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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Jan 16. 2020

듣기 좋게 말해주세요.
돈 드는 일도 아니잖아요.

또 명절이 다가오고 있다

 

  평생에 걸쳐 배워나가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말하는 법'인 것 같다.


  듣기 좋게 말하기.


  같은 말이라도 듣기 좋게 말하는 것, 듣기 싫은 말은 가능한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 이건 여러 경험을 하며 하나씩 겪어나가야 배울 수 있다. 나도 모르게 흘러나와버린 말들, 실수였지만 돌이키지 못한 말들, 찾아가서 사과하자니 그건 또 너무 오지랖인 것 같은 말들을 직접 해보며 반성해야 한다.

  당연히 그 시간은 쓰라림의 시간이다. 자려고 누웠다가 이불을 걷어차고 찝찝한 상태로 며칠을 보내도 보고, 끙끙 앓으며 수많은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난 살면서 웬만해선 후회라는 걸 하지 않는 편인데, 그런 말이 한 번씩 툭 튀어나오면 아주 후회하며 몹시 괴로운 시간을 보낸다. '그 말 왜 나왔지'부터 시작해서 '입 다물고 있을걸', '순간 완전 이상한 사람되었네' 하는 생각이 계속 든다. 그러다가 '그 말을 좀 더 좋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라는 생각에 이르면, 혼자 이런저런 시뮬레이션을 돌려본다. 그러면서 나는 나름의 공식을 하나씩 구축해 나가고 있다.  


  세상에는 최대한 듣기 좋게 말하는 많은 어법이 존재한다.

  좋은 말을 들었을 때, "아니에요", "이게 뭐라고요."라고 말하기보다는 "당신 덕분입니다.", "네가 잘해주니까 내가 잘할 수 있었지."라고 말하는 게 듣기 좋다. 물론 내가 잘해서 그런 거였겠지만, 적어도 말이라도, 스스로 뽐내지 않고 그 공을 상대방에게 돌리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리 전투적인 말투의 사람도(또는 시시콜콜 트집을 잡으려고 하는 사람도) 더 이상 싸우자고 덤비지 않는다.

  거절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일단 '정말 미안하지만'을 붙이고 시작한다. 그냥 '미안하지만'이 아니라, '정말 미안하지만'. 부탁이나 제안을 한 사람은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어쩌면 고심 끝에 힘겹게 나에게 말했을테니 그 마음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의미다. 무작정 '안된다'고 하거나 핑계를 줄줄 읊어대기 전에 '정말 미안하지만'을 붙이면 한결 부드러워진다. "정말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안 되겠어요." 혹은 "정말 미안하지만, 제가 스케줄 빼기가 어렵네요"라든지.

  내가 대화를 주도해야 하는 상황, 내가 먼저 말을 꺼내는 상황에서 나는 '혹시'라는 공식을 종종 사용한다. "혹시 이것 좀 해주실 수 있나요?" 여기에 '괜찮으시다면'을 더하면 조금 더 듣기 좋아진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다음 주부터 진행해도 될까요?"처럼.


  이렇게 하나씩 공식을 만들어 나가다 보면, 서로서로 기분 상하지 않고 일을 도모해나갈 수 있다. 아무튼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 나는 우선 사람의 마음을 잡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하는 것과, 기분이 나쁜 상태에서 하는 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 잘못해서 상대의 마음을 잃고, 될 일도 안 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기분이라는 것은 말 한마디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라, 듣기 좋게 말할 수 있으면 나와 상대방의 기분을 좌우할 수 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하지 않던가.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도 하지 않던가. 돈 드는 일도 아니고, 엄청난 체력이 요구되는 일도 아니다. 말 한마디일 뿐.

 

 

  '듣기 좋게 말하는 능력'은 타고난 성향과 가족 분위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긴 하지만, 그 이후에는 본인이 생각하고 노력하는 만큼 능력치를 끌어올릴 수 있다.

  사실, 나이가 들수록 무언가를 말할 때 한 번 더 생각하는 것은 꽤 수고로운 일이다. 어린아이들처럼 뇌 활동이 활발하지 못한 데다가, 그게 아니더라도 사회생활이며 집안일이며 신경 써야 할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할 때 공식이 필요하다. 이럴 때는 이렇게, 저럴 때는 저렇게.


  물론 모든 상황에 공식을 만들어 적용하기는 무리가 있겠지만, 그래도 세상을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더 많은 상황을 만나고, 더 많은 사람을 마주하면서 말의 공식은 하나씩 늘어가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서로 기분 상하지 않고 대화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연구하는 넓이가 넓어진다는 말이다. 나는 이것이 연륜이라고 생각한다.

