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아빠와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의 주제는 한이 없었다. 밤을 새워가며 우리는 '세상의 모든 대화'를 했다. 정치, 사회, 문화, 과학, 인문, 역사, 종교, 동물, 환경, 교육, 심리 등 말 그대로 '세상의 모든 대화'.
이렇게 '세상의 모든 대화'를 하며 별의별 대화를 다 하다 보면 '인생의 끝'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게 된다. 우리는 과연 어떤 죽음의 형태로 인생의 끝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에 대해 생각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다 다루었다. 고령, 지병, 갑작스러운 병, 교통사고, 비행기 사고, 재난재해, 범죄, 납치, 묻지 마 살인 등.
그리고 그런 일이 누군가에게 일어났을 경우, 남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했다. 아빠가 먼저 죽고 엄마와 내가 세상에 남을 경우, 엄마가 먼저 죽고 아빠와 내가 세상에 남을 경우, 내가 먼저 죽고 아빠와 엄마가 세상에 남을 경우, 아빠와 엄마가 먼저 죽고 나 혼자 세상에 남을 경우 등.
특히나 내가 해외에 나갈 때가 되면, 우리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만약 그곳에서 내가 납치라도 당해서 몸값을 요구한다면? 아빠는 어떻게든 돈을 마련한다고 했고, 옆에서 그걸 들은 엄마는 나를 포기한다고 했다. 내가 섭섭해 하자 엄마는 말했다.
"하다 하다 별 이야기를 다 하고 앉았네.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만약 누군가 너를 납치했다며 돈을 달라고 하면, 엄마는 그 연락을 받은 시점에 너를 죽었다고 생각할 거야. 그런 놈들은 돈을 줘도 널 죽이고 돈을 안 줘도 널 죽일 놈들이거든. 엄마는 그런 놈들에게 돈과 자식을 전부 갖다 바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혹시라도 네가 납치당한 상황에서 그놈들이 '너는 지금, 네 엄마가 돈을 안 줘서 죽는 거다'라고 말한다면 섭섭해하지 마. 근데 또 만약 그랬다가 네가 안 죽고 돌아오면 땡큐고."
아빠와 나는 조금 꺼림칙했지만, 엄마의 의견으로 합의를 보았다. 나는 납치를 당해 죽어도 부모님은 절대 그들에게 몸값을 주지 않을 것이고, 나는 그 일로 인해 부모님에게 섭섭해하지 않는 걸로.
이 해외 납치 이야기는 우리의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일 뿐이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우리는 꽤나 세세하게 '인생의 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장 많은 대화가 필요했던 주제는 '재난'과 '재해'였다. 태풍, 지진, 화산 폭발, 전염병처럼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 거대한 일이 갑자기 일어났을 경우 말이다. 여기에는 경우의 수가 너무나 많았다.
자동차를 타고 한강 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갑자기 다리가 무너진다면? 부실공사로 인해 바로 눈앞의 50층 건물이 흔들려 무너진다면? 어마어마한 싱크홀에 빠져 수십 미터 아래의 땅 밑으로 떨어진다면? 산이나 바다에서 급작스런 맹수의 습격을 받는다면? 갑자기 온 사방에서 전기가 터진다면?
그러다 보니 재난영화라도 볼 때면 우리는 등장인물만큼이나 실제로 절박해졌다. 우리에게 영화 속 이야기는 더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터널>, <샌 안드레아스>, <괴물>, <해운대>, <인투 더 스톰>, <더테러 라이브>, <부산행>, <감기>, <투모로우>, <에베레스트>, <판도라>, <타워> 등등.
우리는 이런 상황들에 대해 굉장히 심각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일어났을 때의 행동 요령에 대해 여러 가지로 합을 맞추고 준비를 하였다. 우리 집과 자동차에는 늘 비상상황에 대비한 비상 가방과 재난 식량이 있었다. 엄마는 그런 우리를 보고 한숨을 쉬었지만, 우리는 진지했다.
