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영정사진 앞에 국화꽃 한 송이를 올려놓고 잠시 눈을 감자, 많은 것들이 눈 앞에 지나갔다.
우리 아빠와 같은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선배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나의 지난 시간들이 마치 오늘 일처럼 생생해졌다. 선배의 얼굴은 딱히 비통해 보이지는 않았다. 선배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게 어떤 기분인지 너무나 잘 알기에, 섣불리 위로할 수 없었다. 얼마 후면 슬픔과 그리움이 폭풍처럼 밀려오는 때가 있을 거라고 차마 말해줄 수 없었다. 나는 살짝 손을 만져주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이런 질문을 받았다.
"넌 슬픔을 어떻게 극복했어?"
"아버지가 보고 싶지는 않아?"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이 점점 옅어져?"
나는 어디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잠시 생각하다가, <응답하라 1988> 이야기를 꺼냈다.
2화를 보면, 극 중 아버지 역할인 성동일의 어머니가 돌아가신다. 장례를 다 치르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 앞 골목에서 딸의 친구인 최택을 만난다. 최택은 이미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상황. 며칠 전에 엄마를 잃은 성동일과, 몇 년 전에 엄마를 잃은 최택이 나란히 앉은 장면에서, 성동일이 최택에게 묻는다. 엄마가 언제 제일 보고 싶으냐고. 최택은 이렇게 대답한다. "... 매일요. 엄마는 매일매일 보고 싶어요."
그 말이 맞다. 정말 그렇다. 딱 그런 감정이다.
나는 아빠가 매일 보고 싶다. 슬픔과 그리움은 늘 그 자리에 있다. 시간이 지난다고 옅어지지 않는다.
흔히들 '친구 같은 아빠'라는 표현으로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표현하고는 하지만, 우리 아빠는 나에게 '아빠 같은 친구'였다. 나 또한 아빠에게 '친구 같은 딸'이 아닌, '딸 같은 친구'였다. 단 하나의 친구를 꼽으라면 아빠에겐 내가 있었고, 나에겐 아빠가 있었다. 우리는 친구였다.
시작이 언제였는지 기억할 수도 없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니까 내가 아주 꼬꼬마였을 때부터 우리는 친구였다. 내가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는 세상 하나뿐인 친구였다.
우리는 별별 이야기를 다 했다. 영화 이야기, 책 본 이야기, 사람 만난 이야기,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 대한 이야기까지, 정말 온갖 이야기를 다 했다. 그중에는 엄마는 몰라야 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내가 학교 조퇴하고 노래방 간 이야기, 그리고 아빠의 숨겨둔 비상금 이야기처럼...
어떤 때는 대화가 너무 길어져 새벽 동틀 때까지 이야기를 하기도 했는데, 그러면 서로 너무 피곤해져서 '이제 좀 그만하고 잡시다'라고 해놓고 또 한두 시간을 더 이야기하는 바람에 아예 날밤을 샌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지금 나는 아빠 없이 혼자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세상의 모든 곳에서 아빠를 만나는 느낌이다. 우리는 정말 '세상의 모든 대화'를 했기 때문이다. 지구온난화, 인공지능, 레미제라블, 오두막, 동물원, 꽃, 교회, 영화, 독립운동, 도덕경, 배드민턴, 갤럭시탭, 포커, 태정태세문단세, 오보에, 이어령, 달력, 듀얼 모니터, 비행기, 안경, 고래, 보리차, 부채, 사용설명서, 구글 크롬, 소파... 우리는 심지어 백두산이 폭발하면 당장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했었는데, 최근 개봉한 영화 <백두산>에서 정말 백두산이 폭발하는 장면이 나오는 걸 보고 나는 아빠가 생각났다.
까만 코트를 꺼내 입을 때면 아빠와 까만 코트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 생각난다. 우리 집은 늘 강아지를 키웠으니 아무리 청소를 하고 깔끔을 떨어도 모든 옷에 강아지 털이 묻어있기 마련이었지만, 그럼에도 까만 코트는 특별히 더 신경 써야 한다는 대화였다. 다른 어떤 옷보다 까만 코트는 유난히 강아지 털이 잘 묻고, 확연히 눈에 잘 보인다면서.
아빠는 아빠의 구두를 닦을 때마다 꼭 내 구두도 함께 닦아주면서(내가 굳이 그럴 거 없다고 하면 아빠는 '닦는 김에'라며 구두를 닦아주었다), "패션의 완성은 신발이지"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래서 나는 구두를 신을 때마다 아빠가 생각난다.
아빠와 나는 단 둘이 여기저기 다니기도 많이 다녔다. 엄마는 같이 다니지 않았다. 엄마는 우리의 끝없는 대화에 참여하면 너무 피곤해진다면서, 3만 원 정도를 우리에게 주고는 잘 다녀오라고 했다. 그러면 우리는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녔고, 가보고 싶었던 곳에 가보곤 했다.
