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라는 단어와 '사랑'이라는 단어가 비슷하게 생긴 건 과연 우연일까. 사람이 사랑을 바탕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닐까. 사람을 찾는 일이 사랑을 찾는 일이라서 그런 건 아닐까. 사람은 본능적으로 사랑을 원하고, 사랑을 받을 때 가장 빛나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닐까.
블랙독 증후군(black dog syndrome)이라는 말이 있단다. 검은색을 가진 개의 입양을 기피하는 현상으로, 통상 검은 털의 개는 흰 털을 가진 개에 비해 입양이 어려운 상황을 반영하는 용어라고 한다. 영어 사전에도 블랙독(black dog)이라는 단어가 ‘우울증’, ‘낙담’이라는 부정적 뜻으로 풀이돼 있는 걸 보면, 그동안 검은색의 강아지들이 겪었을 고초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최근 tvN에서 방영 중인 <블랙독>이란 드라마는 고등학교 기간제 교사가 된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주인공은 어렸을 때 애견센터에서 검은색 강아지를 만났다. 그 강아지를 보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검정 강아지 키우는 거 아녀. 재수가 없어. 그것들은 태생부터 그렇당께." 사람들이 기피하는 그 검은색 강아지는 인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꼬리를 흔들며 눈을 반짝였다. 혹시 누가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지는 않을까 하며.
주인공은 (본인의 의도와는 달리) 낙하산으로 교사가 된 것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바로 이 블랙독이 된다.
블랙독이 겪는 괴로움은 외로움이다. 누구도 그를 일부러 괴롭히지는 않지만, 아무도 그를 가까이하지 않는다.
단적인 예로, 블랙독이 된 주인공은 혼자 밥을 먹는다. 삼삼오오 모여 밥을 먹는 학교 식당에서 블랙독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혼자 밥을 먹는다. 아무도 그와 함께 밥을 먹어주지 않는다. 조금 기다렸다가 같이 먹으러 갈 수도 있고, 아니면 시간을 정해 몇 시에 식당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할 수도 있는 일인데,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에게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말하지 않는다.
관심받고 싶으나, 들이대지 못하는 이 블랙독은 그저 잠자코 기다릴 뿐이다. 밥 먹는 게 뭐라고, 그깟게 대체 뭐라고, 블랙독은 누구에게도 밥 좀 같이 먹어달라는 말을 먼저 꺼내지 못한다.
처음 마주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밀려드는 일들을 정리해나가는 것은 비록 힘들고 정신없는 일이긴 하지만, 블랙독은 성실하게 노력하며 하나씩 해결해나간다. 그럴 때 시간은 날아가듯 빨리 지나간다. 바쁘고 정신없지만, 적어도 괴로움은 아니다.
그런데 밥 먹는 시간은 다르다. 밥 먹는 시간은 아주 천천히 느리게 흐른다. 하루 중에 유일하게 허락된 여유로운 시간이지만, 블랙독에게는 이 시간이 그 어떤 시간보다 괴롭다. 외롭기 때문이다. 외로움이라는 이 원초적인 괴로움은 혼자서는 도저히 해결할 길이 없다.
드라마를 보면서 주인공이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나는 가슴이 아렸다. 밥 좀 같이 먹어주지. 일을 대신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돈을 빌려달라는 것도 아닌데. 밥 먹으면서 무슨 대단한 대화를 하자는 게 아니잖아. 그냥 옆에 앉아 밥이나 좀 먹어주지.
그러고 보면 밥이란 것은 참 치사한 것이다. 집에서 혼자 차려먹는 밥이야,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그만이지만, 군중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고독하게 먹어야 하는 밥이 그렇다. 사람을 멀리하는 많고 많은 방법 중에 '밥'이라니. 말을 하지 않는 것,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 같이 걷지 않는 것까지 다 견딜 만 한데, 밥을 같이 먹지 않는 것은 참 치사하고 괴롭다.
'밥'은 생각할수록 묘한 구석이 있다.
요즘 세상에 밥 한 끼 굶는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밥 먹어야지' 혹은 '밥 한 번 먹자'라는 말을 밥먹듯이 한다. 우리 사회에서 '밥'은 그저 '밥'이 아니다. 우리는 더 이상 먹고 배부르기 위해 밥을 먹지 않는다. (배가 고파 어떤 음식이든 허겁지겁 먹는 건 예외겠지만.)
결국 같이 밥을 먹는다는 건 단순히 배를 불리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사람과의 만남, 친밀함의 나눔, 관심과 사랑의 표현.
