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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지기 Apr 07. 2022

슬픈 부활절-2010년 4월 4일

어머니, 여전히 바쁘시죠?

  그날 남편은 가족들과 어머님의 병실에 있었다. 위급한 상황이었고, 혹시 모를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집에서는 태어난 지 이제 60일 정도 된 은이와 부기가 덜 빠진 내가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정이 되기 전, 남편은 어머님의 호흡이 다시 좋아지셨다고 전화로 알려주었다.

 

 자정이 지나고나서야 잠자리에서 어머님의 회복을 기도하고 잠이 들었다. 새벽 4시 정도였을까? 어머님이 부르는 소리에 놀라서 깼다.

"정아!"

잘못 들은 소리였을까? 마당에 있는 개는 조금 전부터 계속 고 있었다. 가슴은 터질 듯이 두근거.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어머님이 돌아가셨어. 잠깐 깨어나서 찬송가를 부르시다가 조용히 주무시듯이... "

남편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어머님이 2010년 4월 4일, 부활절 새벽에 하나님 곁으로 가셨다.




 어머님은 가난한 침례교 목사의 4녀 2남 중 셋째로 태어나서 친척집을 전전하며 사셨다고 했다. 그때도 지금도 하나님 이름을 팔아서 먹고 살려는 목사도 많지만, 험지에 개척하고 봉사하고 교역자들을 길러내는 것이 소명인 사역자들도 있다. 모아놓은 돈도 집도 없고 믿음과 소명의식이 강한 목사님.  그러다 보니 가난 속에 놓인 목회자의 가족들 역시 강한 믿음으로 버텨내는 수밖에 없다. 어머님의 집이 그랬단다. 위로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두 언니가 있었고, 아래로는 비슷한 또래의 동생들이 있었다. 어머님과 동생들은 각자 흩어져서 친척집을 떠돌다 서울에서 먼저 자리 잡은 나이 많은 큰 언니의 집에서 형부가 주는 용돈으로 학교를 다녔고, 독립하기 위해서 간호대학에 갔다고 했다. 그리고 병원에서 내향적인 아버님을 만났고, 3남매를 초등학교 때부터 서울로 유학 보내 뒷바라지하고 좋은 대학에 보내 결국은 큰 경제적 도움 없이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잡은 어른들로 키워내셨다.

 

 나는 10년 넘게 연애를 하고 나서야 어머님을 만났다. 둘 다 타지에 나와 살면서 자취를 하다 보니 특별한 목적이 없으면 굳이 만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상대방의 부모님이었다. 굳이 약속을 해서 만난다면 이제 이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 낯선 사람들과도 가족이 될 수 있겠다는 결심 정도는 서야 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그런 결심을 하는데 10년이 걸렸다.


 "교회를 다니던지, 성당을 다니던지 뭐가 중요해. 종교는 자유인데.. 그냥 하나님 믿는 사람이면 다 되는 거야. 안 믿으면 하나님 만나라고 내가 기도해주면 되고... "

  첫 만남에서 나를 제외한 내 가족들은 교회를 다니지 않고 그나마 형제들은 성당에 다닌다는 말을 듣고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다.

 교회 권사님이신 어머님은 요즘 말로 쿨했다. 만약 MBTI 검사를 한다면 ENTJ나 ENFJ 같은 리더형이 아녔을까 싶은 분이셨다. 아버님이 지방에 자리 잡은 후 어머니는 간호사는 그만두고 전업주부를 가장한 사회활동가로 변신하셨다. 교회나 학부모회, 지역 봉사회, 뜨개 동아리 같은 곳에서 활약을 하셨다. 지역 여전도회 회장, 지역 연합 합창단, 교회 합창단, 봉사단 등등 외부 활동도 많이 하셔서 지역 국회의원 사모, 항공회사 사모, 호텔 사장 같은 나름의 지역에서 방귀 좀 뀐다는 분들과 다니셨고 그중에서도 대장 역할을 하셨다. 남편은 어머님이 건강만 좋으셨다면 아마 시의원쯤은 몇 번은 하셨을 거라고 지나가면서 얘기했다. 그 정도로 적극적으로 모임을 하시면서 사람 만나는 것을 즐기셨다.

 그러면서 집안일을 등한시하신 것도 아니었다. 한창때는 집안 살림을 도와주시는 분도 있었다고는 하지만 내가 본 어머님은 뜨개질로 태어날 큰 아이의 이불과 옷을 만들어 주시고, 퀼트로 요과 가방을 만들어 주셨고, 한 번 먹어본 요리는 바로 뚝딱 흉내 내서 어머니 식으로 부활시키는 실력을 가지고 계셨다. 어머님은 아버님과 지역 사회를 연결해주는 고리였고,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 아버님이 가장 존경하는 여자였다.

 



 2007년 연말에 결혼을 하자마자 남편은 두 달 뒤 미국으로 1년짜리 교환 연구원으로 떠났고 나는 첫 설 명절을 혼자서 보내게 되었다. 남편 없이 시부모랑 보낼 며느리가 딱했는지 부모님은 시누와 함께 넷이서 떠나는 중국 여행을 권하셨다. 나도 마침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참 재미있던 시기여서 '앗싸'하는 마음에 따라나섰다.

