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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Jan 10. 2020

책을 많이 보는 사람은
많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 나는 세상의 모든 글을 읽기 시작했다.


  초등학생 때는 하루하루 책 읽는 속도가 빨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독서’라는 표현보다는 ‘읽어치운다’는 표현이 적절할 만큼. 

  교내 작은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어치우자, 아빠가 나를 데리고 집 앞 도서대여점에 갔다. 그때는 동네에 도서대여점이 있어서 500원을 내면 책 한 권을 일주일(만화책은 300원에 3일) 동안 빌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책을 빌려와도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아 다 읽어버리니, 다시 그 도서대여점에 가서 책을 반납하고 다른 책을 빌려오기를 하루에도 수차례 반복할 때가 많았다. 


  어느 날 아빠는 큰 결심을 한 듯, 나를 데리고 중고 헌책방에 갔다. 10평 남짓한 그 헌책방은 책꽂이도 제대로 없이 책이 천장에 닿도록 쌓여있었는데, 내 눈이 휘둥그레진 것을 본 아빠는 나에게 말했다.

  “보고 싶은 책 다 골라봐. 아빠가 다 사줄게.” 


  나는 정신없이 책을 골랐다. 손이 안 닿는 곳은 책방 아저씨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책을 꺼내 주었는데, 그 와중에 신중하게 책을 고르고 또 골랐다. 어린 내가 혼자 들 수 없을 만큼 책을 골랐으니 아마 20~30권쯤 되었을 것이다. 책방 아저씨는 내가 고른 책들을 빨간 노끈으로 묶어주며 아빠에게 들려주었고, 아빠는 만 원짜리 몇 장을 책방 아저씨에게 건넸다. 나는 신이 나서 아빠 손을 잡았다. 아빠는 한 손으로 내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그 무거운 책 보따리를 들고 집에 왔다.


  문제는 내가 그 책들을 일주일도 안 되어 다 읽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자 아빠는 그 책들을 다시 빨간 노끈으로 묶고, 한 손은 책 보따리를, 한 손은 내 손을 잡고 다시 그 헌책방에 갔다. 그리고는 가져온 책을 책방 아저씨에게 넘겨주면서 나에게 말했다.

  “보고 싶은 책 또 골라봐. 아빠가 또 다 사줄 니까.” 

  조금 전에 가져온 책을 되팔고, 새로운 책을 가져가는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내가 책을 읽어치우는 걸 보고 감당이 안 된 부모님이 한참 동안 머리를 굴려 고안해 낸 방법이었다. 초기 비용이 좀 들더라도, 그게 낫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또 몇 번을 반복했는지. 매주 토요일마다 헌책방에 가서 책을 무더기로 가져왔다. 그러다 보니 어린이 책만 읽은 게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모든 책을 다 읽었다. 그중에는 바둑, 낚시, 경제잡지 같은 것들도 있었는데, 무슨 내용인지 알고 읽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10살 무렵의 어린아이가 셰익스피어, 빅토르 위고,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치웠다. 그 헌책방에 더 이상 볼 책이 없어질 무렵, 책방 아저씨가 나에게 말했다. 

  “너는 분명 좋은 사람이 될 거야. 돈 많이 벌고 성공한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살피는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책을 많이 보는 사람은 많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거든.”




  그때 그렇게 읽은 책 덕분에 나의 학창 시절은 꽤 수월했다. 

  초등학교 때는 매일 일기를 써서 제출해야 했는데, 다른 친구들이 일기에 쓸 내용이 없어 같은 내용('오늘은 날씨가 좋았다', '오늘은 엄마가 오므라이스를 해주었다' 같은 내용들)만 반복할 때, 나는 책 읽은 이야기를 쓰느라 일기가 차고 넘쳤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국어 교과서에 내가 읽은 책이 여러 번 나왔고, 심지어 시험 문제로도 나왔다.

