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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Mar 04. 2020

행복 말고 만족



  서른이 된 날, 나는 해방되었다. 




  이십 대 후반의 대한민국 여성에게는 얄궂은 '틀'이 씌워진다. 나는 이 틀에 갇히지 않으려고 푸드덕푸드덕 몸부림을 쳤다. 그래서 나의 스물일곱 살, 스물여덟 살, 스물아홉 살은 고군분투의 시간이었다. 


  이 사회에서 이십 대 후반의 여성은 '아직 어린 여성'이었다. 충분히 존중받아야 하는 사회의 일원임에도 기본적인 예의와 존중을 받지 못할 때가 많았다. '어린 여성'이라는 틀은 참으로 가혹했다. 

  이십 대 초중반, 사회초년생 때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싶어 그러려니 하더라도, 몇 년이 지나도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가볍게 쓱 지나가기 일쑤였고, 무시와 홀대는 일상. 모든 접대는 '어린 여성'의 몫이었고, 심한 경우에는 성희롱이나 성추행도 종종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미투 캠페인은 정말 의미 있는 움직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미 굳어질 대로 굳어진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나는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었다. 동안이 되고 싶어 안달 난 세상에서, 나는 오히려 동안인 게 컴플렉스였다. 오죽했으면, 나이 드는 게 소원이었다. 아니, 최소한 나이 들어 보이는 게 소원이었다. 최소한 '어린 여성'이라는 이유로 나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으면 했다. '어린 여성'만 아니라면 나는 대우받아야 할 이유가 넘쳐났다. 나는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었고, 누구보다 꼼꼼하고 성실하게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나이 들어 보이려 메이크업을 조금씩 진하게 했고, 헤어와 액세서리도 신경 썼다. 전문성을 드러내기 위해 늘 정장을 입었고 구두를 신었으며, 가방도 묵직한 가방으로 챙겼다.  

  특별히 말투에 신경을 많이 썼다. 가능한 "~예요"보다는 "~습니다"를 많이 쓰려 노력했다. 또, 대부분의 젊은 여성들이 "아닙니다아~"처럼 말꼬리를 길게 늘이는 경향이 있는데, 나에게도 이 습관이 깊게 배어 있어서 말꼬리를 뚝 끊고 느낌표를 붙이는 연습, 즉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처럼 말하는 연습을 끊임없이 했다. 내 말투를 녹음해서 다시 들어보기도 여러 번. 


  그러는 와중에 '그들의 틀'이라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것이었다. '아직 어린 여성'이라고 가볍게만 대하던 이십 대 후반의 여성에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이상한 의무와 책임을 던졌다. 특히 결혼. "어서 결혼해야지.", "서른이 되기 전에는 시집갈 거지?"와 같은 것들. 이런 조언 아닌 조언을 하는 사람들은 나를 어리다는 이유로 충분히 존중하지는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그만하면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네'라는 태도로 나를 강요했다. 그럴 때면 나는 그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씩 웃고 지나쳤다. 듣기 싫다는 표현을 적당히 드러내면서도 크게 문제 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흘려듣는 사회적 스킬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그들의 눈빛과 태도로부터, '그들의 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발버둥 쳤다. 외모, 말투뿐 아니라, 필요한 공부도 열심히 했고, 전문지식도 더 쌓으려 했다. 야근과 외근을 불사하며 열심히 일했고, 경조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하며 의리를 빛냈다. 시간은 꽤 걸렸지만 나는 능력으로 조금씩 인정받았고, '일 다운 일'을 하는 날도 찾아왔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참으로 놀랍게도, '그들의 틀'이 내 안에 파고들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러 가지 것들을 당연히 양보받으려 했고,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어리다'는 핑계를 들고 있었다. 심지어, 결혼. 나는 점점 다급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그들의 틀'이 내 안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는 걸 인식하고, 나는 경악했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이전의 노력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큰 의지와 다짐이 필요한 일이었다. 자꾸 '이십 대 후반의 여성'이라는 틀이 속에서 문득문득 올라왔다. '난 아직 어려서', '난 여자니까'라는 생각이 자꾸 나를 얽맸다. 그 와중에 서른이 다가온다는 사실은 나를 하루하루 옥조였다.


  이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는 내 안의 나와 분투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머리를 휘저었고, 몸을 쓰고 힘을 썼다. 그런데도 불쑥불쑥 드는 생각과 감정들은 통제불능이었다. 나는 자꾸만 '어린 여자'라는 핑계로 편안하려 했고, '이제 곧 서른'이라는 불안감은 어떻게 없애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노력하고 싸우고 분투했지만, 결과적으로 '이십 대 후반의 여성'이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결국 '서른'이 딱 된 날이었다. 그날의 그 심경이 지금도 생생하다. 

  "휴, 드디어 해방이구나." 


  그토록 애썼는데, 그렇게나 아등바등 애썼는데! 나는 이십 대 후반에서는 결국 극복하지 못했다. 

  나에게 자유를 준 건 '서른'이었다.


  (물론, 그동안의 나의 노력들이 아무 의미 없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그 엄청난 노력들이 쌓이고 쌓여 서른이 된 날 한꺼번에 몰려왔을 테니까.)


