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과 앤 Nov 13. 2024

죽지 않는 남자들

뭉쳐야 사는 나의 해병(아재) 일지


남편이 떠났다.


 이번엔 계룡산이라 한다. 지난번엔 칠갑산이라더니 지천명이 코 앞인 남자들이 도대체 산 밑에서 뭘 하는 건지. 하늘의 뜻을 알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느꼈다면 다행인 것이지만 아무래도 그건 안될 것 같으니 전국 팔도 유명한 산의 정기라도 받아 지천명을 메꾸려는 심산인지 산 밑에 똬리를 틀러 또 가버렸다. 팔각모는 안 쓰고 갔으니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26년 전 팔각모를 썼을 새카맣던 그 머리는 이제 흰머리가 희끗희끗할 터. 백발 일망정 제 모공에 자리만 잡고 있어도 감사한 일인 한 올의 소중함을 아는 이 남자들. 그렇다. 그들이 모인 이유는 딱 하나,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기 때문이다. 전설 속에 귀신을 잡았다고 소문났던 한 때 해병이었던 남정네들의 모임. 그것이다.


 12월은 각종 행사로 바쁠 때라 사정이 여의치 않아 흐지부지 되는 것을 막고자 10월 말부터 일찌감치 부릉부릉 시동을 걸기 시작하는 그들. 평소 조용하던 남편의 카톡창이 불난 호떡집 마냥 정신없이 울려대는 걸 필두로 드디어 서막이 오른다. 그렇게 시작된 며칠 간의 스케줄 조정 콩트를 관람하고 있으면 매번 겹치는 캐릭터가 등장하고 이제는 그가 누구인지 지목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르렀으니 이 정도면 그 간의 세월이 귀신 잡는 그들 뒤에서 망보기를 해도 될 정도의 짬밥을 준 게 아닌지. (그래도 한 때는 나라를 위해 지금은 그놈에 자부심 때문에 해병을 떠나지 못하는 한 남자와 산 공로로 14년 치 적립포인트를 준다면야 초코파이 한 상자를 집어드는 게 더 남는 장사이긴 하다.) 그 와중에 빠르게 밀려 올라가는 카톡창을 따라잡는 게 답답한 세월이 야속한 고순도 아재는 꼭 전화를 걸어 읍소에 들어가는데 카톡에 갇혀 풀지 못한 속내를 토해내며 핸드폰 밖으로 뛰쳐나올 기세이니, 그 간절한 호소를 듣고 있자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저렇게들 모이고 싶을까.' 그리하여 어떤 여인에게는 한 해가 저물어 감을 알리는 신호가 기가 막힌 입동 추위도, 허리가 부서질듯한 김장도 아닌 이 짠한 해병아저씨들의 스케줄 조정 통화 소리이다.




 전우애, 도대체 이것은 얼마나 끈끈한 정이길래 이 남자들을 이렇게도 꽁꽁 묶고 있는 걸까. 이번 생엔 절대 허락될 리 없는 그 감정이 참으로 궁금할 때가 있다. 그 호기심의 시작은 아빠가 아닌 오빠였을 때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그때 그 오빠는 넘쳐나는 스태미나를 자랑하다 못해 겨울에도 반바지 차림으로 조깅을 즐기는 상태여서 겨울이 오기 무섭게 내복을 꺼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2의 스킨으로 무장하는 지금의 자신을 차마 상상할 수 없던 그런 시절이었다. 사귄 지 100일이 지나던 무렵이었을까 그의 손에 끌려 찾아간 그곳엔 시커먼 남자들이 긴 테이블에 주르륵 앉아 있었고 여자 사람이라고는 오로지 나 하나, 핀 조명이 비추는 무대 위에 홀로 선 신인 여배우가  따로 없었다.  무슨 얘기가 오고 갔고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를 향해 반짝이던 그 눈빛들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 든 의문. '도대체 이 남자들은 뭐길래 상견례 전초전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는가.' 의구심 가득한 여자친구의 물음에 내 손을 잡고 있던 그 오빠의 짧고 간결했던 답.  

