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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Feb 17. 2020

마음을 여는 중입니다.
바들바들 떨리지만.



  "그러면, 혹시, 사람이 무섭지는 않아요?"


  훅 들어온 질문에 순간 숨이 멎었다. 

  지난 몇 달 동안, '괜찮다', '괜찮다', '좋은 사람일 것이다'라고 곱씹으며 두 주먹을 꽉 쥔 채 사람을 대하던 나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떨리는 목소리로 사람과 대화하고, 바들바들 사람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나의 모든 순간들. 


  세상 사는 게 정말 너무 힘들다고 느낀 건 온전히 '사람' 때문이었다. 공부하고 시험 보는 스트레스도 컸고, 일과 돈이 주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지만, '아, 이건 정말 더는 못하겠다' 하며 포기가 간절해지는 모든 순간에는 '사람'이 있었다. 


  아무리 사람마다 가치관과 세계관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해도 해도 너무한 수준에 이르면 그냥 다 던져버리고 싶을(던져버려야 할) 때가 있다. 자신의 생각을 무조건 강요하는 사람들, 더 나아가, 자신의 틀과 기준이 아닌 모든 것은 적대시하는 사람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양보는 일절 없이, 힘과 나이와 돈으로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는 사람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사람들. 

  여기에 개인적인 관계와 스토리가 더해지면, 그것은 온전히 나의 상처가 된다. 불특정 다수를 향하던 그의 태도가 나를 표적으로 이루어지면, 나 또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싸우든지, 피하든지. 대부분 나는 피하는 편을 택하는 편이지만, 때때로 어떤 집요한 사람은 그런 나를 뒤쫓아오면서까지 싸우자고 덤빈다. 싸워야 하는 게 분명한 상황에서, 그의 소원대로 싸워주는 게 그를 위한 것인지 나를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대체 왜 하필 내가 함께 싸워줘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나는 싸우는 나의 모습을 매우 싫어하기에, 차라리 그냥 속절없이 당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살아온 시간에 비해, 그런 일이 꽤 많았던 편인 것 같다. 세상에 그런 일을 한 번도 겪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겠지만, 나는 유난히 그런 일들, 그런 사람들을 만났다. 

  가장 믿었던 사람이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고, 가장 좋아했던 사람이 나를 심판대에 세웠다. 가장 친밀했던 사람이 나를 저주했고,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를 위협했다. 나를 사랑한다고 했던 사람이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고, 마음을 나눴던 사람들이 내 영혼을 찢어놓았으며, 내가 가장 의지했던 사람이 나를 버려두었다.


  나는 아팠고, 절망했다. '외로운 게 낫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차라리 외롭자'라고 다짐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외로움이라는 상자를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 사는 삶을 택했다. 


  어떤 사람과도 두 번 이상 만나지 않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한번 간 식당, 카페, 편의점은 다시는 가지 않을 정도였다. 배달음식도 항상 새로운 집에서 시켰다. 택배는 늘 문 앞에 놓고 가도록 했다. 택배 아저씨가 떠나는 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나는 문을 빼꼼히 열고 택배를 집 안으로 가져왔다. 어쩔 수 없이 택배를 경비실에 맡겨야 할 때는 경비아저씨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고맙습니다'라는 말도 들릴 듯 말 듯 하고서는 얼른 택배박스만 가지고 황급히 나왔다. 

  그 누구와도 새로운 친분을 쌓기 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일요일마다 교회를 갔는데, 집에서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가서 예배만 드리고 나왔다. 한번 간 교회는 다시는 가지 않고, 다음 주가 되면 또 다른 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렸다. 친구 한 명이 자기네 교회로 오라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나는 어떤 친분도 쌓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외로움 속에 잠자코 웅크리고 있었지만, 그러나, '다시 사람'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음을 필연적으로 알았다. 나는 결국 사람이었다.  


 

  세상의 모든 고전과 예술, 자연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세상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고. 그리고 그건 사실이다. 내가 믿든지 안 믿든지, 그건 사실이다. 모든 생명체는 각자 빛나고,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 가장 생생해진다. 지금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은 썩은 내가 진동하더라도, 그래도 세상은 원래 아름다운 것이 맞다. 


  홀로의 시간 속, 나는 이 '사실'과 나의 '경험' 사이에서 분투했다.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사실'이 맞다. 세상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내 '경험'은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결론이 났다면, 나는 이제 세상으로 나가 사람을 만나야 했다. 다시 세상을 살자. 또 사람을 만나자. 다시 한번 나가보자. 


  그러나 내 발걸음은 여전히 위태로웠고, 내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행동을 취할 수가 없었다.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다. 계절이 몇 번 바뀌었다. 그러는 동안 '이겨내야 한다, 이건 심리싸움이야, 정신승리가 필요해'라고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다. '어쩌면 나는, 인생 총량의 법칙에 따라, 평생 만나야 할 안 좋은 상황과 어려운 사람을 이미 다 만났을 수도 있다'라는 스스로의 위안까지 해가며 쿵쿵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지난여름의 어느 날, 단전에서부터 용기를 쥐어짜 드디어 d-day를 잡았다. 필라테스 센터에 등록하기로 한 것이 그것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고 눈을 마주치기 위해 여러 번 심호흡을 해야 했다. 무슨 대단한 친분을 맺는 것도 아닌데, 그런 표면적인 관계에서조차 나는 손가락, 발가락에까지 힘을 주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것이 나의 첫 스텝이었다. 

