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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과 앤 Dec 14. 2024

글의 숲에서 길을 잃다

가느다란 실개천이 응원과 사랑을 보내준 티티카카 호수에게 보내는 갈채


'쓰는 우리를 위하여'.

 

 파란 색감도 제목도 그녀와 닮았다. 줌 강의가 시작되고 청량한 그녀의 목소리가 블루투스 이어폰 넘어 내게 도착했다. 종일 스케줄이 많았다는데 고단한 몸 쉬지 못하고 약속한 그 무엇을 풀어내는 그녀가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별 스케줄 없이 느슨했던 하루를 팽팽히 당기지 못하고 온갖 핑계를 내세워 숨바꼭질했을 내 하루와 비교돼 못내 부끄러웠다. 하루라는 삶의 밀도 차이가 현실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주옥같은 말이 뚝뚝 떨어지는 와중 고뇌와 상념이 불쑥불쑥 끼어들어 방해했다. 이 마음은 또 무엇인가. 담근 발을 의심하는 것인가. 신고 있는 신발 브랜드가 나이키나 뉴발란스가 아니어서 지레 겁먹고 또 도망갈 준비를 하는 것인가. 내적갈등이 충돌하는 중에도 맑고 따뜻한 그녀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나를 어르고 달랬다. 잘 들어보라고 여기까지 온 것은 충분히 그럴만했으니 지치지 말고 함께 가자고. 누군가는 울컥했다 말했고 그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모니터 뒤에서 울컥했다.(이 부분을 쓰면서도 순간 모니터가 흐려졌다. 나는 부족할지언정 잘하고 있다는 격려가 필요했나 보다.)

 

 구체적인 방법론을 들으며 지금에 그녀를 있게 한 그 많은 날들이 주르륵 파노라마처럼 꿰어졌다. 그래 얼마나 치열했을 날들인가. 은경 선생님 말처럼 그녀는 스스로를 돕기 위해 부단히 애썼고 그 응답을 들을 자격이 충분했다. 비루한 나의 노력은 아직 하늘은 커녕 노트북도 데우지 못할 정도니 한 줄 칭찬에 과하게 고무되지도 격양되지도 말자. 답은 언제나 하나였다. 의심하지 말고 떠오르면 관심을 집중할 것. 더 오래 깊이 생각하고 관찰하고 찾아볼 것. 그리고 검열하지 말고 쏟아져 나오는 대로 받아 적을 것. 그런 후 차가운 시선으로 쓰레기를 다듬고 고쳐갈 것. 이 중 어디가 삐걱거려 헤매고 있는 것인가. 그것에 대한 답을 찾아보자. 수업을 듣는 것인지 스스로와 일문일답하는 것인지 빽빽해진 글씨는 이리저리 휘날리고 생각은 폭우 속을 헤매고 있었다. 투명 비닐 같은 낯이 우려돼 비디오를 껐다. 좋은 마음 우중충한 얼굴로 화답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여겨졌다.(아니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걸 수도. 내 표정을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


