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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Mar 21. 2020

자연스러운 것을 자연스럽게

균형을 이룬다는 것


  "바란쓰를 잘 맞춰야지."


  우리 아빠는 밸런스(balance)를 바란쓰라고 했다. 아빠는 이 '바란쓰'란 단어를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입에 올렸는데, 내가 "아빠! 바란쓰 아니고 밸런스!"라고 아무리 말해도 아빠는 늘 '바란쓰'라고 발음했다.


  아빠는 '균형'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집에 액자 하나를 걸더라도 한가운데 정확하게, 수평을 맞춰 걸어야 했다. 그래서 못 하나를 박는데도 꽤 시간이 걸렸다. 줄자로 전체 길이를 재고, 반으로 나누고, 액자의 길이를 재서 더하고 빼고, 못 박을 위치에 점을 찍고, 못을 박고, 액자를 걸고 수평을 맞추고, 2~3m 멀찍이서 실눈을 뜨고 균형이 맞는지를 확인하는 모든 과정은 '정성 가득한'이라는 표현보다는 '애정 넘치는'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지경이었다.

  우리 집의 모든 것들이 다 그런 식이었다. 가구를 놓는 위치, 그릇을 정리하는 방식, 책장에 책을 꽂는 순서, 커튼을 열고 닫는 정도, 그리고 수건을 접는 방식까지. 우리 집의 구석구석 균형이 맞지 않는 것은 없었다. 엄마는 다행히 아빠의 그런 성향을 좋아해서, 균형을 맞추기까지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고 힘이 조금 더 들더라도 어떻게든 균형을 맞추는데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나 또한 아빠가 균형을 맞추는 작업을 할 때마다 옆에서 함께 균형을 맞췄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자라서 그런지, 어떤 다른 장소에 갔을 때 균형이 맞지 않는 것을 보면 불편함을 느낀다. 삐뚤게 걸린 달력이라든지, 신발정리가 되어있지 않은 신발장이라든지, '갬성'이랍시고 테이블 배치가 어정쩡한 카페라든지... 웬만하면 그냥 모른척하지만, 내가 애착을 두는 곳이라면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손을 대기도 한다. 한쪽이 내려간 액자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살짝 들어 올려준다든지, 널브러진 슬리퍼들을 신발장에 넣어준다든지.)


  대충, 아무렇게나, 그냥 해서는 균형을 맞출 수 없다. 모든 균형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즉, 정성껏, 성의껏 한다는 의미이다. 못 하나를 박아도 정성껏, 책 한 권을 꽂아도 성의껏.


  그러므로 균형을 맞춘다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균형을 맞추는 데는 힘이 들기 때문에, 힘이 없어서는 균형을 맞추기가 매우 어렵다.  '정성'과 '성의'라는 단어는 이렇게나 엄청난 '힘'을 담고 있다. 

  그런데 힘을 들이지 않는(아니, 못하는) 사람들이 '그게 뭐라고', '그까짓 거', '에이, 뭘 그렇게까지'라며 가볍게 치부해버린다. 이런 생각으로는 정성을 쏟을 수가 없다. 정성을 쏟는다는 건 매우 힘을 쏟아야 하는 일이므로. 그래서 정성껏, 성의껏 하지 않으면 모든 일은 '그저 힘든 일'이 되고, 더 나아가 '별것 아닌 일'이 된다.


  하지만 힘을 들이고, 정성을 쏟아 균형을 맞춰놓은 모든 것에는 마음이 더 가기 마련이다. 이는 곧 애정이 되고, 이 애정은 또 스토리(story)가 된다. 그래서 우리 집의 온 구석구석에는 스토리가 넘쳐난다. 벽에 걸린 시계 하나를 봐도 그 시계를 그 자리에 걸기 위한 나와 너의 스토리가 있고, 작은 스킨답서스 화분 하나에도 나와 너의 스토리가 존재한다.