  덕분에 드디어 두 번 이상 만나게 된 사람이 생겼다. 물론 인사로 시작하고, 인사로 마치는 것 이외에 다른 친분을 쌓지는 않았다. 별것 없었다. 하지만, 이 한 걸음으로, 외로움 상자 안에 갇혀있던 나의 세상은 스멀스멀 변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7개월 정도 지났다. 단골 카페가 생겼고, 동네 친구도 생겼다. 택배 아저씨, 경비아저씨의 눈을 바라보며 "고맙습니다"하고 인사하고 가끔 음료수를 건네기도 한다. 치킨 배달은 한 집에서만 시키고 있고, 쿠폰을 모아 사용할 만큼 많이 간 빵집도 생겼다.

  엄청난 발전이다. 물론 나는 아직도 누군가를 만날 때 심호흡을 하고, 주먹을 꼭 쥔 채 대화를 한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라도 사람을 만난다. 나는 사람이기에. 


  그런데 이렇게 세상을 살아오고 있던 나에게, 그 질문은 실로 심장을 찌릿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혹시, 사람이 무섭지는 않아요?"


  나는 나의 지난 시간들을 하나씩 다 떠올리며 숨 고르기를 했다. 그 사람은 나의 눈빛이 떨어지는 것도, 어깨가 내려앉는 것도 눈치챘는지, 잠시 아무것도 더 묻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무서움'이라니. 내가 차마 정의 내리지 못하던 유일한 단어였다. 불안, 절망, 좌절, 낙담, 고생, 배신감, 어려움, 고단함, 실망과 같은 여러 부정적인 단어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입 밖으로 내지 않으려 했던 한 단어. 어쩌면 그동안 나는 그 단어를 마주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무섭다'라고 입 밖으로 말해버리면,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 만큼 무서워질까봐. 용기든 노력이든 낼 수 없을 만큼 쪼그라들까봐. 

 그걸 이제야 알았다. '무서움'이었구나. 그토록 바들바들 떨던 나의 모든 모습들은 '무서움' 때문이었구나. 이제는 드디어 내가 이 단어를 인정할 수 있게 되었구나. 

 

  나는 천천히, 그러나 또렷이 대답했다.

  "무서워요. 정말 무서워요. 그런데 안 그러려고요. 안 그러려고 노력 중이에요."

 

  말하고 보니 느낌이 꽤 괜찮았다. 이걸 인정해도 괜찮을 만큼 나는 많이 건강해졌다. 




  경험의 힘은 살벌하다. 한 번 겪은 상처와 트라우마는 뼛속 깊이 새겨진다. 이걸 극복해 내기 위해서는 시간도 어느 정도 지나야 하지만, 개인의 노력도 대단히 필요하다. 


  경험 때문에 나는 사람을 무조건 믿지는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안 믿지는 않으려고 죽을 만큼 노력하고 있다. 결국 사람을 보는 건 나의 '보는 눈'인데,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판단하는 나의 '보는 눈'은 매우 불완전함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그동안 내가 본 면면들, 내가 경험한 그 사람의 모습을 종합해 보고 결론을 내리지만, 사실 내가 볼 수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은 매우 한정적이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가'하는 질문에 있어서 역시 그 사람을 얼마나 오래 봤든, '그 사람 자체'가 어떤 지는 알 수 없다. 내가 봤던 건 그 사람의 일부분에 불과하니까. 오래 봤다고 무조건 신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처음 봤다고 무작정 경계해야 하는 것도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보는지와 무관하게, 믿을 수 없는 사람은 그냥 믿을 수 없는 사람이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그냥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내가 얼마나 보아 왔는지, 어떻게 판단하는지와는 무관하게, '진짜'인 사람이 있다. 그런 '진짜'가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이 나의 이 악착같은 삶에 크나큰 위로가 된다.

  다만 '진짜'를 만났을 때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알아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또 두려워진다. 



  얼마 전, 나에게 만남의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며 기도해준 분이 있었다. '만남의 축복'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난 울어버리고 말았다. 


  이거였다.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거였다. 내가 그동안 원하고 원했던 것, 움켜쥐고자 했던 것,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에 있어서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지쳐서는 안 된다고, 단념해서는 안된다고 외로움의 상자 속에서 중얼거리던 그것, 그리고 어떻게든 상자 밖으로 나와야 한다며 나를 내내 이끌었던 바로 그것. '진짜'를 만나는 축복. 






  나는 오늘도 마음을 열어요.

  충분히 조심스럽게, 그러나 충분히 과감하게.


  이상한 사람들과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이 세상에서, 마음을 열기 위해 무서움을 무릅쓰고 바들바들 떨며 부단히 애쓰고 있어요. '진짜'를 만났을 때 제발 지나쳐 보내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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