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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Feb 12. 2020

걷다 보니, '나의 동네'


"생명을 계속 이어가도록 해주는 것, 그건 오직 걸음을 내딛는 거야.
한 걸음 한 걸음 언제나 다시 시작되는 바로 그 똑같은 발걸음 말이지."
-생텍쥐베리, <인간의 대지>


  가는 모든 곳을 웬만하면 걸어 다니고 있다.

  지도를 확인해보고, 5km 내의 거리로 확인되면 그냥 걷는다. 그러다 보니,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하루 최소 10000보는 걷게 된다. 어떤 날은 20000보 이상 걸을 때도 있다.


  매일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지 1년이 되어간다. 1년 전과 비교해, 나는 무척 건강하다.

  그 전에는 조금만 걸어도 다리가 아프고 퉁퉁 부었는데, 이제는 2만 보를 넘게 걸어도 집에 와서 샤워 한 번 하면 아무렇지 않은 정도가 되었다. 잠을 자도 자도 피곤했었는데, 이제는 내 몸이 필요한 만큼의 잠을 자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먹는 것도 마찬가지. 전에는 배가 불러도 늘 먹고 싶은 게 있어서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이제는 배가 부르면 더 이상 무언가를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 몸이, 내 몸에 가장 적합한 게 무엇인지를 알아, 스스로 균형을 잡아 들어가고 있다.

  나는 이렇게나 살아있다.




  오랫동안 살던 지역을 떠나 이 지역에 살기 시작한 지 6년이 지났다.


  이 지역으로 이사 온 후 5년간, 내게 이 동네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동네'였다. 비록 지금 여기에 살고 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내 정체성을 여기에서 찾지 않았다.

  필요한 게 있으면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거나 인터넷으로 주문했으니 그 흔하다는 단골가게 하나 없었다. 급히 살 것이 있어서 집 앞 편의점을 가더라도, 사야 할 물건을 사는 것 이외에 어떤 교류도 하지 않았다. 길 가다 마주칠 아는 사람 하나 없었고, 강아지 산책을 시킬 때도 강아지가 사납다는 핑계(실제로 사납기도 하고)로 다가오는 사람에게 철벽을 쳤다. 친한 사람들과의 만남이나 모임 장소는 늘 다른 지역이었고, 나도 굳이 이 동네로 사람들을 부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5년이나 살았어도, 나는 동네 어디에 뭐가 있는지 몰랐다. 약국을 한 번 가려고 해도 인터넷 검색을 해야 갈 수 있었을 정도였다. 사실, 별로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언제든 떠나도 괜찮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랬던 내게,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최근 1년 동안 온 동네를 걸어 다니며 생긴 변화다.


  지도에 우리 집을 가운데에 놓고 반경 5km의 원을 그려보면, 걸어서 갈 수 있는 모든 곳을 알 수 있다. 큰 길로만 다니지 않고 골목골목을 다 다녀보았다. 같은 목적지라도 가는 루트를 새롭게 해서 걸어보기도 하고, 지도를 세세히 살펴보며 안 가봤던 곳에 괜히 한 번 들러보기도 했다.

  그렇게 온 동네를 걸어 다니다 보니 동네의 많은 것들을 보게 되었다. 건물이 헐리고 새로 지어지는 모든 공사 과정과, 사장님의 늦잠으로 오픈이 늦어진 와플가게와, 경쟁 업체가 없어지면서 점점 영역을 확장하는 채소가게 아줌마, 진돗개를 키우는 떡집, 음질 좋은 블루투스 스피커로 길거리를 분위기 있는 음악으로 채우는 붕어빵 아줌마, 평일에는 매일 점심시간마다 줄이 늘어서지만 주말만 되면 한산해지는 뼈해장국집...


