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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우가 길게 요동 치는 밤

[공연 리뷰] 앨런 길버트 & NDR 엘프필하모니 오케스트라

by 유진

결국, 거대한 숨을 들이마시기 위함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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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공연을 보러 가는 궁극적인 이유는 내 앞에 거대한 강풍기 하나를 세워놓고, 나의 무미건조한 일상에 소름 끼치는 환기를 들여놓기 위함이다. 아주 큰 양동이일 수도 있겠다.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차가운 물줄기가 멍하니 졸고 있는 나를 일깨워주길 바랐다.


온몸을 사르르 감싸주는 벽난로 하나로는 부족하다. 작렬하는 태양선을 닮은 것들이, 약속한 시간에 사람들을 녹여버릴 수 있어야 하겠다. 그게 클래식을 곁에 두는 이유이자, 조건이다.


새로운 한 문장을 선사해 주든, 이미 내 취향에 맞닿아 있든, 어떻게든 나의 눈을 번쩍이게 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도 아니면 정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나보다 훨씬 큰 존재가 되어 서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곳에 온 이유를 스스로 납득할 수 있고, 다음에도 이곳에 오게 되겠구나 — 직감할 수 있게 된다.


당신은 왜 클래식을 보러 간다고 생각하는가? 노래가 좋아서? 특정 작곡가를 사랑해서? 어떤 연주가를 좋아해서? 어느 쪽이든 어느 정도는 맞지만, 딱 들어맞는 답은 없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지켜보는 맛’이 있어서다.


바라보는 재미가 있다. 그들의 선택을 응시하는 재미가 있다. 먼저 신뢰하고, 그에 대한 보답을 받는 즐거움이 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크게 실망해보는 맛도 있다. 내가 선택한 연주자와 우연히 만나게 된 연주가들의 색감 변화를 지켜보는 묘미가 있고, 어제와 오늘의 또 다른 차이를 포착하는 재미도 있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연주가 달라지고, 사람 냄새가 나는 ‘사람’이다. 그래서 문득 생각한다. “뭐야, 나랑 비슷할지도.” 혹은 “뭐야, 완전 다르네.”


스스로 선택하는 재미도 있다. 클래식을 좋아하기로 택했으니 손끝이 바쁘다. 유튜브에 들어가 이 곡도 들어보고, 음원 사이트에서 저 곡도 들어본다.


그 와중에 마음에 드는 곡이 생기거나, 궁금한 연주가가 생기면 두 발로 공연장을 찾아간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또 움직인다. 관심 있는 사람이 더 바쁜 법 아니겠나.


그러다 보니 나도 이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 손안에 쥘 만큼 작은 주머니겠다. 이 글을 시작하기 전 우연히 서점에서 추천사 문구로 아래와 같은 문장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사랑에 대한 전경린의 해석을 언제나 믿는다.”


그래, 나도 그렇다.


“나는 곡에 대한 ○○의 해석을 언제나 믿는다.”


이제, 22일의 주역들의 이름을 그 빈칸 안에 하나씩 담아볼까.



안나 클라인 – 요동치는 바다 (Anna Clyne, Restless Oceans)

[크기변환][포맷변환]1100518.jpg ⓒ 유진


아쉽다. 지나치게 아쉽다. 이 곡을 듣게 된 시기가, 이 곡이 탄생한 타이밍이 내게는 너무나도 유감이었다. 내 자아가 형성되기 이전에 들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작은 점 하나에, 못생겨 보이는 얼굴 표정 하나에 일희일비하던 시절에, 저 사람보다 훨씬 못나다 생각이 들 때, 아무도 내게 뭐라 한 적 없는데도 온 세상이 나를 향해 “부족하다”고 겨냥하는 것만 같을 때, 그때 이 거대한 인간의 웅덩이를 들었더라면! 애초에 그런 생각의 빌미조차 주어지지 않았을 텐데!