'당신의 집이 깨끗하다면 글을 쓰고 있지 않은 것이다.' 주변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래 역시 나는 쓰고 있지 않구나. 요 며칠 묵혀두었던 여름의 흔적을 지워나가고 있었다. 쌓아두었던 설거지도 결국에는 내가 다 하게 된다고 말하지 않던가. 그래 그렇더라. 아무도 안 하고 결국엔 내가 다 하더라. 그래도 베란다에 한번 쌓아두고 기다려 봤다. 날개와 보호망 사이사이 새카맣게 들러붙은 먼지로 제 빛을 잃어버린 선풍기와 서큘레이터. 한 번은 부탁을 했던 것도 같고 그러겠다는 답도 받았던 것 같은데 여전히 아침마다 내 심기를 건드리며 그대로 12월을 맞았다. 심리적 마지노선을 터트린 것은 그 양반의 계엄인 건가.(여러모로 폭탄인 건 확실하구나.) 심란한 마음을 핑계 삼아 그들을 소환해 분해하고 샤워시켰다. 그러다 보니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져 나오는 나를 기다렸던 손님들. 청소를 미루고 있어 켜는 것도 찜찜해진 공기청정기. 그래 너도 이리 와라. 드라이버가 출동하고 맥가이버 버금가는 녹슬지 않은 분해실력. 필터와 팬에 쌓인 검은 먼지에 경악하며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을 들어 오래갔던 아이의 비염을 부추긴 장본인이 내가 아닌지. 밀려드는 죄책감이 나의 글을 가로막았다. 그렇게 시작된 에어컨 필터, 청소기 먼지통 청소에 이어 팔 걷어 부친 김에 내내 미뤘던 겨울맞이 환경미화까지 차츰 반경을 넓혔다. 결국 원래도 내 일이었고 여전히 내 일임을 확인한 요 며칠간의 식모살이가 내게 남긴 것은 관성의 법칙인가. 일상에 도사리고 있던 흐름을 끊는 요소는 짝을 지어 밀려왔다. 사교육이라고는 피아노와 태권도, 한자가 전부인 아이를 위해 할애되어 있던 그동안의 내 시간들. 그 시간을 비집고 내 시간을 밀어 넣은 결과는 아이의 학습 구멍이었다. 초등교육과정의 구멍이라고 해봐야 얼마나 큰 구멍이겠나. 구멍은 내 마음에 뚫린 불안의 구멍이었다. 너의 성장과 나의 성장 사이 느끼는 죄책감과 좌절감. 앞으로도 그 사이 어디쯤에서 나는 길을 잃고 헤매겠구나 하는 슬픈 예감이 들었다. 나의 영웅, 박완서 작가님이 사십이 넘어 등단한 이유에는 이것도 포함되어 있겠구나. 애를 늦게 낳다 보니 남들보다 늦게까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든 적은 있었으나 이런 종류의 느낌은 낯설고 훨씬 더 직접적이었다.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 놓은 것은 김종원 작가님의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였다. 읽고 쓰고 사는 이 세 가지는 결국 하나라고 말했던 그 말에 나는 쓰는 삶에 노크했다. 그런데 이제 온전히 나로서만 살 수 없는 현실적인 제약 앞에서 어떻게 균형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질문 앞에 다시 놓였다. 그리고 그 균형은 모성애라는 불안을 머금은 이 감정 앞에 한 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음을 확인한다. 흔히 말하는 나보다 소중한 존재가 그에 못지않게 소중한 나의 성장과 교차점을 이뤄 버티고 있다. 비가역적 성장의 시기,  결정적 시기의 대립과 공존. 누구에게 더 비가역적이고 결정적인 것일까. 앞에 모성의 선택이 무엇이어야 현명한 것인가. 가만히 들여다보니 며칠 간 느낀 부침의 근원은 이것이 아니었나 싶다. 어떻게 균형점을 찾을 것인가와 적절한 합의의 선을 어디로 정할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저 이렇게 혼란스러운 채 부둥켜안고 뒹굴며 하루하루 보내다 보면 어느새 혼란도 적응돼 살만해지는 것일까.


 번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던 것은 그녀의 마무리 인사 중 나온 한 단어였다. 편집자와 계속해서 퇴고하는 이 과정이 고단하고 힘드나 탈각하는 느낌이라고. 그래서 기쁘고 즐겁다고.


탈각:  파충류나 벌레 따위가 껍질을 벗음.
         식물이나 씨앗 따위가 꼬투리나 껍질에서 나옴.


아직 나는 견고한 그 껍질 아래 꼼짝 않고 있을 뿐이다. 이제 겨우 주변에 이리저리 차이며 깨어날 때임을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혼란과 혼돈의 시기는 아직 시작도 안 했음을 잊지 말자. 껍질 안에서 웅크리고 있으면 들숨도 날숨도 아무 소용없는 저산소증, 고 이산화탄소혈증. 둘 다 결과는 죽은 듯 사는 것일 테니 말이다.


SNAKE SENSE를 지닌 피오나들.
함께 성장하고 피어나는 한 해 만들어가요.
우리의 존재가 서로에게 거름이 되어 글의 숲을 이룰 거예요.



 부디 스스로 한 겹이라도 벗고 SNAKE SENSE 란 과찬을 받아보자. 간신히 발 담갔는데 함께라 불려지고 거저 받게 되는 저 소중한 거름을 헛되게 하지 말자. 함께여서 울컥하고 고마운 나의 3기 피오나들. 그녀들이 내게는 줄탁동시임을. 지금을 감사하고 언젠가는 나 또한 선한 영향력을 말하는 존재가 되도록 애써보자.



 따숩고 아름다웠던 우리의 밤을 녹인 회장님의 울컥한 소감문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한 꼭지 올립니다. 어젯밤 줌수업을 끝내며 든 생각은 그녀가 티티카카 호수처럼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높은 고원지대 형성된 그 호수가 겉으로야 신비해 보이지만 그 깊이와 넓이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 그래서 신비로움보다 처절하고 고단했음을. 그럼에도 굽히지 않고 충실하고 결연했던 날들이 있어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느다란 실개천이 티티카카에게 보내는 찬사라 소제목을 붙여 보았습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호수를 갖고 있습니다. 농사를 위해 가두어둔 작은 보일 수도 있고 품다 보니 한 없이 넓어져야 해 바다를 꿈꿔야 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만나 서로 물길을 대 사막에 숲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지만 큰 흐름에 속해 있음이 못내 부끄럽고 황송하지만 그래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어 팔을 걷어 봅니다.

나만 보는 글이 아닌 대중에 공개되는 글이라서 그동안 쳐놓았을 많은 검열을 걷어내고자 의식의 흐름대로 쏟아내 보았습니다. 예의를 지켜야 해서 누른 맞춤법 검사에 할 말이 없긴 하네요. 국어시간에 놀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매번 민망합니다. 모두를 향해 다정한 관찰자가 된 우리. 그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던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안데스 산맥 해발 3.810m 위치한 티티카카호수



*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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