  어른이 멋있을 때는 이 연륜이 번뜩일 때이다. 직장에서든 동네에서든, 누가 봐도 큰 싸움 날 상황에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종료해버릴 때는 멋짐이 폭발한다. 그렇게 대단한 기술도 아니다. 일단 '사장님'이라고 호칭을 불러준다. "사장님, 지난번에 보니까 그 일 정말 훌륭하게 처리하셨던데요! 제가 많이 배웠습니다. 이번에는 이렇게 해주시면 어떨까요? 사장님이 해주신다고만 하면 다들 적극 협조할 겁니다."




  말하는 법에 대해 삶 속에서 나름의 연구를 하다 보니, 가장 어려운 대화는 '닫힌 질문'으로만 가득할 때인 것 같다. 정답이 하나뿐인 질문. 질문 속에 이미 답이 포함되어 있으며, 우리를 강제하고 강요하는 질문들. 명절 때 흔히 하는 질문들이 이에 속한다. '언제 취직할 거냐', '다이어트는 포기한 거냐', '결혼은 왜 안 하냐', '연봉은 얼마냐', '아이 계획은 세웠느냐' 등등.

  이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대처방법이 나와있다. 썩은 미소로 흘려듣기, 아니면 그냥 명절에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 지내기와 같은 회피적인 방법이 있는가하면, 얼마 전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김영민 교수가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칼럼에서 제시한 방법은 폭발적인 반응을 불 일으키기도 했다.


 따라서 “그런 질문은 집어치워 주시죠”라는 시선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친척이 명절을 핑계로 집요하게 당신의 인생에 대해 캐물어 온다면, 그들이 평소에 직면하지 않았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게 좋다.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라고 물으면, “곧 하겠죠, 뭐”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당숙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추석 때라서 일부러 물어보는 거란다”라고 하거든, “추석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엄마가 “너 대체 결혼할 거니 말 거니”라고 물으면, “결혼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거기에 대해 “얘가 미쳤나”라고 말하면, “제정신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아버지가 “손주라도 한 명 안겨다오”라고 하거든 “후손이란 무엇인가”. “늘그막에 외로워서 그런단다”라고 하거든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가족끼리 이런 이야기도 못하니”라고 하거든 “가족이란 무엇인가”.


  아주 유쾌하고 통쾌한 방법이지만, 실생활에서 써보기엔 무리가 있지 싶다. 나이스 하지는 않으니까. "그런 걸 왜 물으시죠?"라거나, "그러는 삼촌은요?"라고 되묻는 방법 또한 너무 사나운 느낌이다. 그렇다고 그냥 참고 넘기자니 내 기분이 너무 상하고.

 

  따지고 보면, 이 문제는 이런 질문들을 하는 어르신들의 문제다. 이런 닫힌 질문들만 하는 사람들. 기준을 세워놓고 그 기준에 맞춰 살아가기를 강요하는 사람들. 개인의 취향과 선택은 무시한 채 자신의 잣대에 어긋나는 것은 '틀려먹었다'라고 판단해버리는 사람들.


  지난 명절에 고모댁에 가서 밥을 먹었다. 밥을 먹다 말고 고모부가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하셨다.

  "좋은 사람을 만나. 돈 많은 사람 말고, 착해서 좋은 사람을 만나. 돈은 아무것도 아니야."

  순간 오장육부가 깨끗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거지! 그래, 이거지.


  고모부는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수많은 말을 삼키고 삼켰을까. 다른 사람들이 쉽게 내뱉는 '결혼 언제 할 거냐', '어쩌려고 그러냐' 같은 말들을 거르고 또 걸러 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그 수많은 문장의 말들을 마음속으로 고치고 또 고쳤겠지. 이 말을 토해내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을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이게 연륜이다. 나보다 오랜 시간을 산 사람의 연륜.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지 않고 상대방의 선택을 최대한으로 존중하되, 사람이라면 응당 지녀야 할 기본적인 가치관을 상기시키면서, 은근슬쩍 축복해주는 뉘앙스까지 풍기는 한 문장. "좋은 사람을 만나."


  설이 또 다가오고 있다.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명절에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절망한다. 오랜만에 친척들을 만나면 반갑고 즐거워야 하는데, 왜 우리는 긴장부터 해야 하는 걸까. 대체 무엇을 그리 잘못했기에. 대체 무슨 인생을 얼마나 잘못 살았기에.

 

  모두들 잘못하지 않았다. 이만하면 잘 살았고,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다. 그때 한 선택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러니 그런 기분 상하는 말을 들을 이유는 없다.

