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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과 앤 Dec 11. 2024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들에게 보내는 뒤늦은 찬사



눈물이 났다.
그가 쏟아내는 음악이 너무 뜨거워서
내 안에 담긴 것이 너무 작고 초라하게 느껴져서
눈물이 났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장면이었다. 1화 초반 그렁그렁한 눈으로 동경하는 무대를 지켜보는 송아의 간절한 눈빛과 내레이션. 그리고 장엄하게 깔리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 전후맥락을 모른 채 봐도 빠져들 이유는 충분했다. 나중에 알았다. 그것이 내 결핍과 닿아 있어 그토록 강렬했다는 걸. 주인공 채송아에게 느낀 연민 같고 응원 같은 그 마음이 실제로는 스스로에게 주고 싶던 마음이었다는 걸. 책도 그렇지만 드라마도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결국 보는 사람의 것이 되고 만다. 그렇게 내 것이 된 이 드라마는 잔잔하게 오랜 여운을 남겨 지금도 그 시즌이 돌아오면 다시 찾아보게 만든다. 때로 한 편의 드라마는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건조한 일상에 불쑥 자동 재생되는 촉촉한 감성 버튼이 되기도 한다.

  

 4년 전 끝여름이었다. 아침, 저녁 선들선들 불어오던 가을바람처럼 이 드라마가 불어왔다. 하루치 육아를 마치고 물에 젖은 솜처럼 축축 쳐지는 몸을 널브러지듯 소파에 뉘어 뒤척이 그때, 자세를 고쳐 앉게 만든  첫 장면. 그것은 현실이라는 벽을 마주한 사람이 보이는 슬픈 뒷모습이었고, 담담히 받아들이고 묵묵히 살아가던 어떤 이의 감춰진 마음이 건드려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재능은 없지만 꿈꾸는 능력 하나로 온갖 멸시와 굴욕을 버티며 사랑하는 바이올린 하나만 보고 꿋꿋이 견뎌내고 있는 여자, 채송아. 경영대에 다니는 중 무려 4수를 해 늦깎이 음대생이 된 가냘파 보이지만 뚝심만큼은 아름드리나무 못지않던 그녀. 그러나 서른을 목전에 둔 마지막 학기는 부담스러웠고, 차가운 현실은 그녀의 뚝심을 다시 한번 궁지로 몰아세운다. 꿈과 현실 사이 고민에 빠진 송아에게 어느 날 한 남자가 들어온다. 타고난 재능이 꿈에 닿아 성공했지만 그 재능을 팔아 현실을 메꾸느라 유일한 위안이고 꿈이었던 피아노조차 맘 편히 치지 못하게 된 남자, 박준영. 겉으로 보이는 사회적 차이만큼이나 재능이라는 이 달란트 유무가 대비를 이루며 한 사람에게는 간절한 축복으로 또 한 사람에게는 물리고 싶은 저주되는 다소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고 그 속에 두 사람의 성장과 사랑이 녹아든다. 무엇보다 흔하디 흔한 남녀의 사랑 얘기임에도 자극적인 장면 없이 진중했클래식을 접목해 차분한 시선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의 매력이었다. 연출을 맡았던 감독의 말처럼 아픔이 있지만 묵묵히 참고 견디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다정한 위로라 느껴졌고 그걸 느낀 누군가의 가슴에는 여전히 재생되는 인생 드라마로 남은 것이다. 


 종방 후에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계속 곱씹는 스스로가 당황스럽기도 했다. 갱년기가 오려고 별것도 아닌 것에 감정이 요동치는구나 싶었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방황하고 흔들렸던 그 시절이 생각나 아련하게 싸해지도 했다. 말이 쉬워 4수지 다른 과도 아닌 음대를 가족들마저 응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본인의 의지만으로 해내고 있는 송아가 참 기특하고 대단해 자꾸 마음이 갔다. 그러지 못하고 끝내 현실과 타협한 못난 사람의 짠내 나는 응원 같은 마음이었을까. 비록 현실에 항복할지언정 쉽게 물러서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장렬한 그 결기. 강단 있게 밀어붙이는 그녀가 용기 내지 못했던 스물아홉 그때의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래야만 후회도 미련도 없이 별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거치고 맞은 시작이라야  다른 도약도 기대할 수 있것이라고. 이제야 깨달은 느려터진 한 사람의 사무치는 현재가 교차했다고나 할까. 미련과 후회를 덕지덕지 묻히고 질척거리는 내게 그녀는 소망과 위로를 건넸다. 그러니 당신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 보라며.