  






  모두들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지만, 과연 '행복하게들 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행복에는 기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이 정도는 있어야 행복할 수 있어", "이렇게 해야 행복할 수 있어". "행복하기 위해서는 저렇게 해야 해."


  그냥 다만 행복하고 싶을 뿐인데, 행복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너무나 필요하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하고, 번듯한 직장에 취직해야 하고, 서른이 되기 전에는 결혼을 해야 하고, 서울에 아파트가 있어야 하고, 매끈한 자동차도 있어야 하고, 1년에 한 번 정도는 해외여행도 해야 하고, 아이도 낳아야 하고, 아이가 또 공부를 잘해야 하고, 아이가 또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하고, 번듯한 직장에 취직해야 하고, 결혼을 해야 하고, 또...

  그러다 보니 행복하기 위해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된다.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견딘다. 이유는 단 하나다. 행복하기 위해서. 


 "행복에 대한 질문은 보통 우리가 행복한 삶이 어떤 모양인지를 안다고 가정한다. 행복은 종종 멋지고 사랑스러운 것들이 -배우자, 자식, 사유재산, 에로틱한 경험- 줄줄이 늘어선 결과로 묘사되지만, 잠깐만 생각해보면 세상에는 저것들을 다 갖고도 여전히 비참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머리에 떠오른다." 

 "사람들은 마치 하나의 행복한 결말을 가진 하나의 좋은 플롯만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삶이란 사실 우리 주변에서 무수히 다양한 형태로 꽃을 피울 수 -그리고 시들 수- 있다." 

 "행복을 인생의 최우선 목표로 정하고 좀 더 행복해지려는 노력을 중심에 두어 삶을 꾸리는 것은 실제로 행복해지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리베카 솔닛,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문제는, 자기들만 그렇게 사는 게 아니라, 그 가치관을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하여 강요한다는 것이다. 이십 대 후반의 여성이었던 나에게 "어서 시집가야지"라는 말은, 시집을 가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전제로 하는 말이었다. 이는 즉, 결혼을 하지 않은 이십 대 후반의 여성인 나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대체 무슨 권리로 나의 행복을 정의했던 것일까.


  서른이 되고부터는 "어서 시집가야지"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서른의 미혼 여성에게는 조금 조심스러운 말이었다고 생각돼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서른이 된 해방감을 온몸으로 누리는 나의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십 대 후반'의 '미혼' '여성'이라는 굴레로부터 완벽히(정말 완벽히!) 벗어났고, 사회가 세워놓은 틀이 또다시 나에게 다가올 때마다 적극적으로 나를 방어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내 손으로 척척 해냈고, 조금 힘이 들더라도 직접 발로 뛰며 일했다. 누군가 나에게 '결혼'에 대해 성급하게 이야기를 꺼내면, 나는 지체 없이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게 먼저겠죠"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비혼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결혼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싶지는 않았다. 



 

  그 이후 또 몇 년이 흘러, 이제는 서른네 살이 되었다. 


  삼십 대 중반에 들어서니, 그전보다 조금 더 자유로워진 느낌을 받는다. 현재의 나는 나의 삶이 매우 만족스럽다. 그동안 물론 어려운 일도 많았고 힘든 사람도 많이 겪었지만, 그 모든 것들이 내 인격과 영혼을 성숙하게 했다.


  어떤 사람들은 '늦은 나이'라고 한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는 늦은 나이. 회사를 새로 들어가기에도 조금 늦었고, 기술을 배우기에도 조금 늦었으며, 가정을 꾸리기에도 조금 늦은 나이라고. 삼십 대 중반쯤 되었으면 뭔가 이뤄놓은 게 있어야 하고, 그걸 바탕으로 안정감 있게 살아가야 한다고. 아무래도 '그들의 행복의 기준'에 미치기에 나는 여러모로 늦은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뭐든 할 수 있는 나이'라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든다. 나는 마냥 어리숙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능숙하고, 폭풍 같은 성장을 꿈꿀 만큼 젊다.


  어렸을 때는 하고 싶은 게 있어도 능력이 부족하거나 시기가 적절하지 않아 할 수 없는 일이 많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은 때 할 수 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는데, 이제 이 타이밍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다. 나는 나의 의지와 나의 선택만으로 타이밍을 조절할 수 있다. 지금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다음에 하고 싶으면 다음에 하면 된다. 그렇게 나는 나의 인생을 만들어갈 수 있다.


  요즘 나는 매우 의욕적이다. 하고 싶은 게 넘쳐난다.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있고, 당장은 못하지만 언젠가 꼭 하고 싶은 일도 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느라, 그리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차근차근 준비하느라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하고 싶은 무언가가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올 때마다 나는 전율한다. 바라는 게 있고, 원하는 게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나는 자유로울 뿐 아니라, 이 자유를 내 삶 가득 채울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이토록이나 살아있다. 







  '그들의 틀'은 행복을 지향한다지만, 나는 만족을 원해요. '그들의 거창한 행복'을 위해 나의 오늘의 만족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하루하루 꿈을 꾸고 나의 의지로 선택한 오늘을 살아요. 정형화된 행복한 삶이 아닌, 나의 특별한 선택이 모인 만족스러운 삶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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