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첫 맞짱
처음으로 맞짱을 뜬 고1의 기억
"이새끼가 돌았나. 너 미쳤냐?"
내가 내뱉은 한마디 뒤에 내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다. 그대로 나는 그 녀석에게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주변에 있는 친구들은 달려와 우리를 말렸다. 친구들이 나를 말리는 사이 종이 쳤고, 어쩔 수 없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너무 분했다. 나는 제대로 한 대 맞았는데, 말리는 친구들 때문에 되돌려 주지 못했다는 것이 분했고, 옆자리에
앉아있는 여자친구가 내가 얻어맞은 것을 목격했다는 것도 분했다. 수업시간, 선생님이 다른 곳을 보는 사이 나는 그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그 녀석을 발로 차 바닥에 눕히고 주먹을 날리려던 찰나 주변 친구들이 달려들어 나를 잡아끌었다. 몇 번이고 달려들었지만 선생님까지 달려오셔 말리시는 바람에 내 복수는 실패했다.
"끝나고 남아라 씨발놈아"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반 남자애들은 쉬는 시간이면 교실 뒷편 사물함 앞에 모여 노바운드를 하곤 했다. 여기서 노바운드란 여러 명이 원을 만들고 공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주고 받는 공놀이다. 그날따라 기분 상하는 일이 있는지 그 녀석의 공이 거칠었다. 3m 남짓의 거리에서 공을 주고 받는 놀이인데 공을 세게 차댔다. 그러다 중학교에서 같이 고등학교로 진학한 내 친한 친구의 얼굴을 맞추고 말았다.
"아! 야 너 오늘 왜이래"
"띠꺼우면 빠지던가"
"이새끼가 돌았나 너 미쳤냐?"
순한 친구가 그 녀석의 말에 한 마디도 못하는 것을 보고 나섰다가 죽빵을 맞은 것이었다. 한 대 맞은 이후부터는 사건이 어찌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맞은 광대뼈가 부어오르고 욱신거릴수록 돌려줘야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조회가 끝나고 나니 그 녀석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녀석에 전화를 걸었다
"어디냐?"
"집 간다"
"쫄았냐? 맞짱뜨자고"
"나 집 가야돼. 뜨고 싶으면 우리 집으로 와"
"장난하냐? 진짜 뒤지기 싫으면 빨리 와라"
10분여의 실랑이 끝에 그 친구가 다시 학교로 돌아왔고, 우리는 몇 명의 구경꾼과 함께 학교 뒤에 있는 아파트 사잇길로 향했다. 사실 나는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었다. 보통 친구들을 잘 이끌고 다니는 성격이었고, 일진은 아니지만 일진들과 별 트러블 없이 잘 지내는 편이어서 시비를 걸릴 일이 없었다. 남자들의 싸움은 정말 싸움을 잘하느냐 못하느냐 보다는 이미지와 기세가 99프로인지라 싸울 일이 없었다. 그래서 패기있게 그 녀석을 불러놓기는 했는데 어떻게 싸움을 시작해야할지를 몰랐다. 그런 나를 더 당황시킨 것은 꽤 싸움 경험이 있어 보이는 그 녀석의 몸동작이었다.
"먼저 쳐"
이 한마디와 함께 스텝을 밟으며 내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당황도 잠시, 긴장감이 확 올라오면서 흥미진진해지기 시작했다. 잽 두방을 맞혔고, 그 녀석의 입술이 터졌다. "씨발" 이라는 욕설과 함께 그 친구도 저돌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흥분을 했는지 크게 휘두르는 훅들이라 쉽게 피할 수 있었다. 만화나 영화를 볼 때마다 '어떻게 주먹을 피해. 다 구라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신기하게도 진짜로 주먹이 피해진다. 주먹이 출발한 것을 본 순간에 고개를 숙였다가 일어서면 그 녀석의 주먹이 반대쪽으로 넘어가있다. 몇 번의 주먹을 피한 후 그 친구의 한 쪽 다리를 붙들고 다른 쪽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뒷목을 잡고 등 위에 올라탔다. 그런데 그 순간 뭘 해야할지를 몰랐다. 사람도 때려 본 사람이 때린다고 그 녀석에게 주먹을 막 날릴 수가 없었다. 그대로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아주머니께서 "학생들! 하지마!" 라고 외치셨다. 아주머니를 핑계 삼아 그 녀석을 다시 일으켰다. 아주머니가 지나가시고 그 녀석과 나는 어정쩡하게 서로를 마주보고 서있었다. 더 싸워야 할지, 그만 싸워야 할지 감이 안잡혔던 것 같다. 그만 싸우고 싶지만 구경꾼들까지 몰린 상황에서 이제는 자존심 싸움이 되었고, 먼저 그만 하자는 말을 서로 꺼낼 수가 없었다.