  물건들이 스토리를 갖는다는 것은 생명을 가지는 것과 같다. 나는 우리 집 곳곳의 물건들이 내뿜는 생명력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 대단함에 감동한다. 이 감동은 질리지 않는다. 한두 번 받고 끝나는 감동이 아니다. 나는 그들을 볼 때마다, 1년이든 2년이든 끝없이 감동하고 즐거워한다. 내가 즐거워하는 시간들이 더해지면서 나의 사랑은 깊어지고, 점점 진한 우리의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나는 축복받은 유전자 덕분에 이렇다 할 알레르기도 없고, 소화력도 타고난 편이어서 무엇을 먹든지 (상한 음식만 아니라면) 탈이 난 적도 없고, 아무리 많이 먹어도 체한 적도 없다. 그래서 맛있는 것을 많이 먹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밥 한 공기를 다 먹고도 아이스크림이나 과자 한 봉지로 입가심을 해야 했고, 마음먹고 먹으면 치킨 한 마리는 기본이었다. 한 번은 족발이 너무 먹고 싶어서 족발 세트 대(大) 자를 시켜 천천히 혼자 다 먹은 적도 있다. 그랬을 정도니 피자, 치킨, 햄버거, 떡볶이를 비롯해 빵, 과자, 아이스크림, 탄산음료는 나에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먹을 때마다 내 몸은 늘 나에게 소리쳐왔다. "이래도 되는 거야?"

  그동안 나는 이 외침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귀 기울일 이유가 없었다. 일단 맛있었고, 이렇게라도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건강식이라고 하는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서까지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다. 영양성분보다는 그저 '맛'에만 집중된 음식들로 몸을 채워온 지 어언 삼십여 년.


  특히 작년에는 빵을 엄청나게 먹었다. 그동안 빵을 먹긴 먹었어도 그렇게까지 먹지는 않았는데, 작년 여름부터는 대체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빵을 먹었다. 밥 대신 빵을 먹고, 후식으로 또 빵을 먹었다. 집 앞 빵집부터 시작해 유명하다는 빵집을 일부러 찾아가기도 하면서 하루 종일 빵만 먹었다. 빵을 그렇게나 먹으니 배가 불러 다른 걸 먹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월말 정산을 할 때면 나는 킥킥 웃었다. 빵값으로 쓴 돈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내가 먹은 빵들의 빙산의 일각

  그런데도 그다음 달에 또 빵을 먹었다. 매일 같이 빵을 먹는데도 빵을 보면 나는 또 흥분했다. 가는 빵집마다 그곳에 있는 빵을 종류별로 다 먹어보고 또 먹어볼 만큼 여러 번 갔다. 그런데 정말 어이가 없게도, 그 와중에 또 먹고 싶은 빵이 특정해서 생길 때가 있었다. 가장 심각했던 건 케이크 종류였는데, 생크림 케이크, 치즈케이크, 롤케이크 등 절대 혼자 다 먹을 수 없는(앉은자리에서 혼자 다 먹어서는 안 되는!!!) 그런 종류의 빵도 나는 먹어치웠다.


  그렇게 여름과 가을, 겨울을 보내면서, 빵순이를 넘어 빵 귀신이 되어 어마어마한 양의 빵을 먹었다. 어쩌면 평생 먹을 빵을 다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하필 작년의 나는 '매일 운동하기'에 열심을 내고 있어서 내 몸의 상태와 소리에 귀 기울이는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 몸이 소리 지르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 같음을 느꼈다. "몸이 밀가루가 되어가고 있어!" 그러나 하루아침에 빵을 끊는다는 건 나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이미 엄청난 빵 귀신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마치 운명처럼 브런치를 통해 어떤 한 레시피를 만났는데, 바로 '아몬드가루로 만드는 빵'이었다. 세상에! 아몬드가루라니! no 밀가루라니! 나는 당장 그 레시피를 저장해놓고 아몬드가루를 주문했다. 아몬드가루가 도착하자마자 나는 부엌에 판을 벌렸고, 이것은 나의 인생 첫 베이킹이 되었다.   


