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시대의 도구와 유물
정주사회가 시작되면서 한 개인과 집단이 창출하는 물질문화나, 자연으로부터 획득하여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정주공간 인근에 한정됨에 따라 그들의 '문화'는 점차 지역색을 띠게 되었다. 특정 지역색을 가진 물질문화가 공유되는 범위는 이전 구석기시대의 문화권역보다 훨씬 더 세부적인 권역을 형성하는 데 이르렀고, 이때 하나의 문화권역 내부에서 다른 권역의 물질문화요소가 발견되면 그것은 권역 간의 문화적 이동을 상정할 수 있는 근거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신석기시대 한반도 내에서는 이렇게 이질적인 문화 사이의 물적 이동이 빈번하게 확인되는데, 이것은 한반도 내 문화권역 사이에서의 근거리 이동뿐만 아니라 한반도 외 문화권역과의 원거리 이동도 포함된다. 이러한 물적 이동은 서로 다른 정주집단 간의 물자 교환 혹은 교역으로 해석된다.
당시 한반도는 남부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일본열도, 특히 북부 규슈九州지역과의 물적 교류가 확인된다. 이때 활용되었던 물자는 한반도의 경우 조가비팔찌, 일본열도의 경우 흑요석제 석기가 가장 표지적이며 이외에 기타 지역색이 뚜렷한 석기나 골각기 등이 확인되기도 한다. 부산 동삼동유적에서는 1,500점 이상의 조가비팔찌가 출토한 바 있는데, 이를 당시 동삼동인들이 온전히 소비했으리라고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일부 물적 교류를 염두에 둔 대량 생산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한반도 내에서는 문화권역 사이의 토기 이동이 극소수로 확인되는 편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토기는 조가비나 흑요석처럼 이동에 유리한 기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동된 토기는 물적 교류의 측면에서는 다른 물자를 운송하는 데 사용된 저장용기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사람 자체의 이동도 염두에 둘 수 있다. 즉 한 문화권역의 토기제작기술을 보유한 존재가 모종의 이유로 타 문화권역에 건너갔으리라는 추정이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생계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수렵과 어로였으며, 이에 따라 다양한 수렵·어로용구들이 제작되었다. 화살·작살·낚시·그물추 등의 도구들이 대표적이다. 화살촉은 마제석촉뿐만 아니라 타제석촉도 확인되며, 석재는 한반도에 흔한 화강암과 석영도 자주 사용되지만 그외 혼펠스나 흑요석도 적지 않게 확인된다. 흑요석 산지는 한반도 내에서는 백두산이 주목되며, 화산이 많은 일본 열도에서도 많이 산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환경과 연관되어 흑요석제 석기는 주로 동해안과 남해안 동부지방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화살촉은 슴베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확인되기도 하며, 이중 나선 서포항·인천 운서동·제주 고산리 등 극소수 유적에서는 사다리꼴의 슴베를 가진 어형촉魚形鏃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보이스만유적 출토품과 유사하여 연관관계를 염두에 둘 만하다.
