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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Aug 11. 2021

나의 '워(Work)'와 '라(Life)'

`

  "재미있게 살아." 

  참 오랜만이었다. 이 말을 들은 건. 






  우리 가족은 항상 재난상황에 대비하듯 살았다. 갑자기 도둑이 들면, 갑자기 납치당하면, 갑자기 지진이 나서 집이 무너지면, 갑자기 불이 나면, 알 수 없는 어떤 비상상황이 생기면... 그래서 우리 집에는 늘 비상 가방이 준비되어 있었고 어느 정도의 재난 상황을 견딜만한 식량을 항상 구비해놓았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므로. 준비해놓는다고 해서 손해 볼 건 없으므로. (참고 <생존 체력>)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맥락에서, 우리 부모님은 "나중에 엄마가 없어도...", "나중에 아빠가 없을 때..."라는 말을 많이 했다. 나 또한 "엄마, 나중에 내가 없어도..."라는 말을 종종 했다. 

  우리는 이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이야기의 마무리를 이렇게 지었다. "재미있게 살자." 아빠는 나에게 말했다. "나중에 아빠랑 엄마가 없어도 재미있게 살아." 나는 말했다. "응. 재미있게 살게. 아빠도 나중에 내가 없어도 재미있게 살아요." 


  암 진단을 받고 병원에 다니면서, 아무리 치료를 해도 다 나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이후, 아빠는 나에게 말했다. "재미있게 살아." 




  카페를 오픈하고 카페 사장이 되면서, 모든 신경을 카페에만 쏟았다. 인테리어, 레시피, 영업시간, 알바 스케줄, 청소, 동네 분위기 파악까지 뭐하나 대충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프랜차이즈를 하려고 하는구나 하고 깨닫고 깨달았다. 프랜차이즈는 이미 완성된 모든 걸 받아오면 되는 거니까. 나는 그게 싫어서 '나의 카페'를 만들고자 개인 카페의 세계에 뛰어들었던 건데, 만들어가야 하는 부분은 정말이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몰랐던 것이 아니지만, 물론 알고 있었지만, 정말 하나하나 온전히 내가 직접 다 만들어야 했다. 


  분명 다 준비해놓은 것 같은데, 손님은 없는 것들을 찾기 일쑤였다. 나는 눈치를 보며 열심히 메뉴를 만들고, 또 기껏 만든 메뉴를 가차 없이 버리기를 수도 없이 했다. (아니, 지금도 하고 있다. 아직도 나의 카페는 완성되지 못했다.) 


  그러니 쉬는 날은 뻗는 날이었다. 쉬는 날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뻗어버렸다. 간신히 눈을 뜨면 바깥은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나는 잠깐 일어나서 화장실에 다녀온 후 다시 뻗었고, 그렇게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집에서는 TV도 틀지 않았다. TV를 볼 시간도, 기력도 없었다. 요즘 어떤 프로그램이 인기인지 모른 채 몇 달이 지났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2>를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도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진득하게 앉아서 5분도 볼 수 없었다.  


  작년, 재작년에 매일같이 하던 운동도 전혀 하지 못했다. 카페 주방에서 틈틈이 스트레칭을 하고는 있지만, 본격적으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지난 2~3년 동안 열심히 만들어 건강하던 나의 몸은 이제, 그때의 체력을 다 끌어다 쓰고 바닥난 몸이 되었다.




  얼마 전, "휴가는 언제예요? 어디로 갈 계획이에요?"라는 질문에 머리를 한 대 쾅 맞은 것 같았다. "네? 휴가요?"라고 화들짝 반응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지금이 휴가 시즌이구나. 휴가를 가야 하는구나. 다들 휴가 계획을 세우고 있구나. 아무리 코로나19로 세상이 어지러워도 휴가는 휴가였다. 아무리 집콕을 할 예정이더라도, 휴가는 휴가였다. '휴가'라는 단어가 이렇게 생소할 만큼, 나는 '휴가'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지내고 있었다. 나에게는 영업일과 휴무일만 있었다. 


  친구가 이직을 했다. 새로 간 직장은 여의도에 위치한, 통유리에 한강이 한가득 들어오는 곳이었다. 친구는 한강뷰 앞에서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으며(여의도는 밥값이 비싸서 매번 점심을 사 먹기가 부담된다면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외국계 회사 다니다가 완전 한국 회사로 오니까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 떨어지네. 칼출근에 칼퇴근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재택근무하다가, 여기서 갑자기 야근하려니까 '라'가 확 줄어."    

  이 말을 듣고 나는 또 한 번 머리를 한 대 쾅 맞은 것 같았다. 아! 워라밸! 카페일을 시작한 이후로 '워라밸'이라는 단어 자체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생각해보지 않았으니, 온 세상 곳곳에서 떠들어대는 '워라밸'이라는 단어가 귀에 들어온 적도 없었다. '워라밸'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지난 8개월 동안 나에게는 '워'만 있었다. 