 그럼 준영이는 왜 그렇게 눈에 밟혔을까. 재능이 꽃을 피워 세계를 다니며 박수를 받는 이 남자에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꿈을 이룬 대가는 오로지 아버지의 허욕을 채우는 수단에 불과했고 아랫돌 빼 윗돌 괴는 버거운 현실에 발목이 잡혀 짠하고 안쓰럽기 그지없는 인물. 언제나 혼자 꾹꾹 누르기만 하던 준영이 송아에게 버거운 제 현실을 무심히 털어놓는 모습에서 어떤 남자가 떠올랐다. 엷은 미소로 담담히 무거운 얘기를 건네던 남자. 발을 빼도 괜찮으니 마음 쓰지 말라던 짠내 물씬 풍기던 애처로운 남자. 그럼에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그 남자 말이다. 감성도 목소리도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모성애를 자극하는 그 짠함에서 그때 그 오빠가 보였다. 그래서 물었다.


"나는 불쌍한 남자한테 끌리나 봐. 모성애가 넘치는 거야, 구원 서사 덕후인 거야"


"두 개 다. 모성애도 맞고 구원 서사 덕후도 맞고"


"구원해 줘서 고마워"

 

 한 때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던 적도 있다. 그런데 살아보니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발상이었는지 깨닫게 됐다. 한 사람을 향한 구원은 없다. 서로에 집이 되어주기로 한 그 순간부터 이미 둘 모두에게 구원이 시작된 것임을. 세상 어디에도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 살다 보면 내어 주기만 하는 것 같아 손해 보는 기분이 들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내어 주었던 것들이 결국엔 내게로 다 돌아와 나를 지키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는 날이 온다. 그 깨달음 이후 언젠가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내게도 구원이었다고, 그러니 고마운 건 내쪽이라 말한 적이 있다.

 결국 사랑이란, 서로에게 집이 되어 주겠다는 결심 아닐까. 변변한 제  우산 하나 없이 전 세계호텔을 집인양 떠돌며 살던 준영에게 송아는 집 같은 존재였으리라. 머물고 싶고 돌아오고 싶은 행복한 집. 평범하다 못해 흔한 그것으로 이 대단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까 싶지만 우리가 했던 그 격변하고 요동치던 감정 안에 안정감이 빠지는 순간 흔들리고 부서졌던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비유 아닐까. 어쩌면 사랑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 안정감을 추구하고 싶어 만든 인간의 이상향일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 누군가의 집이 되어 살고 있다면 충분히 용감한 것이고, 유토피아 지킴이가 된 것이니 자부심을 가지라 말하고 싶다.  안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이 참으로 고단하다는 것을 왜 모르겠나. 그럼에도 그것을 사랑의 부스러기나 잔재쯤이라 여길 수 있다면 좀 더 서로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사랑을 하며 우리는 자신에 대해 깊이 알게 된다. 이 근원적인 감정 앞에 서면 감춰두었던 내 민낯이 드러난다. 창백한 결핍까지도 말이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사랑은 밀어붙여봐야 결국 파국이고 더 깊은 상처만 남긴다. 극 중 브람스곡 연주를 거부했던 준영이 송아의 졸업 연주를 함께 하고 싶다 말한 것은 그래서 의미가 다. 드디어 준영 삶의 중심에 자신의 행복을 세우겠구나 싶어서 말이다. 그래서 둘이 함께 연주한 브람스 FAE 소나타 스케르초는 마침내 사랑 앞에 성장을 이룬 준영의 시작과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한 바이올린에게 보내는 송아의 마지막 연서가 교차하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사랑은 타이밍인데 남자는 시작을 말하고 여자는 끝을 말하는 연주. 보는 사람을 애달프게 하는 이 드라마적 장치가 향하는 곳은 결국 사랑이었다. 