첫 발부터 충격이다. 공격이고, 돌격이다. 이어지는 소리에 심장 안쪽이 앞으로 완전히 튀어나와 바닥을 내리꽂는다. 쾅! 쾅! 쾅! 수십 개의 발이 일직선으로 계속 무언가를 밟는다. 소리가 눈앞에서, 정말 턱끝에서 내리쳐진다.


아주 조금만 더 고개가 앞으로 쏠려도 얼굴이 갈려나갈 것이다. 악기를 든 손에서 발의 행진이 성대하게도 터져 나온다. 모든 이의 발자국이 개선행진이다. 쓸데없는 생각 자체를 짓밟아버린다. 온전히 발소리에 집중해라. 집중! 다 던져라! 네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든, 아무도 궁금하지 않다.


이 요동치는 바다에서 휩쓸려버리고 싶지 않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악기로 바람을 일으키고, 발자국으로 심장을 진동시키고, 스스로의 목소리로 왜 마음을 녹여오는가. 땅을 울릴 땐 그렇게 지휘자의 중심으로 응집되었으면서, 목을 드높일 땐 어쩜 그리 자유로울 수가 있는가.


한순간 불행의 낭떠러지로 떨어졌을 때, 명치 위로 얹히는 그 ‘쿵—’ 하는 느낌이 있지 않은가. 그 정도의 강도의 소리 압박이 계속해서 나를 잡아먹을 듯 감싸온다. 여기가 어드벤처의 한가운데 같기도 하다. 마음 언저리에서 무엇인가 울렁였다.


관중이 원하는 몰입감이 가득하다. 소리로 세상을 만드는 사람들. ‘요동치는 바다’를 묘사한게 아니라, 이 곡을 듣는 우리를 요동치는 '바다'로 만들어버린다.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악기를 손에 자랑스럽게 쥔 채 이쪽을 향해 웃어 보이는데, 그 미소들에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아, 나… 살아 있나 봐. 너무 신나!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77

[크기변환][포맷변환]KakaoTalk_20251026_022507605_01.jpg ⓒ 유진

Ⅰ. Allegro non troppo — 너무 빠르지 않게, 활기차게


브람스의 시작은 온풍이다. 당신의 시야보다 아주 살짝 높은 위치에서 부드럽게 다가와 장중하게 울려 퍼져 나간다. 이 곡의 묘미가 무엇이겠는가. 나보다 훨씬 크고 멋진 세계를 길게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이다.


저 고즈넉한 관악의 소리를 감미롭게, 있는 듯 없는 듯 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얼마 전에서야 깨닫게 되었지 않았던가. 이 안에서 머무는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듣기만 해도 심금을 녹여내는 흐름이 첫 선부터 예고되다가, 요동치는 바다만큼이나 거대한 웅덩이가 바이올린 한 대를 맞이한다. 이윽고 조슈아 벨의 첫 소리가 나타난다.


아, 이 사람. 정말 특징이 있다. 길게 끌어낸다. 응축된 감정을 소리의 깊은 곡선에서 절묘하게 당겨낸다. 이어짐의 소리다. 거리감은 어떤가. 어째선지 나보다 훨씬 앞에서, 그러나 절대 무례하지 않게 선다. 소리가 나를 덮쳐오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연주’를 잊지 않은 사람의 태도다.


혼자 튀어오르려는 것 대신, 함께 음악을 지어나가는 마음이 분명히 있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다. 그런데 투명한 유리 같다. 융합적인데 선이 또렷하다. 소리의 끝에는 놀라운 긴장감이 있다. 끊임없이 8자가 오가는데, 그때마다 듣기 좋은 기세들이 적절히 녹아 있다. 파동이 귀로 전달된다. 시원하다. 개운하다. 능숙하다. 가뿐하다.


정말 단순히, 아— 브람스다. 브람스의 노래다. 그 자체를 음미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소리가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올 때 순간마다의 선명도가 문득 문득 짙어진다. 끝자락에서도 가벼움을 잃지 않는다. 감정이 녹진하지 않고, 차분함을 잃지 않는데 미칠 듯 텐션 있다. 이건 뭐지?


