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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지기 Apr 22. 2022

봄이 지나가는 한 달...

찰나의 봄을 즐기는 여유

  7년 전 나는 안정적인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전업주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남편의 직장에서 가까운 이 도시로 이사 왔다. 회사를 그만두면서 사람들이 이제 뭐하고 살 거냐고 물어보면 항상 하는 말이 있었다.


 "나는 이제 여유롭게 백화점 문화센터나 다닐 거예요!!"


 비록 지방일지라도 광역시에서 태어나 자랐고 졸업하고 나서 회사도 서울로 갔으니, 나는 시골의 여유보다는 도시의 편리함과 번잡스러움이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직급이 올라갈수록 더해지는 책임의 무게와 업무 스트레스가 차곡차곡 쌓였고, 집에서는 계속된 독박 육아의 부담이 커지면서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퇴사를 결심하고 집을 구하러 왔을 때는 8월이었다. 신도시에서 가장 오래되었다지만 겨우 3~4년 차 아파트였다. 아파트 단지 안과 밖의 나무들은 대부분 어렸고 그늘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단지 옆을 흐르는 강도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시는 뜨거웠고 길거리에서 사람을 찾기는 어려웠다. 뜨거운 햇살을 그대로 받으며 바싹 마른 보도블록 틈새로 자라고 있는 잡초들만 눈에 보였다. 미리 예약하고 온 부동산에서는 여러 전셋집을 보여줬고, 우리는 넓은 초록 정원이 있는 지금 살고 있는 단지로 결정했다.


 이사는 10월에 했다. 도시의 모든 유치원이 공립유치원이라서 11월 말 즈음 동시에 입학 신청을 받았다. 당장은 유치원마다 아이들로 가득 차서 다음 해 3월까지 유치원 결원도 없었다. 백화점이 없으니 그렇게 소원하던 문화센터 다니기는 물 건너갔다. 결국 집에 남아 있는 세 모녀가 특별히 할 일도 없으니 거의 매일 동네 탐험을 나섰다. 단지 근처 금강 옆으로 수변 산책로가 있었고,  작은 공원이 곳곳에 있었다.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방향을 바꾸어가면서 돌아다녔고, 어떤 날은 아예 도시락을 싸서 나가기도 했다. 어딜 가도 차와 사람이 가득하던 도시와는 다른 전원 풍경이 낯설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공원은 그늘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어린 나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동화 속 숲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도 들었다. 그렇게 구석구석을 다니다 보니 근처의 공원과 아직은 어려도 길을 꽉 채우고 있는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이사 왔던 남서향의 집에서는 특별한 날에나 찾아보러 가던 석양이 매일 눈에 들어왔다. 높은 건물들과 화려한 조명들, 바쁘게 움직이던 자동차와 빠른 걸음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으니 하늘과 해와 나무와 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뒤로 두 번 더 이사를 했다. 두 번째 집은 강이 바로 보이는 남동향의 집이라 금강의 물안개와 갈대숲, 일출이 나름의 시간을 알려주었고. 이번에 이사한 집은 수변공원에서 자라는 버드나무가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모두 창밖으로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발자국들을 시시각각 볼 수 있는 집이었다. 특히 봄은 그 차이가 분명했다.



 

 예전에는 벚꽃이 피면 봄인가 보다 생각했다. 그러고 나면 일교차가 커지고 햇빛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곳에 이사 와서는 봄이 오는 시간 조 더 빠르다는 것을 알았다. 겨울의 찬바람이 조금 무뎌질 무렵, 어디선가 따뜻한 공기 냄새가 묻어 나오면 생강나무의 꽃이 피기 시작한다. 이어서 단지 곳곳에 있는 산수유가 꽃을 피운다. 마른 가지 사이로 약간의 노란색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즈음이다. 목련 나무에서는 단단하게 쌓인 털옷을 비집고 꽃잎이 나오기 시작하고 하루아침에 매화와 벚꽃이 화려한 옷을 입기 시작한다.

 겨울이 유난히 길었던 올해도 기어이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평년보다 조금 늦었지만 생강나무 꽃이 피었고 산수유꽃도 피었다. 그리고 며칠 사이로 벚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이제 진짜 봄이 도착했다.      

벚꽃 핀 단지 - 골방지기


 봄은 유난히 짧다. 생강나무 꽃, 산수유, 벚꽃이나 매화꽃처럼 봄과 같이 오는 꽃들은 새잎이 돋기 전 마른 가지에서 피어난다. 그리고 꽃이 질 때쯤 어린 연둣빛의 새잎이 올라온다. 그때부터 정말로 다채롭고 찬란한 봄을 느낄 수 있다. 사시사철 푸른 향나무나 전나무에서도 밝은 색의 새 잎들이 돋아나고, 알록달록한 철쭉과 진달래가 피기 시작한다. 한쪽에서는 라일락이 가득 꽃을 피우고, 길가에는 조팝나무 꽃이 가득 피어 하얀 울타리를 만들고 있다. 이제 봄의 정점에 들어섰다.

 

조팝나무, 골방지기
조팝나무 꽃 - 골방지기

절정기에 들어선 봄은 초록의 잎이 하루하루 다르다. 처음에는 마른 가지 주위로 어린 연둣빛 새 잎들이 올라오다가 어느 순간 연초록의 잎으로 가득 채워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버드나무에서도 매일 마른 잔가지에 찍히는 연두색이 늘어나더니 며칠 사이에 꽉 찬 버들잎을 자랑하면서 바람에 흐드러지고 있는 풍성한 초록색 버드나무가 되었다. 그러고 나면 이제 연둣빛의 어린잎들이 하루가 다르게 진한 청년의 초록색을 향해 달려간다.  그렇게 꽃이 지고 한 달 정도 찬란한 봄이 우리 곁을 지나간다.


  예전에는 왜 그 짧은 순간을 즐기지 못했을까? 매일이 바뀌는 즐거움도 몰랐고, 찬바람을 맞으며 봄이 오는 길목을 여는 이른 꽃들의 노고도 몰랐다. 그냥 예쁜 봄만 알았다. 마흔이 넘어 주위의 번잡함을 걷어내고 나서야 보이기 시작했다. 40년 넘게 이런 순간을 그냥 지나쳤다는 것이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아이들에게도 일 년 중 가장 짧고 다채로우면서도 화려한 이 시기를 알려주고 싶었다.


 "어머! 새순이네! 은아, 영아 이것 봐. 색이 완전히 어린 초록이야!"


하지만 아직 어리고 더 많은 것이 궁금한 아이들에게는 꽃이 피고 새순이 돋으면 봄축제와 소풍 갈 때가 다가온 것이고 날이 따뜻해서 밖에서 놀기 좋은 시기일 뿐이었다. 내가 뱉어내는 감탄사에 "맞아. 이맘때 나무색이 너무 예뻐!"라고 말을 해주는 것이 그들에게는 최선이었다. 언제쯤 너희들이 짧고 찬란한 이 시간을 눈치챌까?

그러는 사이 지금도 봄은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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