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남긴 선한 영향력
내 20대가 가장 빛나게 해준 너에게
to. sy
취업준비를 하던 시절 유난히 네게 거짓말을 많이 했던 것 같아.
'카페에서 자소서 쓰는 중이야.'
'책 읽는 중이야.'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무기력증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는 남자친구이기 싫어서 늘 무언가를 하는 척 해야만 했어.
그 당시의 나는 그랬던 것 같아. 친구들이 학과에 맞추어 금융권 취업 준비를 할 때, 하고 싶은 일을 찾는다고 여행을 다니고, 워킹홀리데이를 갔지. '넌 용기있다' 라는 친구들의 말에 나는 뭔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금융권에 취업한 친구들이 '돈은 많이 주는데 일이 재미가 없어' 라고 말할 때에는 '저런 일을 계속하면 돈을 많이 벌어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며 가여워했어.
하지만 막상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취업을 하려하니 내가 이루어 놓은 것은 하나도 없고, 원하는 회사의 문턱은 너무 높고, 연봉은 내 생각보다 한참 낮더라. 지원할 회사가 없어 지원할 회사를 찾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어. 그러다 가끔 들어간 인스타그램에서 새로 산 차를 자랑하는, 해외여행의 행복한 모습들을 보여주는 친구들의 피드를 보고 나면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졌어. 그 시간들이 반복되자 내 머릿속에 모든 것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만능 열쇠가 하나 자라나더라.
'노력도 재능이야.'
이 열쇠 하나면 나의 무기력증이 모두 합리화되더라고. 노력할 재능이 있었음 내가 서울대를 갔겠지라며. 지원할 회사가 없다는 명목으로 게임방에 앉아있다가 내 자신이 한심해질 때면, 자소서를 쓰기 싫어 술을 퍼마실 때면 '노력도 재능이야. 노력할 재능이 없는걸 어떡하냐' 라는 생각 하나로 합리화 시킬 수 있었어.
하지만 참 다행이었던 것은 내게는 네가 있었어. 네가 있어서 최소한의 죄책감을 가질 수 있었지. 뭐하냐는 카톡에 자소서를 쓰고 있다고 거짓말을 할 때마다, 늦은 밤 전화 너머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하루를 애둘러 얘기할 때마다 생기는 부끄러움에 실낱 같은 노력이라도 할 수 있었어. 배울 점이 없는 무능한 남자친구가 되기는 싫었거든.
인턴 합격 전화가 왔던 날, 내 기억에 남은 것은 합격의 기쁨이 아니라 나보다 더 기뻐하던 네 모습이야.
"네, 안녕하세요." 라고 내가 전화를 받던 순간부터 어린이날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마냥 들뜬 모습으로 날 올려보던 네 모습,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라는 나의 말이 끝나기 전에 이미 날 껴안고 해맑게 웃던 너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 그 날 합격해서 기분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안나. 다만 나의 아주 작은 성공에 부모님이 아닌 다른 누군가 나보다 더 기뻐한다는 것이 너무 감격스러웠어. "오빠가 마음 먹으면 할 수 있다 했잖아." 라는 너의 말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무기력해질 수가 없더라.
덕분에 그 다음 공채를 준비할 때는 무기력해질 틈이 없더라. 들떠 있는 네 표정을 다시 보고 싶었거든.
이번에는 더 잘해서 더 기뻐하는 표정을,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 그 힘으로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꽤나 잘 되었던 것 같아.
참, 넌 단 한 번도 날 의심한 적 없이 믿어주었네. 1주년이 지나 제일 달달하던 때에 느닷없이 워킹홀리데이를 간다는 내게 망설임 없이 "잘 갔다와. 오빠가 꿈 찾는 일인데, 그게 먼저지." 라고 응원해주었고, 27살의 늦은 시기에 새로운 공부를 고민하던 내게 "그래, 오빠는 그 쪽 일이 잘 맞을 것 같았다니까? 우선 시작해봐." 라고 등떠밀어주었어. 20대의 선택의 기로에서 네가 주었던 조건없는 믿음과 응원이 우유부단한 내게 책임감을 만들어주었고, 추진력이 되어주었어. 참 많이 고마워.
헤어진 사이에 굳이 이 편지를 전하지는 않을게. 그냥 내게 선한 영향력을 주었던, 20대에 가장 고마웠던 사람으로 마음에 잘 간직할게. 너가 취업해서 승승장구하는 모습까지 함께 보고 싶었는데 좀 아쉽다. 해외취업이 쉽지 않겠지만, 그 곳에서 많은 사람들한테 사랑 받으면서 행복하길 바랄게. 너의 능력을 시기하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자존감 깎아먹지 말고 널 아껴주는 사람들만 생각하면서 나아가길 바랄게. 날 가장 잘 알아주고 인정해주었던 사람.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