  잘못은 그 어르신들이 하는 것이다. 그 수십 년의 시간을 살아오는 동안, 지혜롭고 현명하게 말하는 방법에 대해 최소한의 고민도, 노력도 하지 않은 그 어르신들의 잘못이다. 그러니 부디, 움츠러들지 않았으면.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대화를 한다. 비즈니스든, 사교활동이든 우리는 말을 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흘러 그때의 만남을 떠올려보면 결국 남는 건 말의 내용이 아닌 그 날의 분위기, 즉 나의 기분이다. 그날 그 사람을 만나 내 기분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대화를 나누었는지 기억나는 건 특별한 경우다. 결론이 도출된 대화였거나, 아니면 아주 인상 깊었거나. 물론 그런 경우에도 나의 기분은 남는다.


  대화라는 것은 참 신비로워서, 오랜만에 만난 사이에 그동안 쌓인 할 말이 더 많을 것 같지만, 사실 매일 보는 사이일 수록 할 말이 더 많다. 아침에 달걀프라이를 했는데 아주 동그랗게 잘 구워져서 기분이 좋았다는 류의 이야기를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는 결과만 말하게 된다. '취직을 했다', '진급을 했다'. 또는 정보 전달의 대화가 주로 이루어진다. '곧 결혼을 한다', '몇 달 후에 둘째를 낳는다'. 그런 대화는 자꾸 뚝뚝 끊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느낌이다. 그런 대화를 하고 나면 나는 괜히 지친다. 별로 재미가 없다.


  대화의 즐거움은 그런 데서 오지 않는다. 대화가 즐거울 때는 사소한 일상을 공유할 때인 것 같다. 어제 처음으로 시도한 베이킹이 대성공이었다든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장에 들렀더니 브로콜리 2개를 천 원에 팔길래 냉큼 사 왔다든지와 같은 그런 사소한 이야기들. 시간이 지나면 기억도 나지 않을 그런 내용의 이야기들 말이다. 


  오랜만에 만난 사이에는 그런 말들을 하지 못한다. 서로의 근황이나 정보나 캐묻다 보니 서로 불편한 사이가 되어간다. 어쩌면 다들 할 말이 없어 그런 시답잖은 말들을 내뱉고 서로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기껏 오랜만에 만나 할 말이 고작 그런 것뿐이라서 슬프다. 일 년에 한두 번 만나 꼭 그렇게 기분 상하는 말만 골라해야 하나. 그런 말은 서로의 기분만 상할 뿐이라는 걸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건가. 그런 것 말고 다른 이야기 좀 하면 안 되나. 할 말이 그렇게 없나.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나 친척을 만나면 어색하고 할 말이 없는 건 우리만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필립 스탁이라는 디자이너는 '주시 살리프(Juicy Salif)'라는 이름의 오징어 모양의 레몬즙 짜는 기구를 디자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 번은 레스토랑에서 오징어 모양의 레몬즙 짜는 기구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그 진짜 목적은 수천 개의 레몬을 짜는 것이 아니라 막 결혼한 신랑에게 장모와의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주시 살리프(Juicy Salif)'(오징어 모양의 레몬즙 짜는 기구) by 필립 스탁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이거지! 그래, 이거지.

  이 사람의 연륜은 이런 것이었다. 친숙하지 않은 관계에 사소한 이야깃거리를 먼저 제공하여, 서로의 즐거움을 도모하는 것. 아마 그 사위는 이 기구를 들고 가 호들갑을 떨며 장모님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장모님! 제가 이번에 어느 도시를 다녀왔는데, 거기에서 이런 걸 발견했지 뭡니까! 이게 뭔지 아시겠어요? 이게 글쎄! 레몬즙을 짜는 기구랍니다! 근데 이게 또 오징어처럼 생겨가지고, 근데 또 정작 다리는 3개밖에 없어요. 웃기죠? 하하하 아무튼 이걸로 레몬즙을 짜면 기가 막히다네요. 오징어 위에 레몬을 끼얹듯이, 아니, 이러지 말고, 장모님, 레몬 있나요? 냉장고에요? 이것 좀 잡고 계셔보세요. 이게 글쎄 된다니까요!"


  이게 바로 이 디자이너가 그린 큰 그림이었을 것이다. 이 작은 기구 하나로 서로의 사소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함께 레몬즙을 짜며 깔깔대며 웃는 것. 시간이 한참 지나고 그 날을 추억할 때 이 기구를 정확히 기억할지는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서로가 함께 기분 좋게 웃으며 대화했던 것만은 기억할 것이다. "그 날 참 재밌었어. 뭐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우리 그날 엄청 웃었던 것 같아." 정도면 충분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 어르신이 지혜롭고 현명한 분이셔서 아름답게 말하는 분이면 너무나 좋겠지만(아니면 아예 조용히 계시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이런 식의 사소한 이야깃거리를 먼저 제시하는 방법도 좋은 것 같다. 아무튼 그 어르신은 뭐라도 말을 걸며 좀 친해지고 싶어 하는 것인데 방법을 몰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을 테니.


 마트를 한 번 둘러봐야겠다. 뭔가 참신하고 이상야릇한 것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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