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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 Dec 10. 2021

기념일은 돌아오는 거야!

기념일 징크스에 관하여

 저녁 6시. 테이블 수는 10개가 채 안 되는데 우리 가족까지 벌써 세 테이블이 찼다. 저녁 영업은 5시 30분에 시작이라 예약도 시간에 맞추었다. 5시에 학원 수업 마친 아이들을 픽업해서 천천히 가면 대략 맞는 시간이었다. 남편에게는 2주 전 식당을 예약할 때부터 당부했다.

 

- 잊지 마. 5시 30분 예약이야.


 그러나 남편은 아직 병원에서 출발하지도 않았고 우리 모녀는 주문도 못하고 눈치를 보면서 30분째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은 우리의 14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1주일 전 남편은 건강검진을 받았다. 이전부터 고혈압으로 다니던 병원에서 국가 검진을 받고 심장 부정맥 검사를 위해서 병원에서 측정 장비를 받아왔다. 그 장치로 일주일간 심전도를 측정해서 저장했다. 그리고 검사 결과를 듣기로 한 날이 마침 결혼기념일 당일이었다.


- 병원은 예약했어?

- 그냥 오면 된다고 해서 회사 끝나고 가려고. 식당에는 안 늦을게.


 시끌벅적한 기념일 맞이도 번거롭고 그냥 보내자니 밋밋해서 좋아하던 레스토랑에서 밥이나 먹으려던 것인데 시작부터 꼬였다. 그이가 병원에 도착하니 대기자가 평소보다 많아서 조금 늦을 거라고 전했다. 우리는 5시 30분에 문을 여는 식당의 주차장에 5시 5분에 도착했다.

 

- 뭐 급한 일도 없고. 꽃 사러 가자! 너네 엄마, 아빠한테 선물해야지.

- 에잇, 배고픈데...... 엄마가 꽃집 찾아봐.


 막 학원을 끝내고 배가 고프기 시작한 두 딸은 만사 불만이다. 그래도 명색이 결혼기념일인데 꽃 선물이라도 받고 싶어서 아이들에게 결혼기념일 선물을 달라고 한참 전부터 말해두었다. 특히 '꽃'이라고 콕 집어서. 남편에게는 사귀기 시작한 첫해에 꽃 선물을 받고는 더 이상 받지 못했다. 내 입이 화근이었다.


- 난 꽃보다 차라리 맛있는 거 먹는 게 남는 거더라.


남편도 나랑 별반 생각이 다르지 않았는지 그 뒤로 꽃은 선물하지 않았다. 그런데 살면서 보니 꽃은 항상 기분 좋은 선물이었다. 내 돈으로 사도, 남이 선물해줘도 말이다. 식당에서 멀지 않은 꽃집에 들어가서 꽃을 고르니 가격이 생각보다 비쌌다. 아이들끼리 용돈을 모아도 아쉽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장난스러운 생각이 떠 올랐다. 생각해보니 나도 남편에게 꽃을 선물한 적은 없었다.

- 오늘 우리가 아빠한테 꽃을 선물하자. 결혼기념일이니까 아빠도 꽃 선물을 받을 이유가 있지. 아빠한테는 비밀로 하고. 왔을 때 깜짝 놀라게 하는 거야.

 

 나의 제안에 모두 동의를 했고 모자란 돈은 내가 보태어 작은 꽃다발 하나를 구매했다.

지루하고 심심했던 기다림이 작은 꽃다발 하나로 두근거림으로 바뀌었다. 세 모녀는 이 꽃다발을 어떻게 줄 것인지, 이 꽃다발을 받고 아빠가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지 기대하는 마음에 식당 입구에 들어설 때까지 계속 조잘거렸다.




 6시. 

아직은 여유 있는 기다림이었다. 아이들은 휴대전화로 과자 만들기 동영상을 보고 있고, 난 주위의 테이블을 둘러보고 있었다. 테이블이 하나씩 차고 사람들이 메뉴를 골라 주문하는 것을 멍하니 보다가 종업원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남편에게 연락이 온 것은 없는지 확인했다.


6시 10분. 

겨우 10분 지났을 뿐인데 그 사이 마음이 조급해졌다. 조금 전까지 전화를 걸어서 다정하게 '기다리고 있어, 조심해서 와.'라고 말하던 사람은 사라지고 계속 문자로 앞에 몇 명 남았냐고 물어보고 있었다.


- 배고파. 먼저 먹으면 안 돼?


아이들이 투덜 되니 나도 조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6시 12분.

