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에세이] 수림뉴웨이브 2025 : 성휘경 <용선가: Ludens>
1. 책망(責望)
들어가며
어둠이 짙게 깔린 사이, 어깨선 위에 서슬퍼런 조명이 드리워진다. 이윽고 하얀빛이 떠오르면, 복장을 차려입은 악사들이 좌식으로 무대에 앉아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관객석을 바로 보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내려놓았다 다시 든다.
무엇을 위해 그 자리에 앉아 있나? 소리로 결을 그리기 위함이다. 회초리를 내리치듯 북을 두드리고, ‘일깨워낼 것’을 위쪽에서부터 노래한다. 강요라 할 만한 건 없는데도 은은한 압박감이 드리워진다. 나를 신경 쓰고 있지 않은데도 자꾸만 시선이 빼앗겨, 어느새 그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은 가야금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나? 양금은? 대금의 숨결은 또 어떤가. 현이 뜯기는 소리나 피리·대금의 음색이 마음을 편히 비워줄 거라 상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자세를 곧추세우게 된다. 조금이라도 구부러진 모습을 보였다간 어디선가 도깨비가 나타나 꾸짖을 것 같은 매서움이 앞에 놓여 있었다.
“우리가 이리 좋은 소리를 들려주는데,
감히 글을 내려놓지 않아? 감히?”
가시
공연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뒤로, 나는 계속 어떤 형체에게 뒤쫓기고 있다.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가짓수는 또 언제 이렇게 늘어났는지.
시작은 아마 시민관객단 활동에서 보게 된 공연들이었을 것이다. 이 활동을 시작한 건 다양한 형태의 ‘클래식’을 더 보고 싶어서였지, 관람 영역을 이렇게 넓히려던 마음은 아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무용을 한 번 보면 다음 무용 공연이 이어지고, 국악을 한 번 보면 또 다른 국악이 뒤따랐다. 어쩌다 이런 연쇄가 생겨났을까. 한참 동적이고 불친절한 물—클래식—에서 놀다가, 사람의 몸 전체가 서사를 끌고 관객을 설득하는 장면을 마주하니 새로움이 많았다.
정답은 없지만, 무언가를 계속 그려내는 예술을 붙잡는 건 여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매번 거대한 깨달음을 크게 느낄 수도 없는 법이다. 마음 같아서는 무엇을 보았든 ‘우와, 우와’ 하고 멈추고 싶은데, 이상하게 그걸 허락하지 않는 공연들이 나타나 자꾸만 내게 나머지 숙제를 남겼다.
특히 국악 공연이 그랬다. 한참 남의 나라 악기만 보다가 ‘우리 것’으로 소리 내는 광경만으로도 충분히 색다른데, 서양 클래식의 오케스트라나 실내악이 주는 압도감에 익숙해진 상태에서 마주한 국악의 아우라는 전혀 다른 결로 나를 두들겨댔다.
그들은 한복을 바르게 갖춰 입고 바닥에 단정히 앉아, 손으로 현을 누르고 뜯고, 타악을 두드린다. 분명 앞에서 두드렸을 뿐인데 회초리처럼 내 귓청을 때린다. 명치 끝까지 정통으로 들어오는 타격감이다.
웃어주지도 않는다. 이곳에서 함부로 입꼬리를 올렸다간 당장 쫓겨날 기세다. 우리는 지금 장난하러 온 것도, 즐기러 온 것도 아니다. 우리의 소리를 이곳에 고이 모시겠다는 엄청난 밀도감이 공연장 내부에 팽팽하게 퍼져 있다.
클래식 공연 보러 갈 때 ‘갖춰 입고 가야 하느냐’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사실 이런 질문이 더 잘 어울리는 곳은 국악 공연이 아닐까 싶다. “태도를 바르게 갖춰라. 인생 똑바로 살아라.” 이 직언을 소리로 들려주는데, 그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 나를 오래도록 괴롭히는 —앞으로도 계속될— 그 형체는 그런 장면들을 보고도 글로 감히 내보이지 않은 순간마다 하나씩 생겨난 것이었다.
왜 쓰지 않았던가? 이유는 늘 ‘어쩔 수 없어서’였다. 주에 두세 개씩 공연을 보다 보니 취사선택을 해야 했고, 하나를 쓰면 다른 하나는 못 쓴다는 스스로의 다독임으로 하얀 페이지를 뒤돌아섰다.
그렇게 지나친 공연들은 목에 걸린 가시만 같았다. 그 가시 중에는 늘 ‘국악’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좋은 무대를 보고도 후일담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래도록 마음 한구석을 찔러댔다.
“다른 나라 악기엔 그렇게 마음을 쓰면서,
왜 너의 나라 것에는 그만한 성의를 보이지 않나.”