당겨온다! 응축된 브람스를 얼음 섞어 이만큼 쟁여낸다! 아래에서 위로, 사방으로 — 그러다 위에서 아래로, 빛을 절묘한 타이밍에 낙하시킨다.


“뭐 하는 사람이세요?”


거기다 오케스트라는 거의 폭포다. 협연자가 아무리 빛나도 단원들이 받쳐주지 않으면 그날의 곡은 반쪽이 된다. 이들은 개별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응집된 폭풍이다. 너무 좋았다.


저만큼 뒤에 있는 게 아쉬울 지경이었다. 조금만 더 다가와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이토록 관중의 영역을 존중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켜낸 채 집중도를 이끌어낼 수도 있구나.


바이올린 소리가 찡글거리며 서서히 오른편으로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아주 거친 악기를 이렇게 유순하고 경쾌하게 다뤄낼 수도 있구나. 소리가 어떻게 이렇게 통제되면서도 자유로울 수 있지?


아득해질 때는 한없이 제자리에서 노래한다. 욕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만큼에서 이 정도가 가장 아름답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의 소리다. 너무 적절하다. 탁월하다. 윤이 나는 청록색이다.


Ⅱ. Adagio — 느리게, 서정적으로

음악이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거기 있었는데 악기로 붙잡아 소리로 드러나는 순간을 묘사하는 예술일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갑자기 등장하는’ 소리가 아니라 처음부터 거기에 존재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고, 온도가 있는 숨결로 시작되는 것이 음악인가?


바이올린 한 대와 관악 한 악기가 메인으로 호흡을 맞춘다. 이때 슬슬 눈치를 챘다. 오늘 무대의 지휘자는 두 명이다. 조슈아 벨은 지휘자의 옆에 딱 머물러 있었다. 더 앞서지도, 더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연주를 쉬는 순간에도, 활을 긋는 찰나에도 그는 옆과 뒤를 자주 응시했다. 함께 숨을 나누는 악기가 있다면 그 타이밍에 맞춰 바이올린을 들어 올렸다.


[크기변환][포맷변환]KakaoTalk_20251026_022507605.jpg ⓒ 유진


“지금이다. 이 순간이다.” — 이만큼이나 서번트적 리더십이 깃든 협연이 있을까.


그의 연주 모습은 마치 영화 미션 임파서블 속 톰 크루즈를 보는 듯했다. 선장은 지휘자, 행동대장은 조슈아 벨이다. 그는 한국의 관객을 만나러 왔지만, 오늘이 ‘자신의 무대’가 아니라 ‘함께 만드는 화합의 장’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소리를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튀지 않는다. 하지만 소리는 쫄깃하게 남는다. 바이올린이 낼 수 있는 가장 어여쁜 것을 음색의 전면에 드러내, 관객이 천천히 음미할 수 있도록 시간을 내어주는 사람이다.


아주 속이 편하다. 자잘한 포인트를 억지로 주지 않아도, 소리가 개운해서 지루할 틈이 없다.


Ⅲ. Allegro giocoso, ma non troppo vivace — 유쾌하게, 그러나 지나치게 빠르지 않게

간드러짐 따위는 없다. 기교를 앞세우지 않고 담백하지만 또렷하다. 개성이 뚜렷해도 과하지 않으니 설득력이 있다. 브람스를 몇 번이나 협연으로 들으면서 ‘혹시 좀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 우려는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게, 탄탄하게 이끌었다.


쟁글거린다. 조슈아 벨이라는 바이올린은 약간 중독적이다. 누구나 즐겁게 소리를 음미할 수 있도록 ‘즐길 포인트’를 좐득하게 내어주는 연주자다. 캐릭터가 이렇게 분명한 사람이 또 있을까. 내가 봤던 브람스 중 가장 재간둥이 같은 연주였다. 그런데 그 재간이 도를 넘지 않는다. 서글거릴 정도의 경쾌함이라 오히려 보기 좋다.


