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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랑 Nov 08. 2020

쓸데없이 진지한 상상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보건교사 안은영'을 읽고, 보고

엊그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젤리 같은 에로 에로 에너지를 볼 수 있는 보건교사가 주인공인 소설을 읽었다. 처음 한 번 읽어도 너무 좋아서, 한 번 더 읽어보았다. 넷플릭스에 영상화되었단 소식을 이미 알고 있었고 어떤 배우가 주인공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을 이미지화하여 상상하기 쉬웠다.       

하지만 남자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소설을 후반부까지 읽은 후에야 알게 되었고,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너무 달라서 깜짝 놀랐다.      


‘분명 소설 속 남주인공은.. 좀 나이 많은 사람 아닌가? 사십대라고 읽었는데..’    

 

재미있기도 했고, 드라마를 보기 전 복습 차원에서 한 번 더 읽으며 급하게 읽느라 잘못 읽었던 부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자 주인공이 사십대라고 상상했던 이유는 ‘미혼’이라는 글자를 ‘마흔’이라고 읽었기 때문이었다. 맙소사. 점 하나에 님이 남이 된다더니.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고 한글을 찬찬히 잘 읽어봐야 한다.      


이 소설의 거의 모든 에피소드가 좋았지만 역시 가장 좋은 부분은 마지막 에피소드였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큰 위기를 극복해나가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부분. 연애소설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던 초중반의 흐름과는 다르게 이제까지 살짝만 보여줬던 두 주인공의 관계에 큰 파도가 치는 것처럼 돌직구를 던지는 남자 주인공의 맨트를 읽는 순간 “꺄아아”라며 소리를 치며 책을 내려놓고 다리를 동동 거렸다. 마치 드라마 속 연인이 첫키스를 나누는 장면을 볼 때 느껴지는 간질간질함에 입꼬리는 귀밑까지 승천한 채로 내려올 줄 몰랐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어떤 능력 일가. 아니, 만약에 그런 능력이 생긴다면 어떤 것을 볼 수 있어야 할까?      


소설 속 주인공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무의식 에너지와 귀신, 원혼, 쌓인 감정으로 만들어내는 잡념의 덩어리를 본다. 그리고 남들이 보기엔 장난감인 비비탄 총과 플라스틱 검으로 그 에너지와 싸운다. 본인은 진지하지만, 보는 사람에겐 이상하게만 느껴지는 다른 세계.      


정말 뜬금없지만 예전에 나도 상상해본 적이 있다. 만약에 사람들의 방구가 보인다면 어떨까?           



엉덩이에 물방울처럼 방구를 달고 다니는 거다. 그러다 냄새가 사라지면서 퐁 하고 방구 방울도 사라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작은 방울 두세 개를 달고 다니겠지. 그 사람의 방구소리는 아마 “뽕 뽀뽀 뽕” 이렇게 귀여울 것이다. 아주 큼직한 방구를 달고 다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언제 터질지 몰라서 아슬아슬하게 방구 방울의 표면이 투명하고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긴장감이 느껴지는 방구방울을 달고 다니는 사람은 중년의 아저씨일까, 아니면 아리따운 아가씨일까. 아마 체면을 생각해 방구를 참느라고 아슬아슬하게 커지는 것일 테니, 아가씨의 방구일 것 같다.      



 아! 방구냄새는 터진 후의 안개 자국 같은 것이면 좋겠다. 내 방구는 어떤 색일까? 아마 색깔과 모양, 크기로 사람의 장 건강을 확인할 수 있겠지. 각자의 건강을 체크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될 수도 있다. 건강검진에 이런 항목이 생기는 거 아닐까?     