  대학 입시를 위해 다들 부랴부랴 논술학원을 다닐 때, 나는 친구들이 학원에서 받아온 논술 기출문제만 대충 훑어봐도 다 알만한 내용이어서 논술 공부를 하는 대신 내가 부족한 다른 부분(수학이라든지...)을 더 공부할 수 있었다. 대학교에서도 과제를 하거나 리포트를 써낼 때도 그때 읽었던 책이 도움이 되었던 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사실, 어렸을 때 읽어둔 책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때 읽었던 책들이 전부 다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글자들을 머릿속에 집어넣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그 책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이었는지, 인상 깊었던 구절은 어떤 구절이었는지 줄줄이 나열할 수는 없다. 

  하마터면 책을 지식을 얻기 위한 도구로만 여길 뻔도 했으나(그 당시의 나는 그걸 분별하지 못할 만큼 매우 어렸으니까), 다행히 내 옆에는 좋은 어른들이 있었다. 책을 읽는 사람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어른들, 그리고 나와 같이 책을 읽어주는 어른들. 책방 아저씨의 말대로, 나는 책을 읽으며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다. 아빠와 함께 책을 읽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각자의 다름을 최대한 이해하려 했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고 책을 읽은 셈이다. 그 책들은 나의 마음에 저장되었다. 그 수많은 책들은 나의 마음에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퇴계에게 공부법을 배우다>는 책에 보면 퇴계 이황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공부를 하고도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른다면 그건 공부를 제대로 한 것이 아니네.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도 세워주고, 자기가 알고 싶으면 남도 깨우쳐주는 것. 그것이 바로 인의 마음, 사랑의 마음, 공부한 자의 마음일세."

  

  아빠와 나는 대인배 놀이를 즐겨하곤 했다. 소인배(小人輩) 놀이가 아닌 대인배(大人輩) 놀이. 이 놀이는 스스로가 대인배가 되어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보살피면 옆 사람이 훌륭하다고 칭송해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면 아빠는 "오! 역시 책을 읽은 사람이라 그런지 대인배답네!"라고 말해주었고, 아빠가 앞에서 문을 잡아주고 서 있으면 나는 "오! 역시 공부를 한 분이라 이렇게 아량이 넓으시군요!"라고 말해주는 식이었다.  

  이 대인배 놀이는 생활 속의 많은 분야에서 무궁무진하게 할 수 있는데, 혼자서도 가능하다. 특히 운전할 때 효과가 좋다. 갑자기 끼어드는 차량에 '난 대인배니까'라고 하며 여유 있게 양보를 해준다든지, 눈 앞에 사람이 지나가면 아무리 천천히 걷는 사람이어도  '저, 배운 사람입니다' 미소를 지으며 기다려준다든지 등등. 


  책을 읽다 보면, 수많은 세계와 만나게 된다.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들. 책이 아니었다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세계들. 그 세계가 내 시야를 트이게 하고, 내 지경을 넓힌다. 

 책 안에서 상황을 그리고, 사람들을 이해한다. 각 등장인물들의 사정과 입장들, 그리고 글쓴이의 의도와 마음까지도. 각자의 상황과 생각들이 너무나 달라서 차이가 도저히 좁혀질 것 같지 않은데도, '사람'과 '사랑'이라는 변하지 않는 가치들로 인해 어느 순간 조화를 이루는 걸 목격하면 마음이 차오른다. 


  따라서 책을 읽는 사람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자신의 고집을 간직한 채 책을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책을 읽는 사람은 소인배가 될 수가 없다. 


  나에게 책을 읽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려준 책방 아저씨의 사랑과 나와 함께 책을 읽어준 아빠의 사랑 덕분에 나는 하루에 한 페이지라도 책을 읽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공부를 하려고 책을 읽는 것이 아니므로, 모든 내용을 기억하거나 외우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밑줄은 치지만, 지식을 쌓기 위함이 아니다. 모든 것은 나의 감동과 마음의 풍요로움을 위함이다. 

  이제는 한 권의 책을 세심하게 읽는다. 읽는 동안, 마음이 유독 동하는 한 구절을 만나면 머물러 며칠을 지내기도 한다. 글자 몇 개가 나열되었을 뿐이지만, 그 글을 쓴 이의 마음을 살피다 보면 내 마음이 차오른다. 그렇게 글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  


  책이 있는 곳에 가면 마음이 차오른다. 이 마음의 양식들이 내 마음을 차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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