  내가 원하는 일이어서 시작했고, 이 일이라면 내가 얼마든지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워곧라(Work가 곧 Life)'로 살아온 8개월이었다. 물론 '나의 일'을 하는 즐거움은 분명 존재했다. 열심히 커피를 볶고 재료를 손질하고 손님을 만나면서 나는 행복했다. 카페에서 틈틈이 책을 보고 글을 끄적거리는 게 좋았다. 그렇지만 '워'는 '워'였다. 체력이 바닥났고, 스트레스로 하루하루 늙어갔다. 그걸 8개월 만에 드디어 깨달았다.  


  그리고 바로 이때, 그러니까, 하필 지금, 우리 부모님을 알고 나의 어린 시절을 아는 분과 아주 오랜만에 긴 전화통화를 했는데, 통화 마지막에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건강하기만 기도할게. 너의 건강은 내가 어떻게든 책임진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재미있게 살아. 재미있게 사는 건 너의 몫이야."


  머리에 쾅, 심장에 쾅, 쾅쾅쾅 온몸에 울렸다. "재미있게 살아." 


  아빠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재미있게 살아." 

  아빠의 목소리가 쾅쾅거리며 온 몸에 웅웅 울려 퍼졌다. 

  아아, 그립고 그리운 이 목소리.  




  나의 '라'를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일할 때 즐겁게 일하고, 건강하고 재미있는 나의 삶도 가질 것. 나의 카페는 아직 완성형이 되지 못했고, 자영업자는 어쩔 수 없이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지만, 그래도, 너무 거기에 얽매이지 말 것. 최선을 다해 열심히 나의 카페를 가꾸되, 나의 삶도 가꿀 것. 나의 모든 열정을 카페에 쏟아붓듯, 나의 삶에도 한 스푼의 열정을 더해줄 것. 충분히 자고, 충분히 운동할 것. 건강한 음식을 맛있게 먹고, 사람을 만나 즐거움을 나눌 것. 하늘을 올려다보고 숨을 쉬고 사랑할 것.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이때, 그러니까 또 하필 지금 이런 때, 옆집 사장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장사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이것도 사업이에요. 사장님은 사업가예요. 스스로를 장사꾼이라 생각하지 말고, 사업가라고 생각해야 해요. 장사의 세계에 들어섰다고 생각하지 말고 사업의 세계에 들어섰다고 생각하세요. 사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첫째도 둘째도 사람이에요. 믿을만한 성실한 사람을 잘 쓸 수 있어야 해요."


  이 말을 들으며, 나는 또 한 번, 쾅쾅, 온몸을 두들겨 맞은 느낌이 들었다. 


  이후 몇 날 며칠 동안 이 말을 곱씹으며, 나는 원대한 꿈을 가지기로 했다. 우리 카페가 연중무휴로 돌아가는 원대한 꿈. 나 혼자는 할 수 없으니, 이거야말로 정말 좋은 직원이 필요한 일이었다. 정말 좋은 직원이 한 명만 함께 해 준다면, 어쩌면, 나에게 '주말이 있는 삶'과 '저녁이 있는 삶'도 허락되지 않을까 하는 사치스러운 욕심도 살짝 났다. 

 

        






  최근, 쉬는 날 어떻게든 약속을 잡고 있다. 명분은 '남타커(남이 타 준 커피)'다. 다른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것. 

  보통은 친구와 약속을 잡지만, 때로는 조금 특별한 시간을 갖기도 한다. '연중무휴'라는 원대한 야망을 품은 카페 사장은 '매니저 승급'이라는 또 다른 원대한 야망을 품은 알바생과 함께 남타커를 한다. 그러니까, 이 남타커는 나의 '라'를 위한 시간인 동시에, 우리 카페를 완성형으로 만들기 위한 시장조사 및 아이디어 회의 시간이기도 하다. 


  일하느라 늘 편한 옷만 입었지만, 이날만큼은 다른 옷을 입는다. 옷장에 처박아두었던 예쁜 옷. 커피 국물 튄 낡은 운동화는 잠시 벗어두고 아껴두었던 스니커즈나 샌들을 신는다. 일하느라 늘 질끈 묶었던 머리를 풀어헤치고 긴 머리 휘날리며 살랑살랑 걷는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한여름의 바람은 뜨겁지만, 그래도 큰 숨을 들이쉬면 공기가 온몸에 가득 찬다. 에어컨의 공기가 아닌 자연의, 이 날것 그대로의 공기. 

 

  카페에 가서 두리번거리며 어떤 분이 사장님이신지를 찾아보고, 이것저것 물어본다. "이 커피는 뭐예요?", "저 커피는 뭐예요?" 남이 타 준 커피를 쪼로록 마시며 맛을 음미해보고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다. 사진을 찍고 오늘 나의 '라'를 기억한다. 




  집에 돌아오니 아빠의 목소리가 귀에 선연하다. "재미있게 살아." 아빠의 목소리가 온몸에 쾅쾅, 웅웅 울려 퍼진다. 아빠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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