단 둘이 여행을 간 적도 많다. 아빠와의 시간이 우리나라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버스와 지하철은 물론이고, 한강, 종로, 상암, 잠실, 북한산, 인천, 천안, 평창, 강릉, 설악산, 태안, 광주, 목포, 부산, 제주도...
아빠 같은 친구, 딸 같은 친구
집에 돌아오면 엄마한테는 짜장면만 한 그릇씩 먹었다고 했지만, 사실 우리는 깐풍기나 칠리새우도 먹었다. 엄마는 밥값으로 기껏해야 1~2만 원 정도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몇만 원이 나왔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 아빠는 화려하게 비상금을 꺼내 계산했는데, 가끔씩 나도 숨겨놓았던 비상금을 보태, 그렇게 우리는(적어도 우리끼리는) 먹고 싶은 것을 실컷 먹었다.
아빠와 안 먹어본 음식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음식들을 봐도 아빠를 만나는 느낌이다. 돈가스, 치킨, 부대찌개, 순댓국, 김치찌개, 우동, 아귀찜, 삼겹살, 대게, 장어, 월드콘, 핫바, 조개구이, 등심, 아포가토, 모닝빵, 스크램블, 들깨칼국수, 너구리, 김떡순, 초당순두부, 팝콘, 만두, 포도...
아빠와 나는 책을 함께 보았다. 내가 본 책 중에 아빠가 안 본 책이 없고, 아빠가 본 책 중에 내가 안 본 책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아빠는 책을 볼 때 꼭 밑줄을 긋는 습관이 있었다. 그것도 색색깔의 볼펜과 색연필로. 그래서 아빠가 본 책은 늘 금방 너덜너덜해지곤 했다. 그래서 나는 새 책들이 아빠 손을 타기 전에 어떻게든 먼저 책을 선점해 읽고는 했다. 내가 먼저 책을 읽고 아빠에게 넘겨주면 아빠는 그제야 맘 놓고 빨갛게 파랗게 밑줄을 그어가며 책을 읽었다.
그렇게 책 한 권을 다 읽으면 우리는 그 책에 대해 또 밤새도록 이야기했다. 내가 인상 깊었던 구절을 이야기하며 그걸 보았느냐고 물어보면, 아빠는 말할 필요도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책을 펼쳐 보여주었는데, 정확히 내가 말한 그 구절에 아빠가 밑줄을 친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우리가 또 통했다며 끌어안고 좋아하다가 또 소름 끼쳐했다.
우리 집 책장에는 그 너덜너덜한 책들이 여전히 꽂혀있다. 예전에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 책을 펼치면 그 형형색색의 지저분한 밑줄이 보이는데, 나는 또 아빠를 만난다.
그리고 거울. 난 유난히 아빠를 많이 닮아서, 거울을 볼 때마다 내 얼굴에 아빠의 얼굴이 보인다. 난 손가락, 발가락까지도 엄마를 닮지 않고 아빠를 닮았는데, 그래서 손톱 발톱을 깎을 때마다 아빠의 손가락, 발가락을 본다. 나는 항상 손이 차가운데, 아빠 손은 항상 따뜻해서, 내 손이 시릴 때마다 아빠는 양손으로 내 손을 감싸 잡아주었는데, 그래서 나는 손이 시릴 때마다 아빠가 그립다.
아빠의 흔적을 내 삶에서 지울 수는 없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아빠와의 시간이 차고 넘친다.
나는 사랑받았고, 사랑했다.
아빠가 하늘나라에 가신지 2년이 되어가지만, 나는 매일 아빠가 보고 싶다. 아빠와 말하고 싶고, 같이 걷고 싶고, 같이 먹고 싶다. 그리움의 크기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
슬픔을 어떻게 극복했냐고 물었던 그분께.
나는 슬픔을 극복하지 않았어요. 단 한 번도 슬픔을 극복하려 하지 않았어요. 아빠가 하늘나라에 가시고 한 달쯤 지났을 때부터였나...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와 한참을 엉엉 운 적도 많았지만, 그래도 나는 그 슬픔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나는 아빠를 잊으려 노력하지 않았어요. 아빠와의 흔적을 없애려고 하지 않았어요. 아빠 생각이 나면 나는 대로, 흔적이 있으면 있는 대로 그저 놔두었어요. 나는 아빠와의 시간을 좋아했으니까요. 그 시간을 떠올리는 것이 슬픔이라면, 차라리 온전히 슬퍼하고 싶었어요.
다만, 언제까지고 그 감정에 매여 살 순 없기에, 그 감정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능력이 생기기 시작한 것 같아요. 생존본능이라면 생존본능이고, 성숙이라면 성숙이겠죠. 슬픔과 그리움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데, 나의 마음과 영혼이 그때보다는 조금 커져서 그 감정들을 끌어안을 수 있게 된 느낌이랄까요.
난 여전히 아빠가 보고 싶어요. 하루도 빠짐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