「평소에 달고 다니는 방방의 색은 어떤 색입니까?」   

 

방구 방울이라고 하면 너무 솔직한 표현이니, 줄임말로 ‘방방’. 그러면 솔직하게 색깔, 방울의 크기, 하루에 생산(?)해내는 방울의 개수까지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건강 정보는 중요한 개인정보인데.. 이렇게 방구 방울을 달고 다녀도 될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인공지능(AI)과 함께 살아가는 시대이다.  인공지능은 이제 멈춰있지 않고 지속적인 학습(딥러닝)을 통해 더 똑똑해지고 진보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데이터'는 아주 중요한 딥러닝의 자원이된다.  아마 사람들의 방구방울은 빅데이터를 이용하여 딥러닝을 하는 AI에게 아주 중요한 데이터가 된다. 성별, 연령별로 방구 색과 크기, 방구 방울 개수, 모양, 그리고 남겨진 방구방울의 안개까지 분석해서 ‘한국인의 표준 000’이런 식으로 고급 정보로 탄생하게 된다면, 이 통계자료는 어떻게 쓰일까. 어떤 마음을 갖고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서 큰 경제적 이득과 연결될 수도, 대중의 복지를 위해서 이용될 수도 있다.      


빅데이터, 딥러닝.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언젠가 우리 각자의 정보에 대해, 데이터가 어떻게 이용되는지 확인해보고 데이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지켜나가야 한다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방구방울 단순한 녀석이 아니었어!     



아니, 생각해보면 오로지 ‘나’만 볼 수 있는 능력이잖아. 나만 사람들의 방구 방울을 볼 수 있다는 건데 그걸로 뭘 하지. 난 인공지능이 아니기 때문에 방구방울로 통계 자료를 만들거나 유의미한 데이터를 만들 수 없다.      

우선.. 엄청 웃기겠다. 하루 종일 웃을 것 같다. 분명 방구방울과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 존재하겠지. 회의를 하는데 진지한 상사의 표정과는 달리 자꾸만 방구 방울이 다섯 개, 여섯 개씩 생겨나면 어쩌지? 그땐 멋지게 이야기해야지.      


“잠시 쉬었다 할까요? 화장실 다녀올 사람은 다녀오도록 하지요.”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모든 사람의 방귀 방울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나만 볼 수 있다는 것. 외로울 것 같다. 도망치고 싶을 거야. 온 세상이 갈색에 냄새나는 방울로만 가득하다면 미세먼지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 아닐까. 답답하고, 숨쉬기 위해서 도망치는 삶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래, 소설 속 보건교사도 사회생활이 힘들었다. 보이는 것을 외면하는 것도 남들과 다른 세계에 있다는 것도 결코 평범하진 않겠다. 많이 외로울 것 같다. 게다가 귀신은 물리치기라도 하지, 방구방울은 봐서 뭐해. 온 세상이 갈색으로만 보이고, 냄새나고.. 좋은 능력은 아니군.      


그런 능력 안 가질 거다.      


이렇게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꽹과리, 징까지 다 쳐보는 상상은 나름 재미있다. 혼자서 히죽거리며 꽤나 집요하게, 구체적으로 하지만 아무런 맥락이 없는 이런 상상이 끝나자 어리둥절하다. 이제까지 뭐했지. 하지만 계속 피식 웃음이 나오는 걸 보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빛의 속도로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창의력이라고 말해야 할까. 그래, 나도 소설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알고 있다. 이것은 나의 창의력도 소설가가 될 자질도 아니다. 문학의 힘이다. 한 사람이 평상시에 전혀 겪어보지 않았던 입장을 겪어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몰입하게 한다. 그 덕에 우리는 잠시 쉴 수 있고 웃을 수 있다. 또 소설은 아줌마를 십대 소녀처럼 두근거리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마력이 숨어있기도 하다.


쓸데없지만 쓸게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소설도, 내 상상도. 책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소설을 많이 읽어야 한다. 좋은 소설이었다. 작가님 감사합니다.



*실제 방구방울을 보는 사람의 제보를 듣습니다. 힘들진 않으신가요? 제가 상상한 것과 다른 좋은 점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연락 주시면 한 번 더 글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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