우리는 가능한 모든 상황에 최대한 철저하게 준비했다. 재난 상황이 벌어지면, 가장 중요한 건 물과 식량이라고 판단했다. 생수와 통조림, 초콜릿 등을 너무 무겁지 않게 그러나 충분히 넣어 놓았고, 가벼운 담요와 우비, 손전등, 안경, 라디오, 라이터, 칼, 구급약, 비닐봉지, 마스크와 같은 것들도 함께 넣었다. 실제상황에서는 분명히 현금과 금이 필요한 때가 있으므로 적당량의 현금뭉치도 준비했고, 우리는 평소에 몸에 금반지나 금목걸이 등을 하나라도 착용하고 다니기로 했다.
그런데 사실, 이 모든 준비물보다 더 중요한 건 생존을 위한 체력이었다.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피할 수 있는 상황에서 피할 수 있어야 했다. 피하기 위해서는 달리고, 헤엄치고, 기어오르고, 매달리고, 버티는 능력이 필요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두 번이라도 운동을 하려 했고, 아빠는 소파 옆에 늘 아령을 두었다.
안 그래도 우리는 거의 모든 스포츠 중계를 챙겨 볼 정도로 스포츠 경기를 즐겨 보았는데, 스포츠에 대한 이런 남다른 사랑과 재난 상황에 대한 준비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체육인들은 우리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꼭 국가대표가 아니더라도, 운동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감탄했다.
영화 <샌 안드레아스>의 주인공은 대단한 피지컬을 자랑하는 사람으로, 겉모습만 봐도 "저 정도는 되니까 저 상황에서 살아남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구할 여유도 있는 거지!"라고 생각이 들 정도다.
그 정도까지는 못되더라도, 우리가 긴급 상황에서도 '대인배 놀이'를 하려면 어느 정도의 체력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인배 놀이'란 스스로가 대인배가 되어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보살피면 옆 사람이 훌륭하다고 칭송해주는 것이다. - 작가의 이전 글 <책을 많이 보는 사람은 많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중) 긴급 상황에서는 내 한 몸 챙기기도 급급해서 전부들 이기적인 본능을 드러내기 마련인데, 그런 상황에서 대인배가 되어 다른 사람을 신경 쓸 여유가 있으려면 무조건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할 터였다.
결과적으로 아빠는 암으로 돌아가셨지만, 혼자 남은 나는 여전히 집에 생존 가방을 구비해놓았고, 몸에는 가벼운 금붙이라도 하나 정도는 늘 착용하고 다닌다.
아빠가 하늘나라에 가신 이후에도 새로운 재난 영화가 몇 편 개봉했다. 나는 특히 <엑시트>를 아주 감명 깊게 보았는데, 영화 주인공들은 산악 동아리에서 다져진 어마어마한 체력과 기술을 바탕으로 재난상황을 헤쳐나간다. 이 영화를 보면서 "역시 체력이 있어야 해!"라며 자극도 많이 받았지만, 무엇보다 아빠 생각이 정말 많이 났다. 아마 아빠와 함께 보았다면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일주일은 넘게 했겠지.
'매일 운동하기'를 시작한 지 1년이 되었다.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1도 없던 때, 그러니까 스쿼트를 3개 하고 주저앉았던 때를 생각하면 감개가 무량하다. '산책'과 '요양'의 수준부터 시작했던 나의 운동 능력은 지난 1년 동안 차츰차츰 끌어올려졌다. 지난 11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하며 체력과 근력을 급속도로 성장시키고 있다.
30여 년 만에 안 사실인데, 내 몸은 태생적으로 근육이 잘 붙는 몸이었다. 나를 운동시키는 트레이너는 자꾸만 중량을 늘리고 세트를 추가하면서 신나 한다. 공부고 뭐고 일찌감치 때려치우고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했으면 아마 나라를 구했을 몸이라면서.