아까와 같이 그 녀석이 스텝을 밟으며 빙빙 돌기 시작했고, 2회전이 시작되었다. 2회전 역시 내 선공으로 시작되었다. 그 녀석의 오른쪽 허벅지에 내 왼발 로우킥이 세게 얹혔다. 그런데 아까와는 다르게 그 녀석이 흥분해서 달려들지 않았다. 크게 휘두르는 훅 대신 스트레이트를 날리기 시작했다. 10분 전 주먹을 피할 수 있다는 내 생각은 잘못되었다. 스트레이트는 훅보다 얼굴에 도달하는 시간이 짧고, 그 다음 공격이 콤보로 들어오기 때문에 고개를 숙여 피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 친구는 중학교 때 복싱을 꽤 오래 배웠다고 한다. 그 녀석이 내지르는 스트레이트는 내 안면에 하나 둘 꽂히기 시작했고, 뒤로 밀려 넘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주고 받다보니 어느 순간 서로 자세만 취하고 공격을 하지 않는 시기가 왔다. 누가 쓰러진 것도, 누가 말린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아 끝났구나' 라고 생각이 드는 타이밍이 찾아왔다. 서로 다가가 "고생했다"라고 말을 하며 어깨를 토닥이며 교복을 챙겨입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패고 싶었는데 진짜 싸우고 나니 그 미운 마음은 이미 저 멀리로 가있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엘리베이터를 타서 처음으로 내 몰골을 확인했다. 큰 상처는 없었으나 처음 크게 맞았던 광대가 더 크게 부풀어 올랐고, 다른 광대는 멍이 자리잡고 있었다. 흰 와이셔츠는 첫 잽을 맞았을 때, 터진 그 친구 입에서 나온 피로 군데군데 얼룩져있었다.
'엄마가 보시면 생난리나시겠다'
현관물을 열고 하교인사를 할 틈도 없이 화장실로 직행하여 얼굴을 씻고,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핏자국은 아무리 빡빡 닦아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을 수록 뭔가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몰려왔다. 누군가를 때렸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맞았다는 것에 대한 서러움, 선생님과 여자친구, 친구들 앞에서 보여주었던 몰상식한 행동에 대한 자괴감, 부은 얼굴로 등교했을 때의 쪽팔림에 대한 걱정 등이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맞은 자리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런 감정과 고통을 꾹꾹 눌러담고 빨래를 계속 해나가던 중 엄마가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얘가 왜 집에 오자마자 저녁 안 먹고 화장실에서 빨래질이야!"
엄마 꾹꾹 눌러담던 감정이 터졌다. 쪽팔리지만..서럽게 울고 말았다.
"끄읍...끕! 친구랑 싸웠는데, 내가 친구 때렸어..흐윽..때리고 나면 속 시원할 줄 알았는데, 마음이 이상해. 하나도 시원하지 않고 기분이 나빠 흐읍"
"아이고 너가 얼굴이 이 정도면 그 친구는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거 아니야? 그런거면 미리 말해. 엄마 마음의 준비를 하게 깔깔깔"
엄마는 17살 먹은 아들 놈이 친구와 싸우고 와서 우는 것이 귀여우셨는지 나무라기보다 놀리셨다. 몇 일간 둘의 싸움에 대한 이야기가 회자되었고, 이내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게 내 최초의 맞짱 이야기다. 내 친구를 건드린 사람은 가만두지 않겠다는 정의감에 나섰다가 한 대 맞고, 친구들 앞에서 가오를 잃을 수 없다며 날 때린 놈을 불러내어 맞짱을 떴다가 두드려 맞고, 집에 가서 친구 때려서 마음이 안 좋다고 서럽게 운 이야기. 얼굴을 보고 이야기했더라면 msg를 가득 첨가해서 남자들의 격투기로 풀어 이야기했겠지만 글이기에 있는 그대로의 찌질함을 담아 처음으로 이야기해본다.
맞짱이라.. 앙금을 풀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일 수는 있으나, 생각했던 것만큼 속이 시원하지 않다. 그 순간만큼은 분하고 죽여패고 싶지만, 막상 정말로 때리고 나면 마음이 좋지 않다. 단순한 미안하다라는 마음과는 다르다. 딱 집어 말하기는 힘든데, '미안함, 창피함, 후회, 아픔' 등이 어울러진 감정이다. 이후 한 번의 맞짱이 더 있었는데 그 때도 똑같은 감정이었다. 앞으로는 되도록이면 맞짱으로 서로의 마음을 푸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싸움을 하고 싶다면 차라리 감정이 섞여있지 않은 스포츠로 하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