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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Feb 07. 2020

부디, 안녕하세요!

'소확행' 아니고, '확행'


  '안녕'이라는 말이 좋다.


  이 '안녕'은 무려 '편안할 안(安)'과 '편안할 녕(寧)'으로 이루어진 단어로, "안녕하세요?"라는 말은 "편안하고 편안하세요?", "안녕히 계세요!"라는 말은 "편안하고 편안하세요!"라는 말로 풀어볼 수 있다.


  국어사전에서는 '아무 탈 없이 편안함'으로 안녕을 정의하고 있다.

  사람들은 아무 탈 없고 편안하기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벌며 자신의 기반을 다진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가진 게 있어야 아무 탈 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번듯한 지위를 가져야, 충분한 돈이 있어야 안녕한 삶이 되는 거라고. 그렇게 다들 안녕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안녕하기 위해 돈을 벌며, 안녕하기 위해 집을 산다.


  그런데 이렇게나 안녕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우리는 안녕하지 못하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한계에 부딪히고, 번번이 취업과 진급에 실패하고, 집값은 노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이 와중에 본인이나 가족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거나, 갑작스러운 사고가 발생하면 한층 더 어려워진다. 심지어 대부분의 안 좋은 일들은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경향이 있어서, 실직한 사람이 사기를 당한다든지, 병든 사람이 또 교통사고를 당한다든지 하면 혼란은 극에 달한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가만히 자기를 돌아본다. 이미 미친 듯이 화도 내 보고, 신을 원망도 해본 이후다.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난 열심히 살았는데.'

  어떻게든 답을 찾으려 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어서 결국에는 그 모든 책임을 스스로에게로 돌린다. '내가 그때 잘못 선택해서 이렇게 된 것 같다', 혹은 '내가 더 열심히 하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것 같다'처럼. 어떤 사람들은 남에게로 잘못을 돌린다. "다 너 때문이야.", "그때 네 말을 듣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다. 누구 때문도 아니다.

  우리는 열심히 살았고, 열심히 노력했다. 그때 그 선택을 하기까지 여러 선택지들을 놓고 조사하고 고민했으며, 그때 한 선택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어떻게든 잘 살아보고자. 안녕하고자, 안녕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다.


  모든 것은 안녕하기 위해서였다.




  애초부터 '안녕'이 잘못 인식되었다. '안녕'이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다. '안녕'이란 '편안하고 편안한 것'이다. 물론, 잘 먹고 잘 사는 인생이 편안할 가능성이 높다고는 하지만, 거기에 올인할 만큼의 가능성은 아니라고 본다. 세상에는 잘 먹고 잘 살지만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뉴스와 기사,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종종 본다.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있지만 늘 불안에 떠는 사람들, 모두가 우러러보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졌지만 정작 본인은 편안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멀리 가지 않아도 우리 주위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장의 고위직에 올랐지만 매일 아침 출근길이 끔찍한 사람들, 여러 채의 건물을 가진 건물주이지만 매일 밤 잠 못 이루는 사람들.


  내가 좋아하는 '안녕'은 그런 것이 아니다.


  '안녕'은 철저히 '마음 상태'이다. 마음이 편한 게 곧 안녕한 것이다. 주위 환경이나 외부 상황과는 하나도 상관없다. 아무리 가진 게 없고, 해야 할 일이 산더미더라도 마음이 편하면 얼마든지 안녕할 수 있다. 


  일의 종류와 크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일을 해낸다고 해서 '안녕'할 수 있는 것 아니다. 무언가 큰 일을 이루어내면 기분 좋은 성취감이 들긴 하지만, 어차피 그때뿐이다. 높은 연봉을 받으면 받는 만큼 업무는 과중해지고, 높은 직위에 올라갈수록 해야 할 일은 더 많고 책임은 더 무거워질 뿐. 대통령이 된들 안녕할 수 있을까. 당선된 그 순간은 세상에 이런 기쁨이 없을 것 같지만, 이후 산더미처럼 쌓인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는 그 삶을 편안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보릿고개 시절을 겪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공통적으로, 그때가 힘들긴 했어도 행복했다고 말씀하실 때가 있다. "그때는 먹을 것도 없고, 겨울은 또 어찌나 추운지. 단칸방에 10명도 넘는 식구가 서로 엉겨 붙어 잤어.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그래도 어떡해. 아무리 삐졌어도 다른 데 가서 잘 데가 없는데... 또 그 비좁은 방에 서로 낑겨가며 자는 거야. 누구는 코 골고, 누구는 이 갈고, 옆에서는 팔다리로 짓누르고 난리였지. 그런데도 다들 어찌나 잘 잤던지.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싶어. 힘든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도둑질하지 않고, 못된 짓 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마음이 편하려면, 우선, 당장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우선순위에 놓아야 한다. '정직', '성실', '양심', '겸손', '존중', '관용', '정성', '용기', '희망'과 같은 가치들. 세상살이에 아무리 찌들었더라도, 원래 우리의 마음은 이러한 가치들을 향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은 그런 가치를 따를 때 편안함을 느낀다.  

