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1이 고3에게 고백하는 방법
삼귄다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사귀다의 사를 숫자 4라고 생각했을 때, 그 전 단계를 삼귄다고 한다.
썸과 사귀는 것의 중간 정도의 단계이다. 내 학창시절까지만 해도 썸, 삼귀다와 같은 개념은 없었다.
사랑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울부짖던 시대였다. 드라마 속 주인공은 나랑 살거나 나랑 죽거나 하나를 선택하라고 소리를 질러댔고, 모든 노래의 주인공들은 이별의 슬픔으로 인해 죽어갔다. 미니 홈피의 대문글에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글귀나 이별로 인해 죽어버리고 싶다는 글귀가 걸려있었고, 내 미니홈피의 작은 집 속에는 그녀와 내 미니미가 알콩달콩 살고 있었다.내반쪽, 내사랑, 마눌님 등 차마 지금은 입에도 담지 못할 이름을 일촌명으로 해두었고, 애인의 일촌평을 제외한 나머지 일촌평은 모두 삭제하여 애인의 존재를 뽐내었다. 사랑이라는 같은 감정이지만 그 때와 지금의 모양은 많이 다르다.
내 사랑의 모양은 사랑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던 시절의 모양을 쭉 유지해왔다. 첫 눈에 꽂히는 사람이 생기면 재고 따지는 것 따위는 없었다. 무조건 직진. 직진 정신은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생겼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이 시작하던 날, 부모님께서 나를 차에 태우셨다. 영문도 모르고 도착한 곳은 '사관 등용문 학원'. 군인 출신의 조교들이 생활을 통제하는 기숙학원이었다. 나를 내려준 부모님은 짐은 택배로 보내주겠다는 말만 남긴채 집으로 돌아가셨고, 나는 그 곳에 갇혔다. 중3 사춘기 소년의 선택권은 없었다. 도살장 끌려가는 소 마냥 강당으로 끌려갔다. 조교들은 TV에서나 보는 유격조교와 같이 선글라스를 쓰고 뒷짐을 지고 있었다.
"너네들은 앞으로 군인들과 똑같이 생활하게 될겁니다. 아침 6시 기상, 조회 및 아침체조를 30분 동안 할 것이며, 아침 식사를 하고 8시부터 10시까지 수업 및 야자가 있을 것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각 학년 별 조교 통해서 전달하겠습니다."
정신없는 하루가 흘러갔고, 아침 6시에 반강제로 일어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마냥 또 다시 강당으로 끌려갔다. 반쯤 감긴 눈으로 체조를 하고 있는데 오른쪽 가장 끝 줄에서 환한 광채를 보았다. 수백명의 사람들 가운데 그녀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키는 150 후반 정도였고, 이보영과 김현주을 닮은 외모였으며, 눈웃음은 세상 모든 눈을 녹일 정도로 따스했다. 도살장은 천국이 되었고, 그 날부터 매일 아침조회시간만을 기다렸다. 기상나팔이 불기 전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머리를 단장하고 아침조회에 나가 체조를 하면서 눈은 열심히 그녀를 찾았다.
일주일 정도 지나, 나는 불타는 마음을 참을 수 없었고 그녀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그녀는 고3으로 나보다 2살 연상이었는데, 그딴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3 형들도 마음에 큰 산불이 난 고1을 막을 수 없었다. 매점에서 내가 살 수 있는 가장 비싼 것을 샀다. 바로 스타벅스 모카골드. 커피 위에 친해지고 싶다는 쪽지를 붙여 고3 반에 들어가 그녀에게 음료를 전해주었다. 다음 날에는 찾아가 배드민턴을 치자고 들이댔다. 다음 날에는 찾아가 날이 춥다고 담요를 전해주며 들이댔다. 다음 날에는 날이 춥기 때문에 좀 걸어야 된다고 산책 좀 하자는 개소리를 하며 들이댔다.
한 달 내내 학원은 정신나간 예비 고1의 패기에 시끌벅적했다.
"야, 걔 이번에는 뭐 했대? 고백한거야?"
"은x가 받아줄리가 있겠어?"
밑고 끝도 없는 동생의 구애가 부담스러웠을 법도 한데, 누나는 잘 맞춰주었다. 함께 걸어주고, 배드민턴도 쳐주고, 급식도 먹어주었다. (사실 너무 들이대서 안 받아줄 수도 없었을 것 같다..) 그녀의 반응에 신난 나는 더 적극적으로 몰아붙였다.
공부하라고 넣어주신 학원에서 나는 끊임없이 구애를 하고 있었고, 마지막 날 그 구애의 끝을 보여주었다.
학원의 마지막 날 갇혀서 공부한 학생들을 위한 축제가 있을 것이라는 공고가 붙었고, 나는 그 날 고백을 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 당시에 난 무대공포증에 있었음에도 고백을 해야겠다는 신념 하나로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여러분이 예상하시는 그 노래가 맞다.
'내 여자라니까'.
나를 동생으로만...그냥 그 정도로만.. 누난 내여자니까.. 너는내여자니까~
미친 놈의 미친 선곡에 축제는 광란의 도가니였다. 노래가 끝나고 누나에게 내려가 부모님 면회 때 부탁해둔 머리핀과 꽃을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아주 놀랍게도 누나는 고백을 받아주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고백을 거절할까. 주변에서는 사귀라고 소리를 지르며 난리 부르스가 났는데..
뭐, 결과적으로는 3달을 못 만나고 좋은 누나 동생으로 지내자는 말과 함께 차였다.
그 당시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보다 내 좋아하는 감정을 표현하는게 앞섰던 것 같다. 상대가 날 좋아하는지 여부보다는 내가 상대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던 때였다.
그 이후로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무조건 직진이었다. 재고 따지는 일이 나에게는 더 어려웠다.
고등학교 입학 첫 날, 첫 눈에 꽂힌 친구 옆자리에 앉아 스타벅스 모카골드 커피를 전해주며 친해지고 싶다고 구애를 했고, 대학교 입학 첫 날, 첫 눈에 꽂힌 친구 옆자리에 앉아 너랑 친해지고 싶다며 구애를 했다. 사귀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여자친구가 우선이었다. 그 날의 기분은 어떤지, 현재 자존감의 상태는 어떤지 끊임없이 살폈고, 어떻게 하면 재밌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나로 인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고, 나와 있을 때 더 빛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나이가 조금씩 들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직진 정신이 맞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사랑을 주는 것보다는 상대방이 원하는 사랑을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제는 일과 사랑 사이의 적당한 밸런스에 대하여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초반에 너무 사랑을 불태우면 이후에 보이는 서로의 진짜 모습에 실망하게 되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경험하며 사랑을 불태우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다 보니 과연 '직진 정신'이 맞는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전 고등학교 때 3년간 교제했던 친구로부터 장문의 카톡 한 통에 이 고민은 종식되었다. 정말 뜬금없이 몇 년만에 온 카톡이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너와 헤어진 이후에 상처를 주는 사람들도 만났었는데 너와 사귀었던 기억 덕분에 '난 뜨겁게 사랑받았던 사람이다'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고, 그 상처를 오래 간직하지 않게 되었다. 늦게나마 고맙다."
벅찼다. 당시에는 그냥 내가 원하는 방식의 사랑을 쏟아부었던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나와의 연애가 상대방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이 카톡 한 통에 내 생각은 다시 명쾌해졌다. 이 세상에 신을 제외하고 완벽히 성숙한 사랑은 없다. 사바사, 케바케이며, 그 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릴수도, 그 때는 틀렸지만 지금은 맞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난 직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