 결혼 전부터 나는 남편과 남매처럼 닮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는데, 같이 여행 다니는 관광객들이 보기에는 딸 둘이서 부모와 같이 여행 온 것처럼 보였었나 보다. 단체 여행 3일째에 내가 며느리라는 것을 알게 된 한 노부부가 어머님을 보고 칭찬을 퍼붓기 시작했다.

"하이고, 며느리도 딸이라더니. 어쩜 가족이 다 닮았어. 이렇게 며느리를 딸처럼 여겨주고 며느리도 엄마처럼 모시니 얼마나 좋아."

"나도 딸 같은 며느리가 있으면 이뻐해 줄 텐데, 우리 며느리는 맨날 데면데면해. "

미소 지으면서 듣고 계시던 어머님이 노부부께 조용히 말씀하셨다.


"며느리도 딸이라고요? 그런 게 어딨어요? 며느리는 남인데 어떻게 딸이야? 그냥 며느리는 남이고 내 아들의 부인이지. 내 딸은 될 수 없어요. 괜히 기대하지 마세요. 남이 가족이 되었다고 해도 친자식은 아닌 거야. 그냥 인정할 건 인정하고 적당한 거리 유지하면서 서로 예의 지키고 같이 노력해야 좋은 거예요."


아버님도 시누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어쩌면 못 들었을지도...) 이제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나에게 그 말은 너무 크게 와서 박혔다. 그리고 서운함도 밀려왔다. 멋진 어머니와 모녀 같은 괜찮은 사이가 되고 싶었는데... 그런데 그 서운함이 오래가진 않았다.

 저녁에 먼저 결혼한 친구가 명절에 느끼는 며느리의 괴로움을 장문의 문자로 보내왔다. 거기에는 가족이라 말하지만 진짜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 엄마, 남편 엄마를 따지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친구의 시부모님은 며느리도 딸이라면서 집안 조상의 차례상을 준비하라며 막 부리지 만  정작 차례상 받을 조상의 후손들에게는 그러지 않았고, 친구는 남편의 가족들을 위해서 내 가족도 못 보고 혼자 봉사하고 있는 게 말이 안 된다고 했다. 친구의 문자를 받고서 어머님이 낮에 하신 말씀을 계속 곱씹었다. 그리고 그때 확실히 깨달았다. 왜 거의 모든 모임에서 어머님이 대장인지를......

어머님은 대체로 옳았다. 맞는 말만 하셨다.


  맞벌이 주말 부부를 하면서, 게다가 노산도 멀지 않은 우리 부부가 아이를 낳는다면 어머님이 키워주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세 개의 조건만 지켜야 한다고 하셨다.  먼저 주 양육자는 어머님이시니 본인식으로 키울 테니까 무조건 온전히 맡길 것, 그리고 아이 돌보려면 살림 못하니 도우미 구해 줄 것. 마지막으로 "아기의 생활비는 너네가 내는 거다. 아기 물건들은 너네가 다 사서 보내. 그리고 나는 그냥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 하고 돌보기만 할 거야."

 별로 고민할 거리가 없게 해 주시는 분명한 조건이었다. 아기가 태어난 직후에 친정엄마가 잠깐 아기를 돌봐주셨는데 난 얼마를 드려야 할지 속물적인 계산을 하고 있었고,  양육스타일이 다른, 마음 약한 나의 엄마에게 아기한테 그러면 안 된다는 잔소리만 해대고 있었다.




 두 딸이 자라면서 어떤 갈래 길 위에서 이리도 저리도 가지 못하고 막막해하거나 낭떠러지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복직하기 이틀 전 작은 아이를 돌봐줄 어린이 집을 찾지 못해서 난감하고 있을 때 대기 15번이었던 회사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왔었다. 영이가 신도시로 이사 오고 킥보드를 타고 내리막길을 내려가다가 무엇에 걸렸는지 그대로 목이 꺾이면서 회전하는 모습을 보고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갔는데 아이는 긁힌 곳 하나 없이 무사했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위험했고, 난감한 순간들에 어느 순간에 해답이 나타나거나 구해주는 손이 나타났다.

 자연스럽게 감사하는 삶이 체득화되었고 어떻게든지 답이 구해질 거라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내가 낳은 아이들을 기도로 키워주시겠다 약속하셨던 어머님의 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올해 12번째 어머님의 기일이 돌아왔다. 작년에는 큰딸 은이가 밀접접촉자가 되면서 자가 격리당하는 바람에 추도식에 참여하지 못했었다. 정말 오랜만에 형제들이 다 모인 자리였다. 이번 기도는 어머님의 편안한 휴식, 그리고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말로 가득 찼다. 식사를 하면서 남편은 우스개 소리로 마누라가 구박한다고 '우리 엄마한테 다 이를 거야'를 연발했다. 그러면서 지금 어머님이 살아 계셨으면 그 10년 넘는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셨을까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론은......

 '어머님은 지금 하늘나라에서도 무지 바쁘게 일하실 거야. 어쩌면 하나님이 그러라고 일찍 데려가셨을지도 몰라. 혹시 모르지, 천사들의 합창단이라도 꾸려서 지휘하고 계실 지도... 거기에서 먼저 떠나온 엄마들과 땅 위에 남아있는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임을 만들었을지도 몰라. 어쨌든 어머님은 항상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실 테고 친구들을 무지 많이 만드셨을 거고, 존경받고 계실 거야. 언제나 옳으신 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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