그러니 이번만큼은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했다. 최근 공연들 덕분에 대금에 대한 관심도 생겼고, 오래 미뤄둔 감정의 매듭도 이제는 풀어내야 했다.
대금 연주자이자 국가무형문화재 강릉단오제의 양중, 성휘경은 프로그램 노트를 통해 ‘용선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전통 굿에서 쓰이던 용선을 신과 망자를 위한 장치이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고통의 바다’를 건너기 위한 또 하나의 수단으로 바라보고 싶었다고. 동해 무속의 세계관 속에서 용선을 새롭게 풀어낸 무대라고도 했다.
신과 망자를 태우던 배를 오늘만큼은 ‘우리’를 위해 띄워낸단다. 나는 그저 얌전히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2. 용선(龍船)
문 — 문을 연다
신과 하늘, 손님들에게 시작을 알리고 사방의 문을 여는 문굿을 기조로 한 양중의 천근소리가 연주된다.
대금이 늘 궁금하지 않았던가. 시작부터 ‘아, 내가 발 들일 곳을 제대로 찾아왔구나’ 싶은 첫숨이 있다. 저걸 어떻게 지금 불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바람은 결코 한두 번의 숨으로 불러와지는 것이 아님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연주자가 악기를 내려놓고, 이번엔 목청을 울리기 시작했다. 아, 뭐지? 악기만 자리했을 때는 그 자체로 ‘전통 악기 공연이구나’ 했는데, ‘목소리’가 나타난 순간부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어라 계속 말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단어를 알아들을 순 없어도 그 울림이 객석 사이를 무겁게 지나가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이게 정말 한 악기 중심의 공연이 맞나? 그때부터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입을 떼는 순간은 인사할 때 정도일 줄만 알았는데…
부정 — 나쁜 기운 정리
신과 손님을 좌정시킨 뒤, 혹시 모를 부정을 가셔내고 신아위로 살을 풀어낸다.
크기가 다른 두 개의 타악기가 서로 다른 박자로, 서로 다른 크기로 귓청을 계속 두드린다. 하나는 쉼 없이, 또 하나는 간헐적으로 이어진다.
꾕가리 같은 것이 나타나 아랫마을에서 작은 불씨를 일으킨다. 세 개의 타악기가 섞여들수록 묘사하기 힘든 압박감과 아득함, 몰입감이 무대 중앙에 꽂힌다.
나는 지금 부정의 기운을 씻어내리는 굿판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것이다. 기분이 묘했다.
이 곡의 목적이 무엇인가? 나쁜 것을 털어내는 것. 저 악사들이 악기를 두드리고, 노래하고, 현을 뜯는 이유가 타인의 정화를 위함이라니. 공연을 보러 왔는데 부정한 것을 쫓아내준다니.
큰 목소리가 앞을 이끌고, 뒷목소리는 끝없이 여운을 끌어오고, 타악기와 현들은 흥을 띄워낸다. 삿된 것을 쫓는 시간이니 생각을 얹을 여력도 없었다. 관찰할 틈도 없이, 저 하얀 옷을 입은 악사들의 행위 자체를 목격하느라 바빴다. 뭐 이리 직관적인지.
소리를 여리게 혹은 강하게 조절해야 할 이유 따위 없다. 아름답기 위해 소리를 모으는 길도 아니다. 내쫓을 대상을 계속 추적하는 일이다. 한 명도 남겨둬서는 안 된다. 이 바닥부터 저 하늘 끝까지, 한 군데도 놓치지 않고 뒤지고, 헤쳐나가고, 두드리고, 긁어낸다.
드렁 — 요란한 울림
오구굿에서 연주되는 드렁갱이 장단을 각색해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를 낸다.
다 파헤쳐냈으니, 이제는 공명의 시간이다. 산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닿도록 울리겠단다. 그렇다면 소리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겠는가? 요동칠 수 있도록 거대해야겠지.
우리네 음악 안에도, 중첩하며 고조되는 거대한 산봉우리가 하나 있는 것 같다. 가사도 없고 눈을 맞춰주는 것도 아닌데, 악기들이 정확히 각자의 자리를 지켜 흐름을 연약하게 뭉쳐냈다가 서서히 거세진다.
악사들의 모습은 또 어떤가. 반복적인 구절을 쉴 틈 없이 이어가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몰아세운다. 악기를 두드림에 모든 에너지가 전폭적으로 실려 있다.
이 극장 같은 공연장 안에서 저 사람들이 사방을 잡아먹고 있다. 무슨 길을 거닐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전신을 잠식시키는 압박감인데도 이상하게 공격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얼마나 거대한 파동이었는지 아시겠는가? 나도 모르게 팔자락을 움켜쥐었다. 옷에서 웅웅-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내가 지금 공연을 보러 온 게 맞나? 의심이 스몄다. 무서운 타악의 소리가 나를 매섭게 노려보는데도, 하나도 두렵지 않고 오히려 몸 주변이 가벼워진다.
