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일기장에 기록된 2002 월드컵, 그 두 번째 이야기
최근 언니가 내게 한 말이다. 그렇구나, 모두가 2002년 월드컵을 경험하진 않았다. 그날, 그 장소에서, 그 광경을 미디어가 아닌 직접 두 눈에 담고 열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굉장히 큰 축복이자 행운이다. 95년생, 그러니까 당시 나이 여덟 살이 기억하는 2002 월드컵은 이랬다.
<1편 보러가기>
이탈리아의 선제골로 시작된 경기는 후반 40분쯤 설기현 선수가 동점골을 넣고, 이어 연장전에서 안정환 선수가 거침없는 헤딩으로 결승골을 넣으며 대한민국의 8강 진출이 확정됐다.
여덟 살 때 가장 잊히지 않는 날을 꼽으라면 아마 이 날이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16강 다음은 17강인데 왜 8강인 걸까'라는 다소 귀여운(?) 의문과 함께 아빠 엄마와 지인 집으로 월드컵 경기를 보러 갔었다. 지금도 TV 앞에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응원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골을 넣을 때마다 아파트 단지는 우렁찬 함성소리가 들렸고, 경기가 끝나고 거리로 나갔을 땐 사방은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사이로 하얀 태극기를 펄럭이며 "대-한민국!"이라고 외치면, 다른 한쪽에선 "빠방-빵-빵빵!" 클락션으로 화답하는 경이로운 상황. 말 그대로 역사의 한 장면 속에 함께 있었다.
월드컵의 또 다른 묘미는 바로 승부차기가 아닐까. 연장전까지 가서도 승패가 나질 않자 결국 승부차기를 진행한다. 골대 바로 앞에서 공을 차다니. 그것도 한 명씩, 골키퍼를 코 앞에 두고!
한 치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선수들의 압박감과 긴장감이 고스란히 전해졌고 덩달아 손에 땀이 났다. 치열한 접전 끝에 홍명보 선수의 골을 마지막으로 경기는 대한민국 승. 그 작은 나라에서 축구 강국을 꺾고 4강 진출이라니, 믿기지 않아. 이제 고지가 눈앞이다.
결승 진출을 꿈꾸며 어김없이 자리를 지켰다. 위기의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선수들이 잘 버텨줬고 이대로 연장전 아니, 8강 때처럼 다시 승부차기를 하나 싶었지만 후반 30분, 아깝게 독일에게 1점을 내주면서 끝이 났다.
모든 축제나 행사가 그렇듯이 끝나면 자리에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이럴 때 비로소 시민의식이 돋보이는 것 같다. 대한민국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질서 있고 깨끗한 시민들. 비록 어렸지만 너도나도 쓰레기를 주워 커다란 쓰레기통에 넣는 모습을 보고 어린 마음이지만 잔잔한 감동을 느꼈다. 이름은 붉은악마지만 마음만은 하얀천사가 아닐까 하며.
결승 진출에 아깝게 실패하고 터키와의 3위전을 겨뤘던 날, 전반 1분 만에 터키 선수에게 선제골을 내줬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을용 선수가 동점골을 만들고 송종국 선수가 추가시간 만회골을 넣으며 그대로 경기가 종료됐다. 비록 2대 3으로 아쉽게 졌지만 그래서 더 아쉬움 없고 값진 4위였다.
우리에게 4강 신화를 안겨준 푸른 눈의 지략가, '거스 히딩크' 감독. 사실 2002 월드컵을 앞둔 평가전에서 유럽팀을 상대로 계속 참패를 하면서 비난여론이 거셌지만 그럼에도 꿋꿋이 훈련을 강행한 걸로 알고 있다. 그 강인한 멘탈과 기존 한국축구의 고정관념을 깨는 남다른 분석 그리고 전술, 선수 개개인의 역량에 맞는 밀도 높은 훈련. 선수들과 진정성 있는 소통을 하고자 했던 감독과 그를 믿고 훈련에 착실해 임해준 국가대표선수의 팀워크가 아시아 최초 4강 진출이라는 기적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다.
2002년을 빛낸 태극전사들과 히딩크 감독, 그리고 함께 응원했던 붉은 악마들. 이렇게 보니 신문을 오려 붙여두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일기장에는 그림만 그려야 한단 법은 없으니까! 뜨겁고 강렬했던 2002년 우리의 여름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다시 2022년 카타르 월드컵으로 돌아와서…
브라질과의 16강전을 앞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2편을 작성했는데 정말 아쉽게도 8강 진출을 하지 못했다.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팀이 결코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브라질 국가대표팀이 너무 막강했다. 그렇지만 괜찮다. 매 경기마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보여준 의지와 열정은 그 어떤 트로피보다 값지고 빛났으니까. 충분하다.
'축구는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말처럼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어 더 치열하고 열광하게 되는 것 같다. 축구선수를 이끄는 감독과 코치, 그라운드를 뛰는 축구선수,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며 응원하는 사람들 모두가 만들어 가는 기적 같은 이야기.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피어나는 감동을 또 한 번 마주하기 위해 4년마다 돌아오는 월드컵을 기다리고, 즐기고, 또 눈물 쏟고, 환호하는 거지 않을까. 4년 후에는 2026 북중미 월드컵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