  그러면서 꽤 괜찮은 책방도 찾아냈고, 쿠폰을 모아 사용할 만큼 여러 번 간 빵집이 생겼으며, 그 빵집을 자랑하며 데리고 갈 동네 친구도 생겼다. 세상에, 동네 친구라니! 심심한 시간에 집 앞으로 불러낼 수 있는 친구라니!

 

  6년 만에 동네 친구가 생겼다.

  물론 그 친구는 엄격한 식단관리를 하는 친구라서 먹는 자리에 불러낼 수는 없지만, 대신 자기가 아는 동네의 맛집들을 알려주며 제발 꼭 먹어달라고 나에게 부탁하곤 한다. 그리고 참 고맙게도 한 번씩 찾아오는 치팅데이를 나와 함께 보내준다.


  이 친구는 TMI가 넘치는 친구로, 온갖 정보를 나에게 다 넘겨준다. 개인적인 정보들도 많지만, 동네에 관한 정보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내가 아무리 걸어 다녀도 혼자서는 절대 알지 못했을 동네의 사정들을 들으며 나는 점점 이 동네를 깊이 알아가고 있다.

  몇 달간 문을 열지 않았던 치킨집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사장님이 항암치료를 받으시느라 영업을 못했다고. 이제는 다 나으셔서 다시 영업을 시작했는데, 별로 크지도 않은 영업장에 공기청정기를 3대나 두었단다. 그 치킨집은 원래도 맛집이었는데, 사장님이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하셨다면서 기존에 쓰던 닭보다 큰 닭을 쓰면서 치킨의 양도 훨씬 많아졌다고 했다.

  그 외에도 김치찌개가 맛있는 숯불 고깃집, 혼자 가기 좋은 코인 노래방, 고급스러운 커피를 합리적인 가격에 종류별로 판다는 오래된 커피전문점, 점점 맛이 짜지는 반찬가게, 유일하게 V스쿼트가 있는 헬스장, 인심 좋은 빡빡이 아저씨의 오리고깃집, 어른 손님들이 더 많이 찾는다는 초등학교 앞 분식집과 같은 TMI들을 듣다 보니 이 동네가 친숙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5년 동안 이 동네에 가졌던 티끌 같았던 마음이, 고작 몇 달 사이에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그러는 사이 단골 카페가 생겼다. 큰 길로만 다녔으면 절대 알 수 없었을, 골목 모퉁이에 있는 동네 카페.

  대부분의 카페는 규모가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아서 아늑함과 쾌적함을 동시에 느끼기 어려웠는데, 여기는 아주 적당하게 내 집 같으면서 산뜻하게 외출한 기분도 느낄 수 있다. 원형 테이블이 아닌 사각 테이블적당히 편한 의자가 있는 곳. 나는 소리에 민감한 편이라, 카페의 음악 스타일이나 볼륨이 불편하게 느껴지면 차라리 이어폰을 귀에 꽂고는 했는데, 딱 무난한 음악내 귀에 거슬리지 않을 볼륨으로 틀어준다.

  인테리어 하나하나 정말 '내 집'처럼 신경 쓴 것이 곳곳에서 느껴지고, 곳곳에 있는 화분들도 매우 건강하다. 이곳은 창가가 전체적으로 통유리여서 한 번씩 멍 때리며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동시에, 유리창 아랫부분을 반쯤 가려놓아 바깥에서는 내 모습이 잘 보이지 않기에 창가에 앉아도 부담스럽지 않다. 외부에 위치한 화장실에는 히터를 계속 틀어놓아 마음까지도 따뜻하게 했고, "오늘은 손님이 많이 오셔서 화장실이 조금... 죄송해요"라는 말과 달리 너무나 깨끗하고 깔끔했다. 메뉴도 굉장히 많은데 (커피도 많은데 차 종류도 많아서 커피를 먹지 않는 나에게도 다양한 고민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메뉴 하나하나를 정성 들여 만든 게 굉장히 티가 난다.