그들이 끈질기고 처절하게 내몰고 있는 대상은 나를 해치는 모든 것이다. 정성이 느껴지니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는 남인데, 왜 이렇게까지 해주나. 사람은 왜 사람을 위해 이만큼 제 것을 다 바치는가.
용선가 — 뱃놀이, 고통에서 벗어나
산자와 망자 모두 고해를 벗어나길 바라는 노래와 이어지는 뱃놀이를 연주한다.
이제는 배를 타고 떠날 시간이란다. 한지를 펼쳐 붓 끝에 먹물을 잔뜩 머금게 한 뒤, 제멋대로 파도와 능선 자락을 그려보듯 소리가 높고 넓게 유영한다.
흥이 오르니 노래도 한층 더 경쾌해진다. 그러다 무대 왼편에 놓인 진짜 용선(배)에 연결된 아주 긴 흰 천을 관객들이 함께 당기며 뱃놀이를 즐기도록 유도했다.
나는 다행히 그 자리에는 앉아 있지 않았지만, “얼쑤!”의 추임새를 얹으며 신나게 참여하는 관객들을 지켜보았다. (연주자는 관객들에게 흥을 돋우게 해서 미안하다며 웃었지만) 솔직히 꽤 재밌는 장면이었다.
미니어 — 자유롭게 넘나드는 마음
지옥의 강 ‘비다라니’를 자유로이 드나드는 마음속 물고기 ‘미니어’를 소리로 형상화한다.
경계를 넘어 자유롭게 넘나들어 보란다. 가만 보니, 오늘의 양중은 사람들에게 오갈 길을 길게도 그려놓는 듯했다. 마치 앞에 길을 깔아주는 느낌이었다. 한참 귀담아 듣고 있었는데, 금세 끝나버렸다. 조금만 더 이어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3. 해방(解放)
"무속 음악이라는 게 신앙이나 절대적인 진리 이전에, 예술적인 요소가 많이 녹아 있는 하나의 예술 장르이며,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위해 행위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무조건적인 신앙이나 미신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예술적인 무언가로 바라봐주면 좋지 않을까."
"지금 이렇게 전통 음악 혹은 국악을 하고 있는데, 혼란스럽다는 생각이 많이 들 때가 있다. 개화기 때처럼 누구는 양장을 입고 구두를 신고 있는데, 누군가는 지게를 메고 소를 끌고 있는 기분이랄까. 국악 연주자로 살아가며 느끼는 혼란이 늘 있다."
"우리 음악이 가지고 있는, 음과 음 사이에 우리만이 갖고 있는 힘. 어떤 장단. 시간만으로는 나눠지지 않는 우리만의 호흡을 동시대적인 감수성으로 풀어내고 있는 연주가라고 말하고 싶다."
공연이 끝나고 성휘경 연주가와의 담화 시간이 마련되었는데, 사회자와 연주자가 서로 장난스레 “우리가 너무 진지한 이야기를 해서 분위기를 무겁게 만드는 건 아닐까?”라고 염려 섞인 말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사실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다. 연주가 본인이 말한 것처럼 사람마다 성향이 있는 법이고, 억지로 맞지 않는 텐션으로 분위기를 활달하게 만들 이유가 있을까.
소리꾼은 소리만으로 관객의 마음을 둥둥 띄워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오히려 포장지만 화려하고 실상은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다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두 번째 곡이 끝난 뒤, 관객을 위해 굳이 마이크를 들어 프로그램을 설명해준 성의, 그리고 용선을 태워올려준 것만으로도 관객들은 ‘놀이’ 안에서 마음껏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분홍색 배가 대롱대롱 흔들리던 장면이 아직 또렷하다. 관객들과 함께 순간을 꾸려가던 그 시간들이 묘하게 귀여웠고, 화기애애하면서도 착실히 어색했던 분위기마저 즐거웠다. 이러니 좋은 공연을 보고도 글을 쓰지 않으면 어김없이 이름 모를 죄책감이 스며드는 것이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이렇게라도 적어두어 마음 한곳에 묶여 있던 매듭을 풀어낼 수 있으니 얼마나 반가운지. 글자 몇 개를 나열할 틈을 얻었을 뿐인데, 이런 작은 해방감이 따라오다니.
아, 아닌가? 용선을 타고 왔던 터라 이만큼 가벼워진 걸까? 글쎄, 막 해방된 자는 지나온 배를 떠올리며 그저 지레짐작할 뿐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