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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과 앤 Nov 24. 2024

나는 선포한다 내게 허락된 것을

보라, 마침내 쓰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왜 쓰냐건 웃지요.


 생각하는 존재로서 존재의 확실성을 이끌어낸 철학자 데카르트 님에게도, 남으로 창을 내겠다던 소박한 그 마음 그저 달관한 웃음으로 대신한 시인 김상용 님에게도 영광을 돌리는 이 아침. 그렇게 미루고 미루었던 쓰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위해 늦은 듯 적당한 이때를 선택한 내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십여 년  나는 읽는 대로 만들어진다는 그 책을 받아 들고는 정말 읽기만 하면 내 세계가 만들어지는 줄 알았으니  얼마나 우매했던 시절인가. 이제 십여 년의 세월을 더 살아보니 읽어서 세운 그 세계는 그저 승인 안 난 가건물에 불과하다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으니 살다 보면 등가교환에 있어 반드시 나잇값을 요구하는 각성이 존재함을 새삼 느끼며 나이 듬이 이토록 든든할 때가 있었나 싶다. 나이를 헛먹는 줄 알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많은 날들에도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앤씨 쓰세요. 당신의 사색과 문체가 참 좋아요."


십여 년 전 글쓰기 모임을 이끌었던 멘토 선생님의 말이 내 마음속에서 피고 지고를 반복했다. 피었던 그때는 뭐라도 써야 할 듯 가득 찬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동동거렸고 지었던 그 순간에는 머릿속을 떠다니던 사유의 부스러기들이 마음에 켜켜이 내려앉아 화석이 되기도 했다. 그 많은 날들을 위로하듯 위대한 나의 작가는 말했다.


난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냥 살아왔던 시간도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13년 전 겨울, 그녀가 떠나던 날 책장에 꽂아둔 그녀의 책들을 꺼내 가만히 쓰다듬는 걸로 조문을 대신했었다. 나의 위대한 작가님. 마흔이 넘어 등단했지만 한국문단에 손꼽히는 문인으로 쓰는 삶을 대변한 나의 영웅. 이런 류의 찬양을 극도로 싫어하셨지만 오늘만은 이 비루한 신인 작가의 마음을 받아주시길 바란다. 들꽃처럼 환하게 웃으셨던 모습이 아직 선한 나의 작가님, '박완서'. 이름마저 너무 마음에 들어 아이 이름에 '서'를 넣었다  말씀드리면 더 질색을 하시겠지. 수많은 책 중에 선생님의 책을 집어 들었던  단발머리 중학생은 이제 흰머리 성성한 중년의 아줌마가 되었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철이 없는 상태이니 이를 어찌할고. 위대한 작가를 본받아 명성을 떨치고야 말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늘어놓을 정도로 대단치 못해 죄송한 마음이나 그래도 당신이 심어주신 씨앗이 세월의 풍파에 썩지 않고 드디어는 발아하는 모양새를 갖추었으니 감사하다는 뒤늦은 고백을 선사해 본다. 또한 비루한 글에 소환될 존함이 아님에도 불려 나오시게 하여 송구스럽다는 말도 덧붙이고 싶다.


▲ 소박한 들꽃 한 송이를 더 반기시겠지만 내 마음에서는 언제나 장미였다 고백한다.


 쓰지 않고 지낸 그 많은 날들은 무의식에서 조차 나를 짓누르고 있었는지 어느 날부터 꿈속에 등장한 함구증. 하고 싶은 말을 가슴 가득 담고도 단 한마디도 뱉지 못하여 가슴 치던 그 꿈에서 깨어나면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누구나 겪는 일이라며 두루뭉술 무심히 넘겼던 많은 날들. 그럼에도 항상 들었던 의문은 어째서 그 꿈속 마음을 전하고 싶던 대상이 동일한가 였다. 삶의 전환점을 찾아 비슷한 방황을 거쳐 결국엔 자신의 길을 개척했던 동경하는 대상이어서, 혹은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미안함 때문에. 어떤 것이든 그가 보여준 애정이 과분했던 것은 맞다. 함께 일한 1년이 조금 넘는 시간에 비해 내가 받은 결혼 축의금 백만 원은 과하고 과했다. 액수가 마음이라는 속물근성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순수의 영역임을 직감했고, 그래서 받아 든 손이 부끄러웠고 사는 내내도 부끄러웠으리라. 가끔은 신간으로 혹은 방송이나 유튜브에서 만나는 그분을 언젠가 찾아갈 수는 있을까 싶었던 그 많은 날들을 지나 이제는 찾아갈 수도 있으리란 희망을 품어보는 요즈음, 비로소 함구하던 그 꿈이 멈췄다. 


 하여 나는 쓴다. 쓰지 못해 화석처럼 쌓인 그날들은 물론 보잘것없는 쓰레기를 남발하고 있는 지금까지. 나를 둘러싼 이 좁고 허접한 세계를 탓하기보다 자세히, 오래  볼 줄 아는 심미안을 갖고 있지 않음을 한탄하며 낮은 곳에 임하는 자세로 기어이 성실히 열심히 써보려 한다. 드디어 마주한 내 세계라는 황량한 현장에 벽돌 한 장 한 장 올린다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돕는데  걷어붙이고 뛰어들겠다.


그리하여 철학의 출발점이 되는 이 대명제를 빌려, 쓰는 자의 출발점 제 1조를 선포하고자 한다.


나는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4]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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