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서초 : 'The Opus 2025'
참, 요즘 선을 많이도 넘는다. 그냥 그 생각이 들었다. 무서운 줄도 모르고, 어찌할 줄도 모르는 채로. 그냥 꼭 한마디는 해주고 싶어 오늘 하루를 꼬박 지새웠다. 새벽 1시가 지나온 22일의 지금, 나는 이 글의 끝을 목격하고 잠들 수 있을까. 답답하다. 정말 답답하다.
1. 개강
내게는 더하우스콘서트만큼 자주 찾는 장소가 있다.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서초! 드디어 공간 개선을 끝내고 다시 재밌는 교육 프로그램을 들고 11월에 나타나버렸다.
아-니, 개관하고 나면 재밌는 프로그램을 들고 오시겠지 하고 어렴풋이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뭉텅이로—한아름, 거의 산타처럼! 12월을 흰눈보다 더 깊게 음악으로 덮어놓겠다는 거대한 작정을 하고 이렇게 나타날 줄은 몰랐다.
이봐, 건물만 임시 휴관이지 내부 직원들은 더 바쁘다. 어떤 교육센터가 프로그램북까지 제대로 갖춰서—그것도 미감 좋은 버전으로—무료로 음악 교육을 해주냐며.
내 클래식 견문이 넓어진 데에는 다양한 공연장들이 꽤 결정적인 몫을 했지만, 핵심적인 문구들은 이곳에서 참 많이도 주웠다. 여기서 얻은 말들만으로도 관람해온 공연들을 헤아리려 하면 머리가 벌써 아득해진다.
그러니 어쩌겠나. 또 한 번의 개강 시즌이 찾아왔고, 나는 벌써 두 개의 강좌를 누렸으니 무엇을 해야겠는가. 관람 보고서를 제출해야지. 시민관객단도 아니고 무슨 보고서냐 싶겠지만, 누가 시켰다. 그게 누구냐고? (조금만 있어보시라.)
어떤 강좌를 선택했더라. 이번엔 네이버 예약으로 일정이 한 번에 떠서, 미리 정리해둔 리스트대로 원하는 강좌를 찾아 빠르게 초록색 ‘예매’ 버튼을 눌렀다. 한두 개가 아니라 셈하기도 어려웠지만, 그중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두 개가 벌써 11월에 예정되어 있었다.
바로 ‘음악의 여정’이라는 제목의 강연과 ‘슈만과 브람스의 낭만’이라는 렉처 콘서트였다. 18일엔 클래식 애호가라면 누구나 아는 김호정 기자가 독일어권 음악 현장을 들려준다고 했고, 20일엔 23일 이든콰르텟 리사이틀에서 만나게 될 신경식 비올리스트가 출연한다니—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내가 ‘클래식’을 좋아하게 된 순간은 언제였을까.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고전 작품을 조금 더 ‘생동감’ 있게 들려주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그때부터였다.
그 이후로는 참 많은 것이 상관없어졌다. 많은 사람이 좋아할 만한 음악이 아니어도 괜찮다. 연주자가 표현하고 싶은 소리가 있다면 조금 더 시원하게 내어주고, 저 앞의 악기와 시선을 맞추고, 한 번씩 힐끔 쳐다보고, 한 번씩 빙긋 웃어주면 된다. 소리가 생글생글 웃어주기만 하면 그만이다.
음악 안에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오늘의 내가 그리는 내일의 나와 많이 닮아 있었다. 그래서 더 알고 싶었다. 그들이 앞으로 무엇을 보려 하는지, 어떤 길을 택하려 하는지.
그래서 독일이라는 나라가 궁금해졌다. 내가 좋아하는 연주자들은 공연 일정만 끝나면 학업을 위해 그 나라로 많이 떠났거든! 그곳은 여름엔 해가 길고 날씨도 참 좋다던데, 그들이 마주하는 일상의 장면은 얼마나 다를까. 궁금했다.
매번 공연장에서 실습만 하는 입장이니, 클래식을 살아가는 이들이 왜 더 깊은 공부를 위해 독일에 가는지, 또 누군가는 왜 미국을 택하는지 선뜻 짐작하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그들은 슈만을 좋아한다 하고, 가을에는 브람스를 듣는단다. 왜일까?
궁금증이 많이 쌓이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어떡하겠나? 익숙한 방식으로 물음을 풀어야겠다. 활자 속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안에서 가장 가까이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직접 들어봐야지.
2. 18일
18일, 김호정 기자가 들려주는 흥미로운 클래식 이야기들에 마음이 쏠릴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달리 한 사람이 내 시선을 오래 붙잡았다. 누굴까—? 다름 아닌 슈만이다.
오늘의 내게 음악가 슈만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만개하는 꽃이며, 낭만을 세련되고 화려하게 수십 개의 꽃잎으로 피워낼 줄도, 조용히 내려앉을 줄도 아는 사람이다.
과거의 나는 어찌 생각했더라.
슈만은 넓다란 꽃을 작은 것에서 커다란 마음으로 피워내줘서 좋다. 말린 장미색, 예쁘지 않은가? 그의 곡을 들으면 단순히 붉은색 하나로는 곡의 색감이 다 전해지지 않는다.
조금 더 앳되기도 하면서, 진득한 열정이 깃들어 있지만 우아하고, 펼쳐내는 서사를 닮아있어야 한다. 어느 정도는 순수하면서 대체로는 낭만적인, 그 사랑을 담아낼 수 있는 색채가 무엇이 있겠나.
