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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긴믈 May 17. 2020

參. 청동기시대 ㅁ

청동기시대 매장시설

신석기시대 분묘는 원시한국인의 본격적인 정주를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청동기시대의 분묘는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원시한국사회의 복합성·공동체성·정체성·권력자 등 다양한 사회 기반을 시사하는 문물로 이해되었다. 청동기시대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분묘는 지석묘가 있는데, 이것은 중국 동북지구와 한반도를 비롯하여 제주도와 일본 규슈지역에까지 널리 확산되어 있는 한국 청동기시대 고유의 묘제이다. 지석묘는 탁자형지석묘·기반형지석묘·개석형지석묘·묘역식지석묘·위석식지석묘·대석개묘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특히 대석개묘는 서기전 4~3세기에 중국 동북지구에서 탁자식지석묘와 공존하는데, 이것은 지석묘와 석관묘가 혼합된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 동북지구와 북한의 분묘(좌상: 본계 산성자 대석개묘, 우상: 개천 묵방리 대석개묘, 좌하: 황주 관산리 탁자형지석묘, 우하: 성천 룡산리 순장 지석묘)


지석묘는 청동기시대 전기 후반에 해당하는 서기전 11~10세기에는 남한에 등장한 것으로 판단된다. 흔히 알려진 지석묘의 형태는 탁자형 지석묘인데, 지상 위에 보통 4개의 판석으로 시신과 부장품을 안치할 공간 즉 매장주체부를 형성한 뒤 그 위로 큰 개석을 얹는 형태이다. 한반도 내에서는 일반적인 형식이 아니지만 강화도의 부근리지석묘나 인천 내가지석묘군, 고창 도산리지석묘, 거창 내오리지석묘군 등 다양한 곳에서 소수로 확인된다. 북한과 중국 동북지구에서 흔히 발견되어 북방식지석묘로도 불렸지만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이름이다. 한반도 남부에는 기반형과 개석형이 많은데, 탁자형지석묘의 매장주체부가 소형화되고 지하로 내려간다. 기반형의 경우 개석 아래 네 모서리에 작은 돌을 다리처럼 괴어 바둑판처럼 보이며, 개석형은 매장주체부 위로 바로 큰 개석을 놓아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바위가 놓여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창 고인돌군에는 탁자의 다리처럼 긴 지석을 기반식처럼 놓은 경우도 확인된다. 이외 제주도에는 기반형의 변형일 것으로 생각되는 위석식지석묘가 흔한데, 이것은 지석을 원형으로 둘러 공간을 만든 뒤 그 위에 개석을 놓는 형태이다. 위석은 지석의 역할만 하는 경우도 있지만 지상식지석묘인 경우는 매장주체부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지석묘에서 개석과 지석을 제거하면, 그 자체로 석관묘라 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 전기에 처음 등장하여 초기철기시대까지 나타난다. 송국리유형단계가 되면 대표적인 묘제로 널리 사용된다. 석관묘는 지면을 굴착한 뒤 판석이나 할석을 둘러 매장주체부를 마련한 분묘인데 이를 석곽이라 칭해야 할지 석관이라 칭해야할지는 모호하다. 크기는 대개 소형이기 때문에 석관으로 인식하기 쉬운데, 관과 곽의 가장 큰 차이는 시설의 기능과 목적이다. 관은 시신을 안치하기 위한 시설로 시신과 시신이 착장하는 기물들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게다가 많은 경우 관은 시신을 분묘로 옮겨 안치하는 과정에서 시신을 은폐적으로 보관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러므로 관 내에는 대개 착장 부장품만 들어가고, 다른 보유 부장품은 관 밖 공간에 배치되기 마련인 것이다. 반면 곽은 분묘 내에 고정적으로 설치하여 시신과 시신이 착장하는 부장품, 그리고 시신이 보유하거나 그에게 봉헌된 부장품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즉 곽 내에는 관에 담긴 부장품 뿐 아니라 보유 부장품도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다. 이 경우 시신을 안치한 관이 곽 내에 안치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청동기시대의 지석묘나 석관묘는 시신이 착장했으리라 판단될 여지가 있는 단검과 목걸이 외에 토기와 석촉이 한 공간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이를 곽으로 볼 여지도 있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일반적인 명칭에 따라 석관묘라 이르겠다.


한반도의 석관묘(좌: 정선 아우라지, 우: 대구 설화리 556-5번지)


청동기시대 전기 후반의 늦은 시기 이후 영남과 호남에서는 분묘의 묘역을 가시적으로 표상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기 시작한다. 돌을 넓게 깔거나 도랑을 파는 등의 방식으로 개별 묘의 묘역을 표시하는 경우도 있으며, 한 단위의 공동묘원 전체에 돌을 깔거나 돌을 배열해 낮은 담을 만드는 방식으로 집단묘 내외 혹은 집단묘 내 분묘 간의 공간적 질서를 마련하는 경우도 확인된다. 지석묘에 돌을 넓게 깔아 묘역을 마련한 경우 묘역식지석묘라 이른다. 사천 이금동, 창원 덕천리, 마산 진동리 등 영남에 집중되는 모습이 확인된다. 묘역식지석묘는 지하를 매우 깊은 이단굴광으로 굴착하고 맨 아래에 석관을 시설한 후 그 위로 여러 층의 충전토층과 즙석층을 만든 뒤 지면에 개석을 놓는 경우도 확인된다. 이를 다중개석식지석묘라고 하는데, 김해 율하리, 창원 봉산리, 보성 동촌리 등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즙석으로 묘역을 마련하는 분묘군집에서는 분묘는 없으나 똑같이 돌을 깔아 원형이나 방형의 구역이 마련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제단으로 생각된다. 산청 매촌리, 대구 진천동, 진주 초장동 등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특히 대구 진천동의 경우 즙석권역 가운데에 동심원 암각화가 새겨진 입석이 있어 특징적이다. 이외에 춘천 천전리나 서천 오석리, 보령 관창리 등에서는 묘를 중심으로 세장방형의 주구를 두른 주구석관묘가 확인되는데, 주구 내에 단독묘가 시설되는 경우도 있지만 분묘가 쌍을 이루는 경우도 확인된다.


묘역식지석묘(상: 춘천 중도, 좌하: 산청 매촌리, 우하: 여수 월내리)


십이대영자유형을 시작으로 한국고고학의 무대 위에 청동기 다량 부장묘가 등장하는데, 그 묘제는 지석묘와 분별되는 석곽묘나 목곽묘이다. 이것은 토착문화와는 분묘 구조나 출토 유물에 있어 다분히 이질적인 묘제이며, 그들과 다른 외부 유입 엘리트집단을 표상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들은 한국고고학의 무대 위에 자리잡은 후 지역정치체를 지배하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며, 그들 중 일부 혹은 그들의 영향을 받은 어떤 집단이 이주를 통해 한국고고학의 무대 곳곳에 그들과 같은 권력 표상 방식을 퍼뜨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반도 남부에는 서기전 4세기 즈음에 청동기 다량 부장묘가 등장하는데, 그 묘제는 석관묘 혹은 적석목관묘로 생각된다. 이는 이후 적석목관묘와 목관묘로 전개되며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의 대표적인 묘제로 자리잡는다.


대전 괴정동 석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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