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주는 상실의 시간이었다.
선배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내 브런치 구독자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많은 기억들과 감정들이 또 한 번 지나가는 시간을 보냈다. 나 또한 부모님이 하늘나라에 계시므로.
이 어마어마한 상실감은 한 사람을 이 세상에서 떠나보냈다는 사실과 더불어, 내가 그동안 마음을 쏟았던 만큼 커진다. 나의 부모님에게 사랑받았던 사랑을 더 이상 받을 데가 없어진 것과, 또 내가 사랑했던 사랑을 더 이상 쏟을 데가 없어진 것이 얼마나 큰 상실감을 주는지 나는 이미 절절히 느껴보았다.
이 상실감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온 사방이 갑자기 텅 빈 것 같기도 하고, 세상 한가운데 엄청 큰 구멍이 뚫린 것 같기도 하고, 땅이 갈라져 부서져내리는 것 같기도 하고, 하늘이 무슨 색이었는지 모르겠기도 하고,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도 보이지 않기도 하고...
나는 비교적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먼저 부모님을 잃어봐서(물론, 더 일찍 부모님을 잃은 사람도 많지만) 이 '상실감'에 대해서는 이미 느껴볼 만큼 느껴본 편인데, 그래서 웬만한 상실감엔 무뎌졌을 법도 하지만, 사실, 나는 오히려 예민해진 것 같다. 그래서 최근 선배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구독자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마치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 같은 상실감을 느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이야기 한 바가 있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확실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만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어떠한 진리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떠한 진리도 어떠한 성실함도 어떠한 강함도 어떠한 부드러움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상실의 시대 中>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냈다는 그 구독자님은 내 브런치에 처음으로 따뜻한 위로와 응원을 보내주었던 분이었다. 나 또한 처음으로 그분의 브런치를 보며 진심으로 응원하고 마음을 나눴다. 그분의 온기가 느껴지는 단어와 문장을 볼 때마다 나는 움찔했다. 매번은 아니어도, 우리는 서로 한 번씩 댓글을 남겨주며 함께 아파했고, 함께 안도했다.
그런 분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는 울었다. 나는 마치 나의 엄마가 돌아가신 것 같은 상실감을 느꼈다. 나는 '당신의 상실을 나는 온전히 나의 상실로 느낍니다'라고 온몸으로 말하며 그분의 옆에 있어주고 싶었다.
이 와중에 우리 할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심근경색과 뇌경색이 한꺼번에 온 케이스란다. 일반적인 60대 어르신 정도면 치료를 통해 충분히 회복할 수 있다고 의사는 말했지만, 우리 할아버지 연세는 이미 100세가 넘었다.
중환자실은 하루에 두 번, 20분씩 면회가 가능하다. 나는 시간이 되는대로, 가능한 매번 병원에 가서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온통 피멍이 들어 보라색이 된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아마도 있는 힘껏 잡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가 '다 괜찮아'하고 웃어 보이자, 할아버지도 웃었다.
할아버지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뭐라고 뭐라고 자꾸 말하려고 했는데, 내가 알아들은 말은 몇 마디 되지 않는다. "손이 차...", "네가 고생이 많네.", "지혜롭게, 지혜롭게.", "수고 많지?",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봉사하면서...", "고마워, 고마워.", "그래, 그래."
지난 2주 동안, 이런 시간을 보내면서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온몸을 관통했다.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상실'이었다.
나의 아빠, 엄마는 무조건 내 편이었다. 내가 억울한 일이나 서러운 일을 당하면 당장 달려와 나 대신 버럭버럭 화를 내주었다. 혹여 내가 잘못한 일이 있어도, 단 둘이 있을 때 나를 혼냈을지언정, 다른 사람 앞에서는 무조건 내 편을 들었다.
부모님이 없는 세상이라는 걸 완전히 실감한 순간은 그런 순간이었다. '이제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누군가 나에게 악의를 가지고 대하거나 윽박지를 때, 달려와서 '네가 뭔데 내 딸한테 그러느냐'라고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더 이상 없다는 것. 아니, 최소한, 그런 일이 있었다고 나중에라도 이야기하면 '무슨 그런 경우 없는 사람이 다 있느냐'며 같이 욕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
나는 이제 그런 상황을 맞이하면,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모든 총대를 내가 매야 했다. 모든 총알받이도 내가 되어야 했다. 전쟁터에서 아군도 지원군도 없이 혼자 저벅저벅 걸어 나가 싸우는 기분. 상의할 사람도, 함께 싸워줄 사람도 없었다. 그럴 때마다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상황이야 해결하거나 무마하면 그만이지만, 마음에 남는 데미지와 상실감은 어떻게 처리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유일하게 남은 무조건적인 내편이었다. 물론, 부모님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내 편'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잘못했을 때도 그저 잘했다고 했으니까.
내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나를 업어 키웠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방과 후 집에 가기 전에 1분 거리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 들렀다 갔고, 최근 6~7년은 할아버지를 모시고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았다.