'주문할게요!' 기다리다 지친 나는 아직도 앞에 5명의 대기자가 남아 있다는 메시지를 보고 주문하기로 결정했다. 얼마 뒤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빠른 속도로 음식을 먹어치웠다. 아이들이 다 먹고 나니 6시 50분이 넘어서고 있었다. 그제야 남편에게 연락이 왔다.

 

- 이제 출발


우리 테이블에는 빈 접시만 4개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아이들인 배가 차오르니 만족감을 느끼는지 다시 아빠가 오면 어떻게 꽃을 선물할 것인지 얘기 중이었다. 난 익숙한 이 상황이 맘에 들지 않을 뿐이었고.


 20년 넘게 같이 지내오면서 남편은 일이 우선일 때가 많았다. 식사 약속을 펑크 낼 때도 많았고 회의 때문에 약속에 늦는 경우도 흔했다. 어렸을 때는 그런 남자가 멋져 보였고 아이들이 커가면서는 두 딸의 생활에 더 초점이 맞춰져서 그럴려니 했었다. 기다리는 게 익숙하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가끔 기념일에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쌓였던 게 터지곤 했다. 우리는 그것을 기념일 징크스라고 불렀다.


 이번에도 왠지 위태스러웠다.

'내가 예약할 때부터 그렇게 당부를 했는데......'

'검사 결과 듣는 게 뭐라고 30분만 더 일찍 갔면 안 늦었을 텐데......'

' 어차피 이쪽에서 먼저 밥 먹고 갔어도 병원 진료 안 늦었겠구먼......'

 하나의 불만이 생기니 실타래의 풀린 실처럼 줄줄이 풀려나왔다.




 남편에게 이제 출발한다고 연락이 왔을 때 음식을 추가로 주문했다. 다시 식탁이 세팅되고 창밖으로 아빠의 차가 보이자 작은 아이는 꽃다발을 들었다. 큰 딸 은이는 내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표정은 굳어가고 있었나 보다.

 그이가 자리에 앉자마자 영이는 꽃다발을 아빠에게 주고 쫑알쫑알 떠들기 시작했다. 은이는 아빠를 보면서 슬쩍 턱으로 나를 가리켰다. 난 옆에서 조용히 째려보고 있었다.


- 정말 미안해. 진짜로 이렇게 대기자가 많을 줄 몰랐어.

- 내가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쳇!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분위기를 바꾸려는지 은이가 물었다.


- 아빠, 병원에서는 괜찮대?"

- 하...


 갑자기 그이가 한숨을 크게 쉬었다.


(아, 맞다. 검진 결과!) 

- 병원에서는 뭐래?


나의 질문에 갑자기 어두워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 약을 한 보따리로 줬어. 위장도 큰일 났고, 심장도 위험하고 간도 문제래.

- 아. 그러게 운동 좀 하랬잖아. 지금도 봐. 누가 쫓아와? 밥 좀 천천히 먹으라고, 빨리 먹으니까 계속 위장도 안 좋아진다고 그러지...


실타래처럼 풀렸던 불만은 다시 쏙 들어가고 다른 잔소리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제야 남편은 미소를 짓고는 알았다며 먹는 속도를 눈에 띄게 늦췄다.

다시 그이는 은이와 눈을 맞추고 찡긋 웃었다.

 

'아! 넘어갔다. 좀 더 버텼어야 했는데..... 10분도 못 버텼다.'


오늘의 싸움에서 난 이미 졌다. 지금 다시 늦었다는 이유로 잔소리를 시작하면 나만 쪼잔해질 것이 분명했다. 의기양양해진 은이는 웃으면서 아빠와 학원에서 있었던 얘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영이도 학교에서 반 친구 때문에 청소하게 된 일을 구구절절 얘기하고 있다. 남편은 애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맞장구를 치며 맛있게 스테이크를 먹고 있었다. 그렇게 도란도란 밥 먹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냉랭해졌던 마음에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12년 연애하고 14년 같이 살면서 크게 아프지도 않고 죽네사네 싸우지도 않고 큰 문제없이, 평범하지만 함께 순간을 나누면서 살고 있는 걸 보니 평온한 모든 것에 감사함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계획을 잘못 짜서 식사 시간에 한 시간이나 늦은 남편은 얄밉지만 생각해보니 그 순간도 오랜만에 딸들하고 온전히 나누는 시간이었으니 참 좋은 시간이었다.


 기념일. 뭐 별거냐. 내년에도 돌아올 텐데. 지금 우리 가족이 함께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만. 다음 기념일에는 꽃다발이라도 사 오길, 약속에 늦지 않기를 일 년 동안 계속 그이의 머릿속에 주입을 하면서 다짐을 해두어야겠다. 돌아올 기념일에는 징크스 걱정 없이 멋진 하루가 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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