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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과 앤 Nov 18. 2024

국화 앞에서

미루었던 국화의 처형식을 거행하며 든 짧은 단상


꽃을 사 온 당신의 마음은 너무도 고맙다.

그러나 그 최후는 쓰레기통.


 시작은 경이로운 아름다움이 응축된 작은 씨앗이었으리라. 온도와 습도가 일정히 맞춰진 인큐베이터 같은 농원에서 집단양육되었을 어떤 생명. 한 뼘씩 클 때마다 봉우리는 여물어 갔을 터. 그때 제 운명의 시나리오를 알았다면 그렇게 열심히 아름다워지길 열망했을까. 물정 모르고 그렇게 예쁘게만 커 가더니 꽃잎이 만개를 앞둔 시점 살던 화분채로 혹은 줄기만 댕강 잘린 채로 꽃시장으로 팔려가는 이 가혹한 운명. 그렇게 떠돌다 내 앞까지 왔을 너. 언제부터인가 절정으로 치닫던 너의 아름다움 앞에 슬픔이 교차해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슬프도록 아름답다는 그 말의 역설이 이리 절절할 수가. 그것 말고는 달리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다. 해사하게 웃는 너를 받아 들고 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네게 해를 입힌다. 이때부터 나는 마음 한편이 저릿해지기 시작한다. 겹쳐져 물러질 이파리들을 주르륵 떼어 내거나 특히 꽃병 사이즈에 맞춰 줄기라도 자를라면 처형수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영 마뜩잖다. 해체작업은 오로지 사람의 눈을 만족시키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양 자행되는 일종의 정형과정 아닌가. 예술로까지 끌어올린 플라워 아트의 세계에 찬물을 끼얹겠다는 게 아니다. 이것은 오로지 작은 생명에 예민하고 유별난 감성을 소유한 사람의 식물을 사고 처리하며 느낀 다소 망상이 가미된 개인적 소회일 뿐이다.




 그렇게 정형이 끝난 너를 홀짝일 만큼의 물이 채워진 꽃병에 꽂아두고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감상하는 이 아이러니. 할 수 있는 최선은 열심히 물을 갈아주며 힘을 내보라 격려하는 게 전부인 이 잔인한 속삭임. 하루만 지나도 생명줄이 끊겨가는 게 여실해 보이는데 소용도 없는 물을 갈아줘 봐야 무엇할까. 내 눈을 만족시키려 너의 생명줄을 쥐고 농락하는 이 기분에 빠져있으면 인간의 잔인함이란 그것이 제게 선이라 생각하는 것에는 한 없이 자비로워 죄책감마저 무뎌질 수 있음을 느낀다. 자기보다 약한 생명에 하루라빚지지 않살아갈 수 없는 게 인간 속성 아니겠나. 알면서도 만물의 영장인체 하다 어느새  당연해져 버린 오만한 주체성. 지금의 위기는 그래서 벌어지는 사달 아니겠는가. 객체의 시선을 갖지 못해 전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고 마침내는 그 존엄한 인간의 생존이 위협당하고 있는 꼴이라니. 시들어 생을 다한 국화 앞에서 얽히고설키는 생각은 결국 인류 앞에 까지 서게 한다. 마지막 불의 심판을 기다리는 인간과 그전에 아스러지듯 꺼져갔을 많은 생명들이 교차하며 외면하고 싶은 우리의 마지막을 끌어안고 싶었던 걸까. 


 그 대서사의 짧은 시연회가 오늘 아침 내 손에서 거행되었다. 일주일이 넘게 생명을 다한 너를 물속에 쳐 박아두었던 것을 용서해 다오. 차마 확인하고 싶지 않아 외면했지만 이것 또한 생명을 대하는 예의가 아닌 자기 연민이었다는 걸 자인한다. 단 숨에 한 손 가득 움켜쥔 너를 수의처럼 펼쳐진 신문지에 놓고 고이 접어 둘둘 말았다. 처음 올 때처럼 화려한 포장지가 아니어서 서운하지 않으냐. 그래도 가는 길엔 바람이 통하는 종이가, 그것도 만물의 영장들이 지적임을 뽐낸 흔적이 활자로 남아있는 이 신문이 오히려 네 서글픔을 달래줄지 아느냐. 쓰레기통 뚜껑을 통째로 열고 입구를 최대한 넓혀 너를 고이 뉘었다. 그리고 조용히 쓰레기 봉지를 묶었다. 


 단 돈 몇 푼에 팔려와 절정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내게 쏟아주어 고마웠다. 

그리고 내내 미안했다는 것도 알아다오.

다음 생에는 푸르른 들판에서 네 마음껏 피고 지는 이름 모를 꽃으로 다시 피어나거라.


안녕, 나의 국화.





▲ 어느 적당한 날 아주 우연히 너를 스친다면 이런 따뜻한 양지이기를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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