자꾸만 스물스물 웃음나오는 고양이 귀모양 티 코스터


  모든 요소요소들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사장님의 사근사근한 말투가 너무나 듣기 좋아서, 그 말투를 한 번 더 들어보고자 처음으로 내가 먼저 말을 걸어본 카페이기도 하다. "가장 좋은 자리에 앉으세요"라는 말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따뜻한 물과 멀티탭과 담요를 갖다 주는 세심함에는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직접 만들여 끓이는 거라 좀 오래 걸려요. 대신 최선을 다해 제일 맛있게 해 드릴게요!"라는 말과 "맛있게 드셔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라는 말에는 황송할 지경. 이렇게나 듣기 좋게 말해주시다니! 나는 생각하고 생각해서 한다는 말이 기껏 "자주 올게요!"정도였는데.


  동네 친구 덕분에 충분히 친숙해진 동네가, 이제는 사랑스러워지고 있다.






  작년에 집을 이사하고 짐 정리를 하면서 'home, sweet home'에 대한 강한 욕구를 가졌었다. 'house'가 아닌 'home'. 이 거친 세상에서 온전히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는 한 장소. 그래서 모든 가구 배치와 동선, 인테리어(인테리어라고 할 것도 없지만)의 목적은 '편안함'과 '쉼'이었다.

  

  동네를 걸어 다니기 시작하면서는 꽤 큰 이질감을 느꼈다. 이사는 했지만, 그전에 살던 집에서 걸어서 15~20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라 결국 그 동네가 그 동네였지만, 나는 5년이나 산 이 동네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살아내야 해'라는 일념 하나로 걷고 또 걷다가 길을 잃기도 여러 번.

  이 낯선 동네에서 그나마 위안은 멀지 않은 거리에 '나의 home'이 있다는 것. 나는 '나의 home'으로 오기 위해 핸드폰 지도를 켜서 현재 나의 위치를 '출발'로 놓고 목적지를 '집'으로 설정한 후 그걸 보면서 걸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손이 미치지 않는 수백 개의 별 가운데서 오직 하나뿐인 진정한 별, 우리의 별, 홀로 익숙한 우리들의 풍경, 우리들의 친근한 집과 우리들의 애정을 지니고 있는 그 별을 찾아 우주 공간에서 길을 잃고 헤맸다. -생텍쥐베리, <인간의 대지>

 

  나는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면 마침내 나는 안도했다. 나의 치와와가 새까만 두 눈 가득 나를 담아내고 있는 이 집은 홀로 익숙한 나의 풍경, 나의 친근한 집이었다.


  다음날이 되면 나는 또 집을 나와 걸었다. 살아내야 했으니까. 그 모든 시간은 '헤매는 시간'이었다. 가봤던 길도 가보고, 안 가봤던 길도 가봤다. 어떤 날은 지도를 보지 않고 집에 잘 찾아오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결국 지도를 다시 꺼내보아야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이 모든 시간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그리고 동네 친구와 단골 가게들로 인해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면서, 이 미지의 우주공간은 친밀한 공기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우주에서 오직 '나의 home' 외에는 마음 편한 곳이 하나도 없었는데, 이제는 '나의 place'도 생기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도 한 명 없었는데 무려 '친구'가 생겼고, '나의 하루'에 일어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과 '그의 하루'에 일어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합쳐져 '꽤 대단한 하루'들이 되었다. 이토록 반짝이는 나의 별들!

 

  헤매고 헤매던 나의 시간들이 사실은 별을 찾는 시간이었던 걸까. 'sweet home'에 대한 강한 욕구는 '진정한 별'에 대한 욕구였던 걸까. 나의 많은 걸음들이 사실은 별을 찾기 위한 걸음이었던 걸까.


  당장은 계획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 이 동네를 떠날 때 난 매우 서글퍼질 것 같다.

  어쩌면 울어버릴지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도 아무 미련 없을 것 같던 동네가 '나의 동네'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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