해병대 모임

 그 간결한 뉘앙스 안에 불가침 조약 같은 신성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은 모른 채 그냥 입사동기 모임이나 동창회 모임 같은 것이라 치부했을 이 여리고 순진한 아가씨. 그 아가씨가 이제는 짬밥을 들먹이고 초코파이 한 상자를 내놓으라 농을 던지는 능글맞은 아줌마가 되어 어느새 그들을 짠하게 바라보는 때가 온 것이다.



▲ 웃는 얼굴엔 당할자가 없지 않은가. 웃음마저 짠해진 우리 사이는 이제 전우일지도

 

 사실 이렇게 짠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기까지 내게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터. 처음부터 이들이 달가웠을 리 만무하다. 특히 아이가 태어나던 해 남편은 모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하지 않았고 더욱이 육아에 치여 하루하루가 버거웠던 나에게 그런 부수적인 문제 따위로 에너지를 소모할 여유가 없던 시절이어서 까마득히 잊고 살았던 게 사실이다. 모임 얘기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순간 둘 사이 냉전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을 테니 가정을 위해 해병의 자부심을 접어 기저귀 아래 잠시 묻어두었을 남편의 속내가 이제야 읽히는 것이지 그때는 나도 살아야 했기에 동기와의 아쉬운 통화를 마치고 나오는 자부심이 방전된 해병의 처진 어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렇게 방전된 이태를 보내고 그다음 해부터인가 넌지시 연말 사인을 알리기 시작하더니 이제껏 참 충실히도 충전의 11월을 맞이하고 계신 거다.


 남편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모임날이 다가올수록 그의 말투나 몸사위에 설렘이 실리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소풍날 들뜬 마음에 새벽 여섯 시부터 일어나 까치집진 머리에 물을 묻혀  빗질해 대는 열 살 아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이 남자의 행동. 하여 반백의 몸뚱이 안에 답답히 갇혀 사는 천진한 소년을 발견하곤 측은지심에 휩싸이는 그의 아내. 세월은 그 오빠의 스태미나도 그 여자의 순진함도 빼앗아 갔지만 측은하 약한 것들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애정을 선물해 줬으니 공평한 것이 아닌가. 그래 일주일 합숙도 아닌 그깟 1박 2일, 원 없이 회포 풀고 실컷 퍼져있다 와라. 자부심 충전이라고 해봐야 고작 벌린 판이라는 게 산 밑 펜션을 내무반 삼아 불판에 삼겹살이나 목살을 굽고 소주 한 잔이 전부일 이 아기자기 소박한 구해병님들. 그들의 '비바 해병대'를 이제는 나도 은근히 응원하는 것으로 나의 측은지심을 실천해 볼 요량이다. 이들의 마지막 식순은 무거운 중년의 몸을 일으켜 아침 산행을 하는 것이니 정기를 받기 위해 산 밑에 똬리를 튼 게 틀린 말은 아니고, 그렇게 해서라도 지켜내고 싶은 해병대 정신의 연장이라는 야무진 해몽까지 덧붙이는 이 너른 마음. 드디어 나는 진정한 대한민국 791기 해병의 여인이 된 것인가.


"뭐야. 이 선임아저씨 눈썹까지 세어 버린 거야?"

"대호 씨 얼굴이 이랬었나. 제일 쌩쌩했던 거 같은데"


그리고 충전을 마치고 계룡산에서 하산 한 남편의 핸드폰 사진첩을 들여다보며 호들갑 맞장구치는 걸 잊지 않는 이 능글맞은 아낙네. 그의 마지막 충전게이지를 올릴 히든키를 어찌 놓친단 말인가.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그 누님을 닮은 국화가 드디어 내게서도 피어날 때가 온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괜찮다.

그들의 재충전 모임이 2박 3일이 된다 한들 기꺼이 외쳐주마.


"비바, 해병대"



▲님아,  그 정기를 한껏 받으소서

    

*사진출처- 해병닷컴,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어서 와. 이런 시월드는 처음이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