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었다. 어릴 때 살던 동네였다. 낡고 오래된 집이나 골목을 좋아하는 이유가 아련하게 남은 기억의 한 조각 때문일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살았던 동네를 찾기 위해 작년에도 이 근처를 배회했었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이어지다 갑자기 뚝 끊긴 곳에 새로운 도로가 나 있었다. 결국은 찾지 못하고 이번에는 주민등록초본에 있는 주소를 구글지도에 입력한 후 길을 나섰다.
“찾았다!” 가슴이 두근두근 진정이 되지 않았다. ‘맞네, 맞아. 이 집이 맞구나.’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굳게 닫힌 대문안쪽을 까치발로 들여다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방문도 열어보고 싶고 부엌도 보고 싶었다. 내부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해 있겠지만 구조는 똑같을 테니 방문을 열면 그때 그 시간으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 집은 비어 있었다. 나의 기억보다 골목은 더 좁고 집의 규모도 작았다.
아침마다 등교하면서 걷던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등에 멘 책가방을 달랑거리며 머리를 야무지게 묶은 아이가 뛰어가고 있다. 성인이 된 나의 걸음걸이가 기억 속에 있던 길을 단박에 벗어나버렸다. 학교에서 집까지 오는 길에 우물이 있었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 단단한 돌담 위로 높게 세워진 담장과 나의 키 높이였던 한쪽 담벼락과 그 너머 맞닿은 지붕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침 등굣길에 엄마에게 야단을 맞고 혼자 분풀이하느라 애꿎은 땅바닥을 발로 차다가 그만 신발이 날아가 그 지붕 위로 떨어진 날이 떠오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쩔쩔매던 9살 아이가 수십 년이 지나 그 길을 다시 걷고 있다. 그때 생각을 하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지만 아침 등굣길에 날아간 버린 신발에 얼마나 당황했을까. 집주인아줌마가 긴 장대로 끌어내려 준 덕분에 양쪽신을 다 신고 학교를 갈 수 있었다. 지금은 파란색 지붕인 그 집도 사람이 살지 않았다. 군데군데 허물어져 무너져내리는 곳이 많았다. 사람대신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이 골목은 나의 유년기 중 가장 밝게 빛났던 날을 보낸 마지막 장소이다. 간혹 꿈에 나타난 골목길은 돌담이 높고 그 담너머로 과일나무 열매가 탐스렇게 열린 곳이었다. 과일나무는 사과나무였다가 때로는 감나무로 바뀌기도 했다. 눈으로 확인을 하고 싶었다. 확실하게 남기고 싶었다. 그래야 그곳을 다시 돌아보지 않을 것 같았다.
좁은 골목길을 몇 번씩이나 오르락내리락거리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도로와 접한 계단 끝에 앉았다. 골목길로 어르신들이 올라오셨다. 파란 조끼를 입으신 모양새가 공공일자리에 다녀오시는 것 같았다.
“여그서 잠 쉬었다 갑시다.”
“그랍시다. 뭐 바쁜 거 있소.”
“오늘은 밥 먹자는 사람이 아무도 없-네이”
할아버지 말씀에
“매일 먹으믄 쓰것소.”
할머니 세 분과 할아버지 한 분이 뒤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시더니 자리를 뜬다.
가방에서 그림도구를 꺼내 들었다. 할머니 한 분이 또 올라오시더니 내 옆에 앉으신다.
‘여기가 쉬는 맛집이군!’
의자를 펴고 부시럭거리는 나를 보더니
“여기서 뭐 하고 계시오.”
“그림 그리려고요.”
“이쪽에 앉아서 허면 되겄네요.”
“네.”
할머니의 말소리에 자꾸 뭉클뭉클 가슴속에서 무엇인가가 올라온다. 순하디 순한 고향 말. 작은 꼬마아이가 놀던 골목길에 앉아 내 엄마 나이로 보이는 분의 말소리를 듣고 있자니 온갖 감정이 복잡하게 일어난다. 낡은 지붕을 그리면서 그 아래 따뜻했던 일상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