  물론 당장 먹고는 살아야 하니 일을 안 할 수는 없지만, 힘든 일을 하는 것과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은 다르다. 몸은 조금 고단하더라도 정직하게 일하면 마음이 편하다. 몸이 편한 일이더라도 부정부패로 인해 마음이 고단해지는 일이라면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을 대할 때도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할 때 마음이 좋다. 옳은 소리를 한답시고 날카롭게 쏘아붙이면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다.


  마음의 방향이 선한 상태에서, 보다 깊은 안녕을 위해서는 '본인이 느끼기에 좋은 것'이어야 한다. 무조건 본인이 좋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나의 마음'이다.


  모든 일은 '내 마음 좋으려고 하는 일'이어야 한다. 공부를 안 해서 마음이 불편할 것 같으면 공부를 해서 마음을 편하게 해야 하고, 어떤 일을 해서 마음이 안 좋을 것 같으면 가능한 하지 않는 쪽을 택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몸이 불편해지거나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게 낫다. 몸의 회복이 마음의 회복보다 수월하니까. 몸이 힘든 건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이 무너지면 회복이 불가능하다.


  사실, '내 마음 좋으려고 하는 일'은 먼 훗날을 위한 준비작업에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이다.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이 좋아야 한다.

  얼마든지 순간순간 내 마음이 좋을 수 있다. 흔히 이야기하는 '소확행'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를 무라카미 하루키는 <랑겔한스 섬의 오후>라는 에세이에서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이라고 말한 바 있고, 또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꾹 참고 격렬하게 운동을 한 뒤 마시는 차갑게 얼린 맥주 한 잔 같은 것이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하고 혼자 눈을 감고 자기도 모르는 새 중얼거리는 것 같은 즐거움.”



  내가 좋은 것을 하는 것이 우선이다. 필독 도서를 다 읽을 필요는 없다.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면 된다. 요즘 유행을 무조건 따를 필요도 없다. 내가 좋으면 하는 거고, 안 좋으면 안 하면 그만이다. 사람도 마찬가지. 만나서 불편한 사람을 굳이 만나서 피곤해질 필요는 없다.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 사랑하는 시간이 훨씬 가치 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이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우리 사회는 특히나 더 그런 것 같다. 규범과 질서가 이미 정해져 있고, 그것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을 '일탈'로 여기고, 그러다보니 때로는 삶을 견디다 못해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며 '탈선'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도박, 마약처럼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수많은 일들. 현재의 괴로움을 털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앞서 정작 챙겨야 할 가치들을 내던지는 경우다. 어쩌면, 본인의 안녕을 챙기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생각해본 적도 없고), 그저 막연히 '저렇게 하면 좀 신나지 않을까?' 하는 얕은 생각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부터 정확히 알아야 한다. 개인의 취향이란 분명히 존재한다. 원래부터 가지고 태어난 성향과, 자라는 과정에서 보고 느낀 것들이 각자의 고유한 취향을 만들어낸다. 그 취향은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것도 강요할 수 없고, 어떤 취향도 경시할 수 없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본인의 취향을 무작정 고집할 수 없는 상황도 분명 존재하지만, 적어도 일상생활에서는 자기 마음에 좋은 것을 선별해 취할 수 있어야 한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지 화창한 날을 좋아하는지, 밥 대신 빵을 먹는 걸 좋아하는지 빵은 후식으로 먹는 걸 좋아하는지, 동물을 좋아하는지 어린이를 좋아하는지, 책은 깨끗하게 보는 걸 좋아하는지 밑줄을 그어가며 보는 걸 좋아하는지, 달걀프라이는 반숙이 좋은지 완숙이 좋은지, 노래를 들을 때 리듬을 타는 게 자연스러운지 어색한지, 커피는 쓴맛으로 먹는지 단맛으로 먹는지, 보름달을 좋아하는지 초승달을 좋아하는지, 혼자 먹는 치킨이 맛있는지 같이 먹는 치킨이 맛있는지, 그리고, 그리고...


