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청동기시대 개관
동은 인류가 최초로 제련한 금속이며, 이기 제작에도 가장 먼저 활용되었다. 인류가 가장 먼저 동을 사용한 시기는 서기전 90~70세기 연간이며, 중심지는 메소포타미아와 나일강문명의 무대인 유라시아 중동지방이다. 이때 동으로는 송곳 등의 간단한 공구나 장신구가 주로 제작되었으며, 이라크 샤니다르Şaneder유적(서기전 8,700년경)을 시작으로 하여 터키 챠이외뉘 테페시Çayönü Tepesi유적(서기전 7,200년경)·이란 알리 코쉬Ali Kosh(서기전 6,500년경)유적과 야림 테페Yarim Tepe유적(서기전 6,000년경) 등에서 동기가 확인된다. 이때 동기는 오로지 구리만으로 제작된 순동기이므로 크리스티안 톰센 이전부터 Copper Age로 분류되었다.(자세한 내용은 매거진 『고고학 공책』의 「청동기와 청동기시대」 3편 참고) 다만 이 순동기시대는 아직 이기로서 석재가 주를 이루는 시기가 넓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금속을 최초로 제련했다는 점이 인정되어 이 시기를 특별히 금석병용기Chalcolithic라 칭한다.
인류가 동의 경도를 높이기 위해 다른 금속을 합금하기 시작하는 시점은 서기전 40~33세기 사이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시 순동기가 먼저 발생했던 서아시아에서의 변화가 가장 이르며, 이후 유럽을 비롯한 전역으로 퍼진다. 유럽은 서기전 35세기경에 순동기시대가 시작된 이후 빠른 기간 내에 청동기시대로의 전이를 이루어냈다고 한다. 에게해에서 서기전 32세기경에 발생한 것으로 알려진 키클라데스문화Cycladic Culture가 유럽 최초의 청동기문화이다. 중동 내에서는 이집트(엄밀히 말하면 북아프리카)의 전이가 가장 늦은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는 제12왕조 즉 서기전 20세기에 청동 제련이 본격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원인은 영토 내에서 합금 소재가 산출되지 않는데다가 지리적·문화적으로 폐쇄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적 문제들로 인해 신소재가 늦게 제작된것 뿐, 기실 물질문화 내용을 보면 동시기의 청동기문화와 별반 다를 것은 없다. 한편 김원룡은 『한국고고학개설韓國古考學槪說』에서 1960~70년대 서구고고학의 정리를 수용하여 유라시아 서부의 금석병용기 상한을 서기전 55세기로, 청동기 등장 시점을 서기전 37세기로 보고 있어 검증이 필요하다.
한국의 청동기시대는 앞서 언급했듯 서기전 20세기 후엽, 늦으면 서기전 15세기에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초기 청동기문화는 한국고고학의 영역 내에서 국지별로 저마다 다른 시기에 다른 형태로 출현했다가 점차 요서遼西발 비파형동검문화 전통으로 일원화된다. 한반도 북단의 압록강·두만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토기조합이 서기전 20세기 후엽으로 편년되며 이전 신석기시대 토기양식의 전통을 계승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한국 청동기시대의 기저 물질문화가 신석기시대 물질문화로부터 서기전 20세기 후엽을 기점으로 점진적 변화를 갖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의 청동기문화는 요서에서 발생한 전통이 요동遼東에서 완성된 후 한반도로 유입되는데, 그 과정이 반드시 청동기시대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요서의 청동기는 서기전 20세기경에 등장하는 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가 주목된다. 물론 하가점 계통의 청동기문화는 근본적으로 한국 청동기문화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으나, 어찌되었건 하가점 하층문화 이후 청동기가 요서 무대 위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국 청동기문화의 전통은 이른바 비파형동검문화에 기반을 두는데, 이것은 위영자魏營子문화에 뒤이어 나타나는 십이대영자十二台營子문화를 시작으로 한다.
청동기시대는 한국고고학의 무대 위에 원시적인 정치체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기이다. 신석기시대에 정주 촌락이 형성된 이후 그 공동체를 이끄는 존재는 공동체 성원으로부터 권능을 부여 받은 의타적依他的 권력자 즉 지도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극히 제한적으로, 미약하게나마 배타적 권력을 가진 지배자가 등장하게 된다. 그들은 생전에 공동체 성원을 압도하는 권력으로 성원들에게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죽은 뒤에는 청동기 다량 부장묘를 축조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표상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한국사학적으로 표현하면 군장, 인류학적으로 표현하면 Chief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흔적은 청동기문화를 일찍 받아들였던 요령의 십이대영자문화권역 일대에서만 발견되며, 남한 사회에서는 그러한 권력자가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이외에 한국 청동기시대 사회는 권력의 변화와는 별개로, 사회복합도가 높아지며 농경이 본격화된다는 특징이 있다. 사회복합도는 청동기 제작과 같은 전문기술이 등장하거나 새로운 문화와 함께 이주민이 유입된다거나 권력의 집중도가 높아진다거나 하는 등의 변화 요소들을 미루어 보았을 때 사회적 역할이나 위치, 사회 성원 등 여러 면에서 복합도가 증대할 것이라 짐작할 수 있겠다. 생계 경제에서 농경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증가하며, 논에 벼를 심어 경작하는 수전농경 혹은 수도水稻재배가 시작된다.
김원룡, 2008, 『韓國考古學槪設』(제3판), 일지사.
김정열 등, 2019, 『요서지역의 청동기문화: 문화접경·다양성·상호작용』,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고학회, 2015, 『한국고고학강의(개정신판), 사회평론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