이 사람을 사랑하면서 받은 상처보다
사랑하면서 받은 위로와 행복이
더 컸다는 것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끊어질 듯 위태롭지만 결국에는 돌고 돌아 다시 너에게로 가 닿는 이 기적 같은 감정. 그러니 인간에게 사랑은 최고의 순간이며 삶에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이상향인 것이다. 처음 그때처럼 음악으로 마음을 건네는 남자와 그것이 자신을 향한 절절한 마음임을 알아채는 여자. 판타지 같지만 이것이 사랑이고 그 판타지를 현실화했다면 당신은 이미 승자인 것이다.(오글거리는 결론이 탐탁지 않다 해도 애써 주장해 본다. 본인은 그리 믿고 살고 있다. 그래야 우리의 현실이 한 발짝쯤은 남향으로 치우치않겠나.)

 

 뜨뜻미지근한 편식의 영역이었던 드라마의 세계를 다시 보게 만든 작품. 클래식을 전공한 작가가 서양음악사에 가장 유명한 러브스토리라는 슈만-클라라-브람스이야기를 기반으로 탄탄하게 풀어냈고 뛰어난 영상과 섬세한 연출,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에 연주 실력까지 더해져 후한 가산점을 주게 되는 드라마이다. 또한 가끔 듣던 클래식을 일상으로 끌어다 놓게 한 OST 마저 훌륭했던 드라마. 그래서 인생 드라마라 자신 있게 말한다. 요즘 이렇게 착하고 잔잔하게 스며드는 드라마, 찾기 힘들다.(자극적인 영상과 스토리로 눈과 귀를 잡아끌지만 금방 휘발되고 마는 드라마는 도처에 깔렸지만 말이다.)

  

 딱 한 장면만 뽑으라 한다면 3화 엔딩을 추천한다. 심쿵할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그 장면. 준영의 송아를 위한 베토벤 월광소나타 + 생일 축하 변주, 그리고 이어진 위로의 포옹. 이걸 보고도 설레지 않는다면 상태가 심각한 것이니 한 장면 더 추가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 회 준영이 슈만-리스트의 헌정을 연주하는 장면. 다시 한번 음악으로 절절한 마음을 건네는 이 장면. 그 아래 깔리는 송아의 내레이션까지 듣고 있으면 오래전 사망한 연애세포가 부활하기 시작할 테니 감성이 메마르다 못해 쩍쩍 갈라진 논바닥 같다 느껴지거나, 사랑했던 게 확실하긴 한데 도대체 그 사랑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 심드렁할 때 이 드라마가 도움이 될 거라 본다. 보고 나면 괜히 연애시절 사진이나 주고받은 편지를 뒤적이게 할 수도 있고 현타라는 부작용이 올지도 모르나 확실히 좀 말랑해지는 것을 느낄 테니 그것만 해도 어디인가. 나이를 집어 먹을수록 굳어가는 것은 관절만이 아닌 마음일 때가 많아 서글프지 않나. 돌아갈 수는 없지만 돌이켜 떠올릴 추억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고 그걸 꺼낼 여유는 말랑한 마음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그러니 말랑한 감성이 필요한 어느 가을날,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를 정주행해 보라 강추하고 싶다. (가을이 아니어도 괜찮으나 가을마다 생각 것임은 틀림없다.)



나는 음악이 우리를 위로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정작 내가 언제 위로받았었는지는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 나는 알 수 있었다.
말 보다 음악을 먼저 건넨 이 사람 때문에.

언젠가 내게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 다시 닥쳐온다면
나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릴 것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상처받고, 또 상처받으면서도
계속 사랑할 것임을
그날 알았다.



아이 책을 읽어주기 바쁘게 뒷일은 남편에게 맡기고 티브이 앞으로 뛰어갔던 날들. 그런 아내가 짠해 채널까지 미리 준비해 놓고 아이 재우러 들어가던 남편의 뒷모습이 문득 생각난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감사와 함께 첨언을 할까 한다.
 이 드라마는 당신이 준 선물이라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에 여전히 다시보기 하는 것이니 그렇게 설레설레 고개만 젓지 마시고 뿌듯해하시라.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   




*사진출처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포토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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