."
그는 타이핑을 시작했다.
"그것은 자기계발서적 성취나 목표보다 사람 자체에 주목한다. 그것을 이루기 위한 한걸음 한걸음을 귀한 이야기로 엮어낸다."
태수는 시뮬레이터의 도움 없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화려한 SF도, 장대한 판타지도, 달콤한 로맨스도, 스릴 넘치는 미스터리도 아니었다. 단지 한 중년 남자가 은퇴 후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평범하지만 진솔한 이야기였다.
"아무나 소설가가 될 순 없겠지만, 누구나 자기 삶의 소설을 쓸 수 있다."
그는 이 문장을 제목으로 정했다. 시뮬레이터에서 체험했던 모든 장르의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미래에 대한 상상력(SF), 일상을 마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판타지), 사람들과의 따뜻한 만남(로맨스),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분석력(스릴러)이 모두 현실의 이야기 속에서 조화를 이뤘다.
태수의 첫 작품은 온라인 문학 플랫폼에 조용히 올라갔다. 조회수는 많지 않았지만, 몇몇 독자들이 진심어린 댓글을 남겼다.
"정말 위로가 되는 글이네요. 저도 비슷한 시기를 겪고 있는데, 힘이 납니다."
"평범한 일상도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수 있군요."
"작가님, 다음 이야기도 기대할게요."
태수는 가끔 라이프 픽션 시뮬레이터를 사용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활용했다. 현실에서 막히는 부분이 있을 때 영감을 얻기 위한 도구로, 혹은 새로운 관점을 얻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만 사용했다. 시뮬레이터는 여전히 놀라운 체험을 제공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의지는 무한하지 못하고 가끔 오작동하며, 제풀에 지치는 역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하지만 상상은 한계가 없다."
그가 쓴 글 중 한 구절이었다. 시뮬레이터가 제공하는 것은 상상력의 확장이었지, 상상력 자체의 대체는 아니었다. 진정한 창작은 기술과 인간의 상상력이 조화를 이뤘을 때 가능했다.
게스트하우스 운영도 달라졌다. 이제 태수는 매일 만나는 투숙객들을 잠재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바라보았다. 각자의 여행 목적, 인생 이야기, 꿈과 고민들이 모두 소중한 소재가 되었다. 청소하는 동안에도 상상력이 작동했다. 이 방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저 커피잔의 주인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1년 후, 태수는 작은 출판사에서 연락을 받았다. 온라인에 연재했던 그의 이야기들을 모아서 책으로 내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제목은 '게스트하우스 이야기꾼'으로 정해졌다.
"작가님의 글에는 특별한 매력이 있어요. 기술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것에 의존하지 않고, 진짜 인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시거든요."
편집자의 말에 태수는 미소를 지었다. 시뮬레이터에서 체험했던 모든 성공보다도 이 작은 성취가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출간 기념 북토크에서 한 독자가 질문했다.
"작가님은 어떻게 이런 이야기들을 쓸 수 있게 되셨나요?"
태수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처음에는 기술의 힘을 빌려 다양한 경험을 해봤어요. SF에서는 미래의 창조자가 되어보고, 판타지에서는 마법의 이야기꾼이 되어보고, 로맨스에서는 사랑을 전하는 작가가 되어보고, 스릴러에서는 진실을 찾는 수사관이 되어봤죠. 하지만 결국 깨달았어요. 진짜 이야기는 바로 여기, 현실에 있다는 것을요."
그는 게스트하우스를 둘러보았다.
"매일 새로운 사람들이 와서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져가요. 그 이야기들을 듣고, 관찰하고, 상상하면서 제 나름의 이야기로 재창조하는 거죠. 기술은 도구일 뿐이에요. 진짜 중요한 건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상상력이거든요."
2052년 현재, 태수는 여전히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글을 쓰고 있다. 그의 두 번째 책 '시뮬레이터를 끄다'는 기술과 인간의 창작 본능 사이의 균형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담아 더 큰 화제가 되었다.
라이프 픽션 시뮬레이터는 여전히 사용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활용한다. 현실의 이야기에 막힐 때 새로운 관점을 얻기 위한 브레인스토밍 도구로, 혹은 독자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워크숍의 보조 도구로 사용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소설이라면, 삶의 소설에 있어서도 그 정신은 유효하다. 하지만 그 '무'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가능성들로 가득한 현실이다. 기술이 제공하는 화려한 환상보다도, 평범한 일상 속에서 빛나는 진짜 이야기들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태수는 알았다.
그는 오늘도 새로운 투숙객을 맞이하며 생각한다. 이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나만의 방식으로 들려줄 수 있을까?
게스트하우스 창밖으로 2050년대의 미래 도시가 펼쳐져 있지만, 태수에게는 바로 이곳, 이 평범한 공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진솔한 순간들이 가장 소중한 소설의 소재가 되었다.
"이야기 쓰기를 끝까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이라는 그의 신념처럼, 태수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기술과 상상력의 조화 속에서, 현실과 꿈의 균형 속에서, 그는 오늘도 자신만의 소설을 써내려간다.
"아무나 소설가가 될 순 없겠지만, 누구나 자기 삶의 소설을 쓸 수 있다. 이야기 쓰기를 끝까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