나의 인생 첫 베이킹 : 아몬드가루로 만든 컵케익

 

  이 날 이후, 나는 '건강하게 먹기'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지며, 레시피들을 찾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탄수화물과 당분으로 된 음식보다는 단백질과 식이섬유 위주의 음식들을 주로 찾아보았다. (그러면서도 빵이 먹고 싶을 때는 그냥 빵을 먹었다. 나는 굳이 억지로 참으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 했다. 나에게는 no stress 또한 매우 중요했으므로.) 브런치와 블로그, 유튜브 등을 보며 건강한 음식들에 대해 알아보다가, 어느 순간부터 책도 찾아보고 나름의 공부도 하게 되었는데,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 <착한 빵 에코 빵>, <문숙의 자연식>, <써니 브레드의 글루텐프리 홈베이킹> 등이 그 책들이다.


 오래전에 도축해 냉동 보관한 고기며, 몇 년은 선반에 놓여있던, 방부 처리한 뒤 깡통 포장한 재료를 불 위에서 몇 시간씩 조리해서, 이 썩은 음식에 갖가지 소스를 뿌려댄다. 대단한 식사다! (...) 이제 가공과 보존 처리를 거치면서 재료 본연이 특성이 없어지지 않은, 자연적이고 간단한 음식을 선택하는 것이 기본 지식이 되어야 한다. -헬렌 니어링(Helen Nearing),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Simple Food For The Good Life)>
 태양은 에너지의 중심 근원이다. 따뜻한 태양 광선은 인간의 먹을거리를 익히고 조리해준다. 천천히 투사되는 광선이 과일에 색을 주고, 견과를 익게 하고, 야채의 잎사귀에 색조를 띠게 한다. 이런 것들은 그 자리에서 제공될 수 있게 준비된다. 인공적인 방식으로 조리하는 것은 음식의 값어치를 떨어뜨리는 경향이 있다. -제임스 포크너(James Faulkener), <생식 식이요법(The Unfired Food Diet)>
 생사과에 소스를 뿌리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사과를 구우면(조리해서 사과를 '죽이면') 그때는 계피나 너트멕 설탕, 메이플 시럽, 건포도, 크림 등을 넣어 맛을 낸다. -헬렌 니어링(Helen Nearing),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Simple Food For The Good Life)>
 우리는 음식 그 자체의 성분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까지 먹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따끈한 현미밥에 상큼한 깍두기 한 개만 놓고 먹어도 속이 편안하다. 애쓰지 않은 밥상, 감추기 위한 노력이 들어가지 않은 밥상이기 때문이다. -문숙, <문숙의 자연식>

 

  여러 사람들의 케이스를 찾아보고, 이런저런 의학자료와 건강자료들을 공부하면서 나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싱싱한 재료, 최소한의 조미료. 나의 '건강하게 먹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의 '건강하게 먹기'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① 가능한 가공되지 않은 음식으로, 가능한 자연 그대로의 영양분이 살아있는 음식을 먹을 것.  

 ② 당분과 탄수화물이 주가 되는 음식이 아닌, 단백질과 식이섬유가 주가 되는 음식을 먹을 것.

 ③ 내 앞에 주어진 음식을 감사히, 맛있게 먹을 것.


  재료가 싱싱하면, 재료 자체의 맛만으로 얼마든지 맛있을 수 있다. 도심 한가운데서 먹는 물고기보다 배에서 갓 잡아 올린 물고기가 무조건 맛있는 것처럼, 재료 자체가 주는 맛은 그 어떤 조리법과 조미료로 만들어 낼 수 없다. 싱싱하지 않은 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려고 할 때 조리 과정이 복잡해지고, 점점 더 많은 조미료가 필요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 생활을 하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갓 잡아 올린 물고기와 갓 수확한 과일을 먹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직접 가서 먹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나는 지금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하기로 했다.