그는 전신으로 브람스했다. 활은 현에서 떨어질 틈이 없다. 힘차게 연주하는데 소리는 놀라울 만큼 가볍다. 집중했는데 여유롭다. 즐기는데 능숙하다. 완벽한 리더라서 듣는 마음이 편하다.


치밀하게 사람을 괴롭히는 브람스가 아니라, 그들만의 거대한 기운이 우려져 있는 브람스다. 텍스처가 살아 있다. 질감이 있다. 음원에선 미처 듣지 못했던 미세한 결들이 실제 공연에서는 이렇게 명확히 드러난다. 역시, 직접 들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향할수록 여러 갈래의 소리가 나뉘지만, 여전히 과하지 않다. 끝을 장식하는 그 순간까지도, 그들은 하나였다. 아, 만족스러웠다.



앙코르 – 이자이 바이올린 소나타 3번 ‘Ballade’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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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자마자 서울시향 마스터클래스에서 들었던 진영훈 연주가의 이자이 발라드가 떠올랐다. 그때의 연주는 바닥에서 위로 로켓이 발사되듯 열정적이고 박진감 넘쳤다.


반면 오늘의 조슈아 벨은 그 연주에서 한 겹의 힘을 덜어내고, 아득한 빛자락을 불러온 듯했다. 차분함과 서늘함이 내재되어 있었고, 네 갈래로 소리가 흩어져 나가는 듯한 해석으로 나아갔다.


발은 여전히 쾅—, 무대를 구를 정도로 강하게 내딛지만 소리는 그와 반대로 놀라울 만큼 가볍다. 그러나 그 가벼움은 공허하지 않다. 아주 기교적이고 섬세하며, 음표 하나하나를 충분히 음미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다. 그럼에도 흐름의 고조를 놓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의 선을 팽팽히 유지한다.


연주에 해석을 가져간다는 것, 자신만의 개성을 안아간다는 건 아마 이런 지점에서 드러나는 걸까. 작곡가의 원래 의도가 이해되지 않으면, 연주자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또 자신만의 감정을 어디까지 담아낼 수 있을까.


쾅, 쾅!


이자이의 발라드가 이렇게까지 차갑게 농축될 줄은 몰랐다. 새로운 해석이었다. 이 곡이 한없이 건조하고 높이 떠야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소리가 아래로 둥글게 내려꽂히면서도 이토록 정열적으로, 그리고 싸늘하게 울릴 수 있다니.


소리의 분명도를 가져간다는 건 이런 의미였다. 분위기를 장악해내는 힘, 그것이 해석의 본질이었다. 우레 같은 박수 속에서 그의 연주가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전달되었는지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드보르자크 교향곡 제7번 D단조, O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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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Allegro maestoso — 장엄하게, 빠르게

너그러움과 비장함이 함께 깃들어 있다. 분주하지 않되, 적절히 기세를 살려 관중을 감싸 안는다. 그 역할을 이토록 분명히 해내주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앞서 지나온 악장들로 이미 세계관의 토대가 단단히 세워졌으니, 이제는 교향곡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들이켜는 숨, 내어주는 마음, 다가오는 손길, 드리워진 구름, 환기되는 순간, 나눠지는 오늘, 들썩이는 기대감. 온건한 분위기가 전면에 드리워진다.


오는 마음과 가는 선율이 교차한다. 지나침과 정제됨의 언저리, 판단보다 수용에 가까운 상태. 내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대신 어떤 광경이 자연스레 펼쳐진다. 그저 능선을 따라 붓선을 그려나가는 화가일 뿐이다. 때로 평화로웠다가, 위험했다가, 햇살이 들이치는 풍경이 이어진다.


무념무상으로 머무르기 좋은 순간이다. 관악이 제 역할을 곧게 해내니 기분이 좋다. 아릿하고 따뜻한 선율들이 긴 노래를 부른다.


Ⅱ. Poco adagio — 다소 느리게, 감정적으로

나긋한 황홀경 안에서 이야기를 도닥거려볼까. 관악이 이끌고, 현악이 함께 거닐어준다.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받듯 두 손 모아 붙잡아보라. 향긋한 아카시아 향이 코끝을 넘어 마음 깊숙이 스며든다.


