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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Mar 25. 2023

할머니와 작은 새와 나비

할머니의 꽃길-어반스케치 5


방송통신대학 옛 학습관 마당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아이고, 다리야.” 하는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니 학습관 건물 옆으로 난 오솔길에서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내려오신다. 며칠 전 활짝 피었던 목련나무를 지나 동백꽃이 뚝뚝 떨어지던 길이었다. 

“여서 뭐하능교?”

“저 앞에 있는 집 그리고 있어요.”

“세상 참 오래 살고 볼일이다. 미술 기리는 것도 보고. 오데 저 뒤에 이층집 그리는교?”

“아뇨, 여기 <차고> 쓰여 있는 집 그려요.”

“이 집은 유공 다닌다. 이 밑에 집은 할마이 혼자 살았는데 죽고 아무도 안 산다.”

빨간 두건을 쓰고 두꺼운 솜바지와 조끼를 입은 할머니의 계절은 겨울과 봄 사이 어디쯤인 것 같다. 


“할머니,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와 나이를 묻노, 묵을만치 묵었다.”

“저희 엄마는 87세거든요.”

“아직 한창이네. 나는 94살이다.”

“우와, 정정하시네요.”

“내가 정정한 지 우짠지 어찌 아노.”     

할머니 유쾌하시다. 저 뒤에 있는 집은 아들이 판사가 됐고 어느 아가씨는 고양이를 주워 기른지 일 년이 넘었다는 이야기, 딸이 도시락을 싸다 주고 손녀와 손자가 초등학생, 중학생이 되었다며  동네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니라 동네 주민이 일상을 서로 주고받는 것처럼 나는 엄마 이야기를 하고 아이들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 도중 오솔길을 바라보더니 “나비야!”하고 부른다. “저기, 나비야 하고 부르면 돌아본다.” 아마도 근처에 살고 있는 길고양이 같다. 

“뭘 그리 조아 먹을라고 이라고 왔노.”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새들이 땅을 콕콕 찍어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에 애정이 듬뿍 담겨있다. 사람 대신 할머니의 동무가 가득하다. 

할머니의 적적함이 낯선 이방인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오게 만들었을 것이다. 잘그리고 가라는 말을 남기고 꽃이 가득한 오솔길을 걸어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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