  '싱싱한 맛', '재료 본연의 맛'을 끌어올린다면 얼마든지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굳이 이런저런 조미료를 쓰지 않아도, 최소한의 소금만 쓰면서 얼마든지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다.

  대신 조금 부지런할 필요는 있다. 싱싱한 재료를 쓰려면 내가 직접 재배하지 않는 이상 자주 그리고 직접 장을 봐야 하고, 보관에도 신경 써야 하기 때문이다. 인스턴트나 가공식품과는 달리 신선식품은 보관기간이 짧은 데다, 가능한 한 빨리 먹어야 하기 때문에 처음 구입할 때부터 계획을 잘 세워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요즘처럼 배달음식과 반조리식품이 훌륭한 세상에서 일일이 재료 손질까지 해가며 무언가를 매번 만들어먹는다는 자체가, 매우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건강하고 맛있게 먹기 위해 부지런 떨었던 나의 밥상들


  '건강하게 먹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건강하지 않은 음식을 자제하는 것이다. 피자, 햄버거, 치킨, 떡볶이, 튀김, 과자, 아이스크림... 하지만 이미 이런 기름지고 달고 짠, 자극적인 음식에 길들여진 나의 입맛은 한 번씩 그런 음식을 간절히 떠오르게 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 나는 무작정 'NO'를 외치기보다는 3번은 참고 먹는 것으로 나만의 룰을 만들었다. 나는 '예외 없는 NO'로 인해 억지로 견디면서 스트레스받지 않기로 했으므로.

  직접 경험해보니, 3번을 참는 3일 동안 먹고 싶은 욕구가 자연스럽게 줄어들거나 사라졌다. 그러다가 만약 세 번을 참았는데도 정말 꼭 먹고 싶은 생각이 계속 든다면 나는 나의 욕구를 전적으로 인정하고 편히 먹었다. 여기에는 나의 '건강하게 먹기' ③번이 적용되었다. 내 앞에 주어진 음식을 감사히, 맛있게 먹을 것.


  나는 최대한 내가 구할 수 있는 건강한 재료로 건강하게 먹되, 주어진 재료와 밥상을 감사히 맛있게 먹는 것으로 나의 '건강하게 먹기'를 구축했다.


  이렇게 나름의 규칙에 따라 '매일 운동하기'와 '건강하게 먹기'를 하며 사는 하루들을 쌓다 보니, 나는 하루하루 내 몸의 변화를 느낀다. '매일 운동하기'로 인해 근육의 움직임과 힘을 느끼고, 심폐기능의 발전을 직접 느끼면서 에너지 가득한 오늘을 살게 된 동시에, '건강하게 먹기'를 하며 음식 본연의 맛을 즐기고 풍부한 생명력을 누리게 되었다.




  만들어진 모든 것은 그 이유와 목적이 존재한다.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그 '기능'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떻게 기능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기능하는지.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 만들어진 이유가 분명히 존재하고, 기능하는 방법이 존재한다. 우리 몸은 그저 앉고 눕기 위해 만들어진 몸이 아니다. 가고 싶은 곳을 가게 하고,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이게 하는 게 우리 몸의 기능이다. 그것이 우리 몸이 향하는 '균형'이다. 본래의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로써의 균형.


