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방인 Jun 30. 2023

꼰대가 될 용기

MZ세대에 맞추지 않을 용기


“꼰대”,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거부감.


꼰대. 말만 들어도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지고, 숨이 탁 막혀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른, 선배라는 말 대신 꼰대라는 말을 쓴다는 것은 그만큼 윗세대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는 뜻이고, 열린 사고방식을 가진 나와는 다른 사람이며, 나와는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나는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는 은연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고지식하고 강압적이며, 비합리적, 비효율적의 집합체 같은 사람. 그게 바로 꼰대인 것이다.


"꼰대"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이미지들


이에 맞서는 세대, 소위 MZ라고 불리는 세대들은 그럼 어떠한가.(개인적으로 MZ세대라는 표현을 굉장히 싫어한다. 의미도 불분명하고 범위도 너무 넓으며, 무엇이든지 규정하기 좋아하는 언론과 현세대에 의해 억지로 만들어진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유분방하고 열린 사고를 가지고 있으며, 참신함을 무기로 새롭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일을 하는 세대라는 사고가 지배적이다.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먼 그들


이미 고착화된 꼰대와 MZ세대의 이미지와 특성에 대해 맞는 것인지, 맞지 않는 것이지 혹은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생각하고 있지 않는지 얘기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이미 그런 인식이 지배적이고, 혹은 그런 지배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생각은 충분히 다를 수 있기 때문이겠다. 다만 회사에서 함께 일을 해야만 하기에, 꼰대와 MZ가 부딪히는 상황 그 자체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일 것 같다.


출근시간에 대해 얘기하는 “꼰대”

9시가 출근시간이면 최소한 10분 전에는 회사 자리에 앉아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9시가 출근시간이라는 것은 9시에 일을 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라는 것이며, 그렇기에 조금 일찍 와서 PC도 켜놓고, 오늘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리스트업도 해놓아야지 당연히. 헐레벌떡 9시에 딱 맞춰 와서는 어떻게 9시부터 일을 할 수 있겠냔 말이야. (가장 중요한) 나도 예전에는 그랬고 그렇게 배웠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 너도 그렇게 해.


출근시간에 대해 얘기하는 “MZ”

업무를 준비하는 시간은 명백히 업무시간이 아니잖아. 9시에 출근을 하도록 규정이 되어 있으므로, 내가 회사에 있어야 하는 시간은 9시 0분 0초부터이지. 업무준비도 업무의 일환인 게 당연하잖아? 수영을 하기 전에 준비운동을 했다고 해서 준비운동시간이 수영하는 시간에 포함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 9시 출근인데 9시에 회사에 있어야 되면, 6시 퇴근이면 6시에는 집에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앞서 얘기했듯이 누구의 말이 맞냐라고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각자의 머리를 거쳐 입에서 말이 나오기까지의 구조가 완전히 다르다. 꼰대도 아닌, MZ도 아닌 사람이 객관적으로 봤을 때, 누구의 손을 들어줘야 하는 것인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둘 다 그럴듯해 보이고, 둘 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거 같다. 그냥 꼰대는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MZ는 저렇게 생각하는 구나라고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인정하는 것밖에 할 수가 없다. 누구의 의견이 맞는 것인지 토론을 할 수도 없는 문제이고, 소송을 제기해서 법원의 판결을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에는 찝찝함이 남아있다. 아니 해결을 해야 된다라는 무의식 중의 외침이 있다. 당장 꼰대와 MZ가 같은 부서에서, 같은 회사에서 마주쳐야 하고 같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꼰대와 MZ의 갈등은 최근 많은 회사에서 겪고 있는 문제일진대, 요즘의 분위기는, 요즘의 대세는 MZ에게 맞추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겠는가.


임홍택 작가님의 "90년생이 온다". 무려 대통령도 추천한 책이다.


“MZ”, 이해와 배려의 대상


90년대생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들의 생각을 좀 더 알아보자라는 취지의 밑바탕에는 결국 MZ들에게 맞추어야 한다라는 은연중의 인식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기업의 특성상 MZ들을 이해하자는 것은 인도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이끌어내어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MZ들은 개조와 변화의 대상이 아닌 이해와 포용의 대상이라는 것에 대해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꼰대가 온다”라는 책은 아직 보질 못했다. 아니 앞으로도 보지 못할 것 같다. 꼰대는 기피와 조롱의 대상인 반면, 젊은 세대는 이해와 관용의 대상으로만 여겨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감히 반기를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비단 나뿐일까. MZ는 과연 이해만 해야 하는 대상일까. 그들의 말과 행동을 지켜봐야만 하는 것일까. 꼰대에 대한 동정심에서가 아니라, 각자 세대의 방식이 있을진대,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사람들에게 충고를 하는 것을 단순히 꼰대짓이라는 말로 평가절하해야만 하는 것일까. 따끔한 질책과 지적은 무조건 지양해야만 하고, 격려와 응원만 해야만 하는 것일까. 집에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보다는 앞으로 이 회사를 다녀야 할 시간이 더 긴 사람들에게 무조건 포커스가 맞춰줘야만 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들이 생겨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일까.


물론 비합리적이고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습관적으로 행해지는 일들에 대한 개혁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스타일의 차이, 방식의 차이에 대해서 윗사람들의 생각은 무조건 꼰대로 치부받고 타파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만한 문제이다. 서로를 이해하고 맞춰가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어느 한쪽을 절대악으로 규정하여 배척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아닌 건 아니다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MZ들에게 욕을 먹더라도, 그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꼰대로 치부받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무조건적인 관용과 이해보다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충고와 조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관계에 있어 무조건은 없다.



“꼰대”가 되지 말고 “어른”이 되자라는 거창한 말로 포장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그냥 꼰대는 꼰대가 자연스럽다. 아무리 맞는 말을 하고 좋은 말로 포장해도 듣는 사람이 싫으면 그냥 소음인 것처럼, 이미 꼰대로 규정이 되었으면 무엇을 해도 꼰대이다. 다만, 꼰대의 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들을 가치가 없다거나, 무시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개인적인 감정이나 기분 말고, 합리적이고 합당한 지적과 충고를 할 수 있는 꼰대가 될 용기를 내는 일이 때로는 필요할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답답하면 니들이 뛰던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