할아버지의 '나 때는 말이야'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드라마 <야인시대>를 재밌게 보고 있으면 할아버지는 "김두한 그 친구가 말이야, 종로에서..."라는 말을 하셨고(실제로 찾아보니 우리 할아버지가 김두한보다 연배가 높았다), 무언가를 한참 신나게 이야기를 하셔서 그게 언제 때 이야기냐고 물어보면 입을 다무셨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게 6.25 이전이었는지, 이후였는지를 물어보아야 했는데, 할아버지가 입을 다무실 때는 6.25 이전일 때가 많았다. 그런 정도니 영화 <국제시장> 이야기는 아주 최근, 그러니까 마치 지난달쯤 일어난 일처럼 말하곤 하셨다.
나는 할아버지와 항상 가깝게 살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는 새 것을 좋아했지만 관리는 잘 못하는 편이었다. 새 옷을 사 드려도 그 옷을 한 번 입어보고 잘 개켜 넣어놨다가 외출할 때 입는 게 아니라, 집에서 그 옷을 입고 뒹굴거리니 하루 만에 새 옷이 헌 옷이 되어버렸다.
대화하는 것도 힘들었다. 무슨 대단한 대화를 한 것도 아닌데, 나는 그게 힘들었다. 빵은 전자레인지에 살짝 돌려먹어야 맛있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냉장고에서 꺼내 차가운 채로 그냥 드시면서 빵이 예전 맛이 안 난다고 하지를 않나, 강아지 밥은 내가 줄 테니 신경 쓰지 마시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내가 나가 있는 동안 강아지에게 자꾸 먹을 것을 줘서 애가 점점 뚱뚱해지고 무릎 관절에 무리가 오지를 않나...
제발 좀 그러지 말라고 화를 내면, 할아버지는 화를 내는 내 얼굴을 보며 웃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해 속이 상하곤 했지만, 생각해보면, 할아버지에게 중요했던 건 '내가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아버지를 보며 무언가 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내 의견이 어떻든, 내 감정이 어떻든, 할아버지는 그저 내 얼굴을 보면 좋아했고, 내가 말하는 걸 들으면 좋아했다.
나에게는 그런 할아버지가 있었다.
물론, 할아버지는 나에게 어떤 힘도 되지 못했다. 이미 100세가 넘으셨으니까. 10년 전에도 90이 넘은 연세이셨으니 당장 와달라고 해도 와줄 수 없었고, 필요한 게 있다고 해도 해줄 수 없었다.
그래도 나에겐 할아버지가 있었다. 이순신 장군에게 12척의 배가 남아 있었던 것처럼. 비록 아무 힘도 못 쓰는 너덜너덜한 아군이지만, 아무튼 존재뿐이지만, 그마저도 감지덕지한, 그런 '내 편'이었다. 내가 전쟁터에서 서럽게 홀로 싸우고 돌아와 지친 몸으로 철푸덕 주저앉을 때, 그래도 나에겐 아직 내 편이 남아있다는 단 하나의 마지막 안심은 할아버지였다.
지난 열흘 동안 하루에 두 번 할아버지를 면회하면서, 할아버지에게도 '내 편'이 나뿐이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오른쪽 신경이 마비되어 팔다리를 컨트롤하지 못하면서도 나를 보고 웃었다. 전자레인지에 빵을 데우지 않았다고 화를 내던 나를 보고 웃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다른 친척들이 찾아와서 몇 번 면회를 했다. 그분들이 집에 돌아가시면서 하는 말은 거의 비슷했다. "할아버지가 너만 찾더라.", "할아버지가 네 얘기만 하시더라.", "다른 말은 잘 못 알아듣겠는데, 네 이름은 또박또박 부르시더라."
그저께 새벽에 갑자기 열이 오르고 의식이 떨어져 급하게 검사를 해보니 폐렴도 더해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연세가 높으신 분들에게는 다른 병들보다 폐렴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폐렴 때문에 돌아가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나는 또 한 번의 상실을 준비하고 있다.
이제 정말, 이 세상에 '무조건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
물론, 이것이 끝이 아님을 안다.
우리에게는 '하늘나라'라고 부르는 저 세상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늘나라'라는 말이 좋다. '나라'라니. 우리가 흔히 아는 바다 건너 있는 '나라'처럼, 하늘 넘어 있는 '나라'라니. 어차피 친척이 먼 외국에 살면 얼굴 못 보고 사는 건 매한가지니, 그냥 다른 나라에 이민 간 셈 치고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어디에 있든, 서로를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그런데 무려 '하늘나라'라니. 멋지다. '우리 부모님은 스위스에 계셔.'라는 말을 들으면 '세상에! 부모님이 정말 멋있게 사시는구나!'라고 생각이 드는 것처럼 '우리 부모님은 하늘나라에 계셔.'라는 말이 주는 느낌이 나는 꽤 괜찮다.
다만, 연락은 되었으면. 더도 덜도 말고 딱 1년에 한 번만. 내 편이 필요한 순간,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며 '무슨 그런 사람이 다 있느냐'며 '됐어, 그런 사람은 상종도 하지 마. 고개 들어. 넌 잘했어.'라고 말해줄 수 있는 단 한 번의 찬스만 있었으면.
이 단 한 번의 찬스가 없기에, 나는 자꾸 상실감을 느낀다. 나는 이 어쩔 수 없는 상실감이 찾아올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의 부모님은 저 멋진 하늘 '나라'에서 나를 내려다보면서 여전히, 지금 이 순간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 그 사랑이 있기에, 나는 이 어마어마한 상실감을 끌어안고 세상을 살아내고 있다.
살아내야 한다.
나는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