  우리의 몸은 근본적으로 균형을 향한다. 몸의 불균형은 누구보다도 본인이 가장 잘 안다. 운동을 해야 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걸 몸은 이미 알고 있다. '이대로는 안된다'라고 몸의 구석구석에서 소리 지르는 걸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잘 안다. 그럼에도 운동하지 않고, 인스턴트식품을 찾고, 달고 맵고 짠 야식을 먹는 것은 균형에는 '힘'이 들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책상 앞에만 앉아 과자를 입에 털어 넣는 행위는 우리 몸의 본래의 기능에는 부합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삶의 자세가 이미 너무도 편하게 느껴진다면, 즉 불균형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면, 이미 그렇게 오랜 세월 살아와 무엇이 균형을 이룬 상태인지도 모른 채 불균형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본래의 몸 상태'를 찾아가려면 우선 불균형 상태임을 인식하고, 균형을 이루기 위한 힘을 키워나가야 한다. 다시 말해 '본래의 몸 상태'를 찾아가는 것은 '균형'을 찾아가는 일로, 이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벽에 못 하나를 박는데도 숱한 과정과 시간이 필요한데, 하물며 우리 몸은...

  하지만 일단 정성과 성의를 쏟으면 벽에 못 박는 것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훨씬 큰 감동과 감격이 삶에 넘쳐난다. 에너지 넘치는 오늘과, 풍부한 생명력을 즐기는 삶!


  '매일 운동하기'와 '건강하게 먹기'를 하며 살다 보니, 내 몸이 본래의 기능, 즉 균형을 찾아가는 움직임을 감지하게 되었다.


  매일 아침 유산소 운동과 근력운동, 그리고 꼼꼼한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고 활성화하다 보니, 언젠가부터,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다리, 허리, 어깨, 목에 뻐근한 느낌이 찾아오는 걸 느끼고 있다.(그 전에는 이런 느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살았다. 그저 그러려니 했던 것 같다.) 내 몸이 '불균형'해지고 있다고 나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한 번씩 일어나서 목을 돌리고 옆구리를 늘리며 다시 본래의 몸 상태로 균형을 맞춘다.


  무엇보다 놀라운 변화는, 먹고 싶은 음식이 떠오를 때 그것이 인스턴트나 패스트푸드가 아니라는 점이다. TV로 치킨 먹방이나 피자 광고를 봐도 먹고 싶은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대신 갑자기 따끈한 두부가 먹고 싶다거나, 토마토 리조또에 병아리콩을 넣어 먹으면 맛있겠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요새는 단호박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어쩜 그렇게 맛있는지, 시장에서 자꾸만 단호박을 사서 품에 끌어안고 집에 돌아온다. 단호박을 찌고, 굽고, 볶으면서 나는 실실 웃는다. 이 기분은 내가 배달앱을 찾아보며 설레 하던 바로 그 기분과 다르지 않다.


단호박과 함께 하는 나의 밥상들


  자연 본래의 것으로의 균형을 찾아가고 있다. 지난 1년간 '매일 운동하기'와 '건강하게 먹기'라는, 아주 힘들고 고단했던, 그러나 의지와 정성으로 힘을 쏟았던 나의 지난 시간들이 빛을 발하고 있다.


  그 모든 순간순간에는 스토리가 존재하는데, 이 스토리는 나의 모든 시간들과 노력들을 사랑하게 한다. 나는 매일 온 힘을 다해 정성껏 내 몸과 마음을, 그리고 영혼을 살려냈다. 누군가는 '그게 뭐라고', '그까짓 거', '에이, 뭘 그렇게까지'라며 가볍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어떤 것보다도 절실했고 절박했다. 그 모든 순간이 나에게는 기도였다.


  무엇보다 감동적이었던 것은 내가 균형을 갈망하고 노력했던 것 이상으로, 내 몸과 마음은 나름의 균형을 스스로 찾아가는 힘으로 나를 도왔다는 것이다. "우리 몸은 나름의 균형을 스스로 만들어간다. 우리 몸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 (작가의 이전 글 <네, 저 운동해요. 근데 다이어트는 안 해요> 中) 그 모든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며, 나는 감탄하고 감격한다.


  내 몸은 균형을 향하고, 내 마음은 힘껏 균형을 이루어낸다.  

  내 영혼은 이 균형에 감동하고 즐거워한다.

  나는 이렇게나 나를 애정한다.  


  바란쓰가 잘 맞아 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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