이전에는 대체 무슨 재미로 쇳덩이를 들어올리나 싶었는데, 어느 정도 하다 보니 소소한 재미들을 발견해가고 있다. 근육 신경이 깨어나고 근육이 점점 힘을 받기 시작하면서, 어떤 자세로 운동하는 게 더 효과적인지 스스로 깨닫게 되는 과정은 짜릿하다. 같은 기구, 같은 무게여도 내가 어떻게 자세를 잡고 어떻게 힘을 주느냐에 따라 운동의 강도는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운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름의 공부를 하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된다. 흔히 이야기하는 헬린이들이 익숙지 않은 기구를 다루는 모습들도 재미있고, 기구를 맨 손으로 들어 올릴 것만 같은 헬스장 고인물들의 모습은 눈길을 끌었다. 얼마 전부터는 근육 해부학 관련 책들을 보면서 오늘 운동한 내용과 내일 운동할 내용에 대해 한 번씩 훑어보기도 하는 등 조금씩 깊은 운동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가장 흥미로울 때는 운동을 하기 위해 처음 체육관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다. 새로 등록하려는 사람이 눈에 띄면 나는 괜히 그 옆에 있는 러닝머신에 가서 살살 걸으며 그들의 대화를 듣곤 한다. 왜 운동을 하려고 하는지, 운동을 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다른 곳에서 열심히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온 경우는 괜히 환영하게 되었고,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 이제라도 운동을 해야겠다면서 "너무 늦었을까요?"라고 질문하는 모습에는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단순히 운동을 등록하는 사람들 외에, 따로 PT를 등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20~30대의 여성들이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살 빼려고요." 좀 더 지켜보아야겠지만, 아직까지는 다른 이유를 들어보지 못했다. 트레이너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여름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앞으로 점점 그런 사람들이 더 많아질 거라고 했다. 여름이 다가올수록 40~50대도 PT를 많이 신청한다고.
내가 운동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PT 받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체육관에서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PT의 목적은 남자든 여자든, 젊은 사람이든 나이 든 사람이든, 대부분 다이어트가 목적이기 때문에 트레이너들은 늘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물어보고, 운동 루틴에는 버피테스트나 인터벌 트레이닝과 같은 고강도의 유산소 운동을 항상 포함시킨다. 그래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너무나 고통스러워하고, 그렇게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길어야 2달 정도 PT를 받고 그만두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나마도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이 많다는 건 함정.)
나는 애당초 살 빼려는 게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트레이너에게 식단관리를 맡기지 않았다. 트레이너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마음의 건강은 내가 어떻게든 해볼테니, 당신은 나의 체력을 끌어올려 주세요!"라고 말했다. 나를 쳐다보던 그의 흔들리던 눈빛이 지금도 생생하다.
현재, 트레이너는 평소의 내가 대체 어떻게 먹는지 늘 궁금해하면서도, 나의 폭발적인 체력 성장에 함께 흥분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인바디를 재는 날이 다가올 때면 트레이너는 설렘 가득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이번엔 또 얼마나 근육량이 늘었으려나."
그 설렘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서 장단을 맞춰주지만, 사실 나는 인바디에는 큰 관심이 없다. 굳이 인바디를 재지 않아도, 나는 향상된 체력을 이미 스스로 느낀다. 11월과 비교해서 12월에, 12월과 비교해서 1월에, 1월과 비교해서 2월에 나는 몹시 건강해졌다. 기구들에 중량과 횟수를 추가할 때, 러닝머신을 뛰는 시간과 속도를 올릴 때, 운동을 하며 하나하나의 근육들에 힘을 불어넣을 때, 나는 나의 건강함에 환호한다.
지금 다니는 체육관에서는 여성 중에 유일하게 나만 '체력 향상'을 위해서 운동하고 있다. 남성 회원 중에서도 딱 1명 있다. 그 분과 나는 PT가 있든 없든 매일 같은 시간에 체육관에서 마주치는데, 서로 대화를 하지는 않지만, 각자 힘을 쓰고 땀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자극을 받는다. 나도 처음보다 체력이 많이 올랐지만, 그분도 내가 처음 봤을 때보다 체력이 많이 올랐다.