고단한 와중에도 미소를 잃지 말아야 한다. 때때로 행복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다정한 얼굴로 조언하는 이가 있다. “아무리 폭풍이 몰아쳐도 해는 늘 그 자리에서 떠오른다.”


그 말을 명심해야 한다. 상대를 대할 때에도 여유를 잃지 말 것. 나와 다른 이에게 빵 한 조각, 기쁨의 한 조각을 건넬 줄 아는 사람이 이 시절을 견뎌낼 것이다. 빗줄기가 대각선으로 내려친다고 해서 무너질 사람은 없다.


관악과 현악이 숨을 주고받으며 예쁘게 째깍거린다. 평화의 곡선을 그리려는 걸까, 자유를 향한 열망일까. 울먹이는 마음을 달래는 선율인가, 혹은 지금은 가질 수 없는 고요를 그리워하는 걸까.


손에 쥔 것을 놓지 못하는 자를 타이르듯 다가오는 소리. 어르고 달래는 애달픈 목소리. 복잡한 마음일지라도 결국 선택은 해야 한다.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Ⅲ. Scherzo. Vivace — 활기차게, 생동감 있게

특유의 리듬감으로 시작을 이끈다. 아까 들었던 조슈아 벨의 소리 표현을 닮은 긴장감이 가득하다. 앞으로, 뒤로, 장밋빛 춤사위가 웅장하게 이어진다. 스멀스멀 물러났다가, 야금야금 앞으로 덮쳐온다.


기세가 훨씬 좋다. 그렇다고 압도하려는 게 아니라 형체를 한없이 키워가는 길이다. 먹구름 아래, 해질녘 위 — 자유를 찾아 오고 가는 길이다.


울먹여봤자 소용없다. 힘을 잃지 않는 데 방점을 두자. 그래야 기습할 수 있다. 안개 속에 몸을 숨길 수 있다. 반복적으로 되돌아오는 리듬이 반갑고, 아주 쫀득하다. 어느새 나보다 훨씬 거대한 형체가 되어 앞장선다.


Ⅳ. Finale. Allegro — 빠르고 격렬하게

이만큼이나 든든하니 어깨를 펴지 않을 수 없다. 평화롭다고 말하기엔 폭풍 전야의 기운이 가득하다. 1악장에서 3악장까지 쌓아온 모든 에너지가 이곳에서 폭발한다.


몇 번의 폭발이 있었는지 셀 수조차 없다. 던지는 자와 던져진 자, 그 사이에 남는 것은 결과뿐이다. 인간의 자잘한 감정이나 눈물길 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다. 거대한 조직체로서의 움직임, 그 승리의 에너지가 무대를 가득 채운다.


다다를 수 있겠냐고? 어찌 불가능하겠는가. 이만큼이나 든든하니 어깨를 도저히 숙일 수가 없다. 울 틈도 없다. 구경하기에도 바쁘다. 표적을 향해 달려나가야 한다. 초점을 고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양방향으로 펼쳐나갈 것들을 스스로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다.


첫 곡, ‘요동치는 바다’의 발자국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이곳까지 도달해 있다.


요동치는 인간, 일렁이는 마음, 흔들리는 선율, 다시 출렁이는 세상.



앙코르 – 브람스, 헝가리 무곡 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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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친다고 했지? 그 흐름을 이어받아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으로 승리의 기운을 밀어붙인다. 그러나 잊지 말아라. 가라앉아야 할 때는 반드시 우아해야 한다.


진짜, 중간 부분에서 관중의 마음을, 귓가를 얼마나 들락날락하던지. 공연장에서 사람들이 소리를 가지고 거대한 장난을 치며 공간 음향을 형성하는데 — 정말, 못 살겠다. 저 강약 조절을 어쩔 셈인가.


나는 처음의 마음으로 되돌아간다.

이 모든 건 결국, 거대한 숨을 들이마시기 위함이겠지.

재차 묻건데, 음악이란 본디 이런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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