  (나는 개인적으로, 명품백을 들고 외제차를 타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본인이 정말 원해서 심사숙고하고 노력해서 가져 흡족해한다면 나는 충분히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개인의 취향'이 아닌, 목적이 '주위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었다면 그것은 결코 안녕한 것이라고 할 수 없겠지. '다들 이런 거 하나쯤은 있으니까', '사람들이 부러워하겠지'와 같은 의도로는 '안녕'을 누릴 수 없다.)


  순간순간의 안녕들이 우리를 안녕하게 한다. 


  안녕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의 인생을 채운다. 빵 굽는 냄새를 맡을 때 마음이 좋은 것처럼, 어떤 안녕은 잠시 잠깐, 그러나 정기적으로 다가온다. 그런가 하면 어떤 안녕은 오랜 친구에게 받는 메시지 한 통처럼 잊을만하면 찾아오기도 하고, 어떤 안녕은 선물 받은 핸드크림의 좋은 향처럼 계속 주위에 머물기도 한다.


  특히, 오래 지속되는 안녕의 특징은 '정성'과 '열정'이다. 안녕을 위해 정성을 들이고 열정을 더하는 것이다.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좋으려면, 우선 속옷을 깨끗하게 빨아서 반듯하게 접어서 가득 넣어 놓는 수고를 해야 하는 것처럼. 하루키는 속옷 서랍을 열 때마다 마음이 좋았을 것이다. 한두 번 좋고 끝나는 안녕이 아닌, 오래 지속되는 안녕.

  정말 갖고 싶은 것이 있어서 고심 고심한 후 여러 방면으로 노력해서 정말 갖게 되어 마음이 뿌듯하다면, 그 안녕은 오래 이어질 수 있다. 그 물건을 볼 때마다 자기가 쏟았던 정성과 열심을 두고두고 떠올리며 좋아할 수 있을 테니까.


  사람은 마음이다. 마음이 편하고 좋아야 한다. 마음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대가도 지불할 수 있다. 돈이든 시간이든 하나도 아깝지 않을 수 있다. 


  모든 것은 안녕하기 위한 것이므로. 




  나에게는 얼마 전 새로운 생명을 낳은 친구가 있다. 그 부부는 소파 없는 삶을 살고 있었지만, 아이를 낳은 이후 소파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소파를 구입했다.

 

  친구는 소파가 아주 마음에 든다고 했다. 새로 산 소파에 앉으니 소소하고 확실하게 행복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소파의 구입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건 소소한 행복 정도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 부부는 어떤 소파를 살 건지 고민하다가 무조건 편한 소파를 사기로 했단다. 남편은 자 이케아에 가서 이케아에 있는 모든 소파에 다 앉아보면서 가장 편한 소파를 찾았고, 친구를 데리고 다시 가서 같이 앉아보고 구매를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는 중에 패브릭으로 할 건지 가죽으로 할 건지, 사이즈는 어떻게 할 건지, 색상은 어떤 걸로 할 건지 여러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고 의논했다.

  그렇게 그 모든 과정을 거쳐 집으로 가져온 소파는 직접 조립을 해야 해서 남편은 밤새도록 소파를 조립하고 또 조립해야 했고, 커버도 하나하나 빨래하고 다림질해야 했다. 쿠션을 끼우는 일도 보통이 아니었다고.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완성된 푹신한(그리고 예쁜!) 소파에 앉은 친구 부부는 너무나 포근하다며 좋아했다.



  나는 그게 엄청 큰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작은 행복이면 대체 큰 행복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건 '소확행'이 아니라 '확행'이다. 그 소파를 볼 때마다, 그리고 그 소파에 앉을 때마다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할 테니까.






  우리의 마음을 좋게 하는 확실한 것들과 함께, 

  우리의 마음이 편안하고 편안하길.

  

  부디,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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