그렇게 체육관에 4달째 다니고 있다. 트레이너와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하면서 운동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최근에는 트레이너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대체 체력을 어디까지 키우고 싶은 거예요?" 나는 빵 터져서 한참을 웃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혹시 영화 <엑시트> 보셨어요? 거기 주인공 두 명이 진짜 계속 미친 듯이 달리고, 미친 듯이 기어오르거든요. 특히 남자 주인공은 배우 자체의 체력이 대단해서, 영화 초반에 동네 놀이터에서 철봉 하는 장면은 완전 미친 장면이죠. 아무튼, 영화는 영화니까 아무래도 그렇게까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만약 재난상황이 일어났을 때, 그러니까 눈 앞에서 땅이 갈라진다거나, 고층 건물이 무너진다거나 하는 상황이 일어났을 때, 그저 무력하게 당하고 싶지는 않아요. 죽을 때 죽더라도 '휴, 이만하면 그래도 최선을 다했네'라는 생각이 들만큼 용을 쓸 수 있는 정도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생존 체력이요."
코로나19 때문에 운동을 홈트레이닝으로 전환했다. 그동안 계속 생존을 위해 운동해왔다면, 이제는 운동하기 위해 생존해야 하는 시국이 되었다.
나는 집에서 아빠가 들던 아령을 들고 스쿼트를 하고, 스텝퍼를 밟는다. 이미 체력이 꽤 많이 끌어올려진 상태이기 때문에, 사실 이 정도 운동은 성에 차지 않는다. 조금 더 무거운 쇳덩이를 끼우고, 바를 들어 올리고, 속도를 높여 달리고 싶다.
숨이 헉헉 차고 땀이 줄줄 흘러야 하는데, 웬만큼 운동해도 몸이 너무 차분하니 '이래도 되나' 싶다. 처음 하기로 했던 운동량을 다 채워도 모자란 기분이 들어, 추가로 횟수를 늘리고 세트를 추가하는데, 사실 그래도 좀 아쉬워서 괜히 마음이 조급해지는 기분까지 든다. 그래서 그동안 안 했던 요가를 조금씩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다.
때마침 친구가 요가 바지를 선물해주었다. 나의 인생 타이밍은 이토록 놀랍다. 14년을 알고 지내온 친구가 하필 지금 이 타이밍에 나에게 요가 바지를 선물해주다니!
심지어 내가 너무나 원했던 바지였다. 대부분의 요가 바지는 그냥 레깅스 종류이거나 아니면 통바지인데, 레깅스는 너무나 레깅스고, 대부분의 통바지는 발목 부분이 너풀너풀거려서 몸을 뒤집거나 거꾸로 세우는 동작에서는 너무나 불편하다. 그런데 친구가 선물해 준 바지는 충분히 통이 넓은 바지이면서 발목은 조여주는, 심지어 아주 부드럽고 스타일리시해서 평상복으로 입고 돌아다니면 패션피플이 되는 느낌의 바지다.
이 옷을 입고 오랜만에 요가를 본격적으로 하면서, 나는 왠지 대단한 요기(yogi)가 된 것 같은 긍지를 느꼈다.
무엇보다 동작 하나하나가 몇 달 전과 비교해 꽤나 수월하게, 그리고 진정성 있게 이루어짐을 느끼게 되었다. 쇳덩이를 들어 올리는 동안 몸의 근육들이 깨어나며 근력이 향상된 것과, 더불어 웨이트를 할 때 스트레칭을 정성껏 했던 것 또한 내 요가 생활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처음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했을 때 온몸의 근육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겪었기에, 나는 그 이후로 운동 전후로 스트레칭을 상당히 꼼꼼하게 하는 버릇이 생겼다.)
아무튼 요가는 평생을 걸쳐 이루어 갈 나의 수양이라면, 생존 체력을 위해서는 쇳덩이를 들어 올리고 내달려야 한다. 지금 나의 체력 성장 그래프는 꽤나 탄력을 받은 상태이므로, 이 타이밍을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시국이 어수선하니 마음이 어수선해진다. 물론, 이 코로나 사태 또한 재난 상황이니 여기서도 나는 생존해야 한다. 이것 또한 극복해내야 할 상황임에 틀림없다. 이 위기 상황에서, 나는 누구보다 생존을 열망한다.
제발 이 사태가 빨리 진정되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