'밥 한 번 먹자'라는 말에는 '내가 너를 보고 싶은데, 나를 만나주겠니?'라는 의미가 담겨있고, '어서 와, 밥 먹자'라는 말에는 '우리 조금 더 가깝게 지내보자!'라는 의미가, '밥 다 됐어, 얼른 와, 밥 먹자'라는 말에는 '내가 너를 이렇게나 생각했단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한 달에 한 두어 번, 고모를 만난다. 무슨 일이 있어서 만나기도 하고, 없어도 만나기도 한다. 주로 내가 고모 댁에 찾아간다. 가기 하루 이틀 전에 전화해서 "고모, 밥 먹을까요?"라고 하면 고모는 들뜬 목소리로 "그래, 와. 밥 먹자!"라고 한다.
밥을 먹으러 가면 밥상에는 어김없이 윤기가 좔좔 흐르는 밥과, 새로 보글보글 끓인 찌개를 중심으로 불고기, 전, 잡채, 새우구이 등이 올라와 있다. 심지어 김치도 새로 담근 김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것이 밥상에 담겨 있다. 고모는 나를 생각하며 장을 보고, 그 무거운 걸 짊어지고 집에 와서 하루 종일 재료를 손질했을 것이다. 새벽엔 아마 누구보다 일찍 일어났겠지.
우리는 밥을 먹으며 딱히 뭐 이렇다 할 대화를 하지는 않는다. 70세가 넘은 고모랑 이제 겨우 30대 중반인 내가 무슨 대단한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기껏 '마트에서 새로 나온 행주가 좋더라'하는 이야기나 할 뿐. 다만, 나는 열심히 먹는다. 최선을 다해 먹고, 맛있게 먹는다. 그러면 고모는 "이것도 좀 먹어봐"하며 반찬 그릇을 내 앞으로 바짝 밀어놓는다.
밥을 다 먹으면 나는 집에 돌아오는데, 고모는 온갖 것들을 또 싸서 손에 들려준다. 사과 2개, 귤 5개, 두유 4팩, 수면양말 2켤레, 새로 산 행주 3개 같은 것들.
나는 우리 집에 먹을 게 없어서 고모집에 가서 밥을 먹은 것이 아니다. 나는 정기적으로 장을 보기 때문에 우리 집 냉장고에는 늘 먹을 것이 있다. 그럼에도 내가 고모집에 가서 밥을 먹는 건 '제가 고모를 늘 생각하고 있답니다'라는 표현이다. 고모가 "밥 먹으러 언제 올래?"라고 하는 게 '어서 내 사랑을 받으러 오렴'의 표현이듯.
삶에서 정작 중요한 것들은 말로 표현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나 많은 것들이 '같이 밥 먹는 것'으로 표현된다. 굳이 '내가 너를 이토록이나 생각하고 있단다'라고 말로 하지 않아도, '내가 너를 이렇게나 아껴', '내가 너를 사랑해'라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같이 밥을 같이 먹음으로 그 모든 것이 표현되고, 받아들여진다.
집에 와서 사과 2개와 귤 5개, 두유 4팩을 냉장고에 넣고, 수면양말 2켤레, 행주 3개를 가지런히 접어 서랍장에 넣었다. 우리 집 냉장고와 서랍장에는 고모의 사랑이 들어차 있다.
하루 이틀쯤 있다가 고모한테 전화해서 "고모, 그때 주신 그 행주 정말 좋더라고요!"라고 말하면 고모는 이렇게 말하겠지. "그치! 그거 정말 좋지! 근데 밥 먹으러 언제 올 거야?"
인생은 결국 혼자 살아내는 것이고 모든 사람은 각자도생하고 있다지만, 그럼에도 사람은 사랑을 바탕으로 존재한다.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을 만큼 으리으리한 사랑이 아니어도 된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세상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느낌이 들 때, 같이 밥 먹어줄 수 있는 한 사람 정도면 충분하다. 그 한 사람만 있어도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느낌만으로 사람은 마침내 '사람'으로써 존재할 수 있는 것 같다.
드라마 <블랙독>에는 주인공이 밥을 먹는 장면이 매회 나온다. 밥을 먹는 장면을 통해 블랙독이 다른 사람과 긴밀히 연결되어가고 사랑받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이지 싶다. 6회에서 소원을 말해보라는 주위 교사들의 제안에, 주인공은 드디어 자신의 '사람됨'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밥... 같이 먹고 싶습니다!"
그렇게 같이 밥 먹으러 간 장면에서는 블랙독이 웃는다. 고작 돼지껍데기를 먹는 장면이었지만, 블랙독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다.
앞으로 진행되는 스토리에서, 주인공이 다른 사람과 당연하게 밥을 먹게 되었으면 좋겠다.
더 이상 혼자 밥 먹을 걱정에 이어폰을 챙기지 않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