해양어로가 발달한 동남해안지방을 중심으로 어로용구가 다수 확인되는데, 도구의 형태는 시베리아·아무르강 유역·서북 규슈의 것과 유사한 면이 있다. 낚시는 하나의 석재만으로 가장 단순하게 만든 외낚시·형태가 더 복잡해진 역T자형 낚시·돌로 대를 만들고 골각으로 미늘을 만들어 결합한 결합식 낚시가 있으며, 각각 동북부지방·남해안지방·영동지방 및 남해안지방에서 주로 확인된다. 이 중 서북 규슈와 유사한 양상을 보이는 것은 부산 동삼동유적 등에서 주로 확인되는 결합식 낚시이다. 그물은 실물이 발견되지는 않았으나, 부산 동삼동유적 출토 토기 중 그물로 찍어 문양을 만든 기물이 확인된 바 있고 그물추가 다수 확인되기 때문에 당대 어로생활에서 분명히 존재한 도구라는 것은 분명하다. 작살은 화살촉과 유사한 형태를 지닌 것도 있지만 화살촉보다 길거나 이빨이 달려 확실히 구분되는 기물도 있다. 작살은 대개 대형 어류나 해양포유류를 포획하는 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물추로 상정되는 기물 중 원추형석기는 양양 오산리유적을 비롯한 동해안지방에서 집중적으로 확인되는데, 동해안의 신석기시대 생활유적이 대개 석호潟湖 인근에서 확인된다는 특성에 집중하여 이를 가물치용 낚시로 판단한 견해도 있었다. 신종환은 석호에 가물치가 다량 서식하며, 현대인들이 가물치 낚시에 즐겨 사용하는 루어가 프로그Frog라는 점에서 착안하여 개구리의 입 속에 '추 형태의 낚시'인 원추형석기를 쑤셔 넣어 미끼로 이용했으리라고 본 것이다. 개구리 뱃속에 들어간 석추는 개구리를 산채로 낚시줄에 고정하는 바늘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미끼를 적당히 가라앉히는 추의 역할도 수행하게 된다. 이때 살아 있는 개구리는 수면 부근에서 떴다 가라앉았다를 반복하며 허우적대고, 살아있는 먹이만 먹는 가물치는 이 움직임을 포착하여 낚시를 물게 된다는 원리이다.
신석기시대가 되면서 새롭게 농경이라는 생계 방식이 등장하면서 도구 조합에서도 농기구의 등장이라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지면을 파거나 긁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으리라 짐작되는, 이른바 굴지구掘地具는 현재의 따비나 보습과 대응되는 도구들이다. 땅에 타격을 가해야 하는 만큼 당시 가장 단단한 재질인 돌로 제작되었으며, 신석기시대 전기의 늦은 시기에 중서부지방에서 먼저 등장한 이후 중기부터는 전국적으로 확인된다. 수확구인 낫도 제작되는데, 전형적인 형태의 낫은 극소수만 확인되었다. 다만 손잡이 부근을 길게 갈아 구멍을 뚫은 석도형석기가 동해안지방에서 집중적으로 확인되는데, 이것은 마치 청동기시대의 반월형석도를 연상케 하는 도구로 낫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수확한 곡물을 가공하는 갈돌과 갈판 역시 상당수 확인된 바 있다.
이상에 서술한 실용적 도구들 외에 의례·예술·치장 등을 목적으로 한 비실용적 도구들 역시 적지 않게 확인되었다. 장신구는 앞서 언급한 조가비팔찌를 비롯하여 옥·흙·뼈 등으로 만든 귀걸이와 목걸이 등이 있다. 자연물을 가공하여 원하는 형태의 물상을 묘사한 경우는 선각문토기의 동물 그림을 비롯하여 흙으로 각종 동물이나 인간을 빚은 소조, 조가비와 돌로 묘사한 사람 얼굴, 그 외에 원형과 용도를 알 수 없는 골각제 조각 등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예술작품들은 주술이나 기원 등의 행위와 긴밀하게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되며, 특히 울산 신암리유적에서 출토된 여인 소조를 여신상으로 해석하여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원시 비너스들과 같은 맥락에서 보려는 견해도 있다. 다만 신암리 여인상은 그 크기나 태토의 질에서 어린 아이의 장난감이나 유희의 결과물 정도로 볼 수도 있다. 나선 서포항유적의 골각제 조각과 여인상, 부산 동삼동의 조가비 얼굴조각, 양양 오산리의 얼굴 소조 등도 신앙과 유희 사이에서 해석의 여지를 갖는 작품들이다.
신종환, 2017, 「한국 신석기시대 사회 문화상 연구」, 박사학위, 경북대학교.
최종휴, 2019, 「동해안지역 신석기시대 석촉의 형식 분포와 변천」, 석사학위, 영남대학교.
하인수, 2013, 「신석기시대 패총문화의 이해」, 『한국 매장문화재 조사연구방법론』 8, 국립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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