톤다운된 짙은 분홍색이다. 약간의 슬픔도 깃들어 있으면 좋겠다. 가만히 있어도 생각만 해도 애달파지는 순간을 묘사해야 하지 않겠나. 조금씩 자라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 내게 그는 이상적인 작곡가이면서 ‘사랑’을 가장 ‘사랑’답게 그려주는 사람이었다. 클래식이라는 단어 자체와도 잘 어울리고, 브람스와 클라라라는 이야기적으로 흥미로운 관계 서사도 가진 사람.
딱 이 정도의 표면적 정보만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를 늘 반가운 이름으로 기억해왔다. 그런데 그날, 김호정 기자가 강연 중간쯤 PPT 화면에 강가 사진을 하나 툭 띄워놓고는 이렇게 말했다.
(여행에 동행한 아이들의 물음에 답하며) “얘들아, 바로 이 강에... 슈만이 라인강에 뛰어들었어.”
(다시 청중을 바라보며) “슈만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에서 클라라 슈만과 함께 살다가 계속 환각, 환청에 시달려 왔다고 하는데요. 어느 날 잠옷을 입고 밖으로 걸어나와 강에 몸을 투신했고, 뱃사공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온 뒤, 내가 가장 사랑하는 클라라 슈만과 아이들을 해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정신병원에 가겠다 결심하고 마차를 타고 본으로 떠나게 되죠.”
아… 나는 잠시 멈췄다.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강연자를 바라보다가, 한동안은 어디를 바라봐야 할지 몰랐다. 예상치 못한 단어들이 너무 갑작스러웠다. 그가 강에 뛰어들었단다. 생의 끝을 정신병원 1층 맨 왼쪽 끝 방에서 마감했단다. 정신 이상, 환각과 환청에 시달렸대. 아이들을 해칠까 봐 무서워 멀리 떠나야만 했단다.
늘상 내게 환하게 웃어주던 사람이었다. 지금도 노래 안에서는 여전히 웃고 있는데, 사실은 오래도록 울고 있었던 사람이었단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강연자는 슈만의 ‘유령변주곡’을 이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슈만은 밤마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듯한 선율을 적어두곤 했고, 그 멜로디를 토대로 변주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남겨진 곡이 바로 그의 마지막 작품, ‘유령변주곡’이었다.
슈만 – 내림마장조 주제에 의한 변주곡(유령변주곡) WoO 24
듣자마자 다리를 감싸오는 작고 오동통한 팔이 있다. 울부짖고 싶은 심정으로 얼굴을 감싸쥐는 붉그락거리는 두 손도 있다.
나보다 더 큰 사랑이 저 발등에 있건만, 넓게 안아주지 못하는 이의 마음은 어떤 모습일까.
둑-둑 떨어지는 굵은 애달픔이 이렇게 크게 보이는데, 쉽게 내려앉지 못하는 이의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너무나 애정하여 아이를 외면해야만 하는 부모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아팠을까. 추측하기도 어려운 질문들이 몇 문장씩 들이치고, 나보다 훨씬 커다란 마음들에 휩싸이기도 전에 짧은 청취 시간이 끝났다.
강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어렵지 않게 이 곡을 찾아 들었다. 이어 듣지 못했던 첫 번째 변주가 나타났다.
소리가 대각선 왼쪽으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계단 형태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알고 있던 이가 전혀 걷지 않았던 길이었다.
무너져 내린다고 말하기 싫은데, 자꾸 아래로 향하려는 발걸음이 보기 싫었다. 애써 붙잡아보려 해도 붙잡을 수가 없다. 그냥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괜히 마음이 이상해져 백건우 피아니스트 버전으로도 듣고, 안드라스 쉬프나 에릭 루 버전으로도 다시 들어봤다.
완벽한 사람일 줄 알았는데, 다 가진 사람일 줄 알았는데. 그의 이름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냥 클래식 작곡가 ‘슈만’이 아니라, ‘로베르트 슈만’만 눈 안에 담겼다.
교과서 종이에서 바라보던 유명 인물이 아니라, 정말 죽을 때까지 은애하던 것을 품고 살다 간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게는 그냥— 저 이름이 연예인 이름처럼만 들렸는데.
3. 20일
시간이 흘러 20일이 되었다. 나는 신반포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오늘의 주제를 다시 살펴보았다. 그래, 오늘은 브람스와 슈만이었지. 어떤 곡을 하려나. 곡 리스트 중에 하나를 그대로 복사해 음원 사이트에 재생했다.
아다지오와 알레그로였다. 듣자마자 알았다. 나, 이 곡 아는구나. 아지랑이를 닮은 첫 선이 익숙하다는 걸 깨닫자마자, 나는 곧 내가 알고 있던 바이올린 버전을 찾아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바이올린과 한참 눈을 맞추기도 전, 하콘에 직접 공연을 보러 갈까 말까 고민하던 시기였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
이때 2024년 더하우스콘서트 줄라이 페스티벌의 주제가 ‘슈만이라는 바다’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지금 ‘슈만’의 곡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그를 통해 긴 사랑을, 많은 시작을 만났음에도 나는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려고 하지는 않았다.
7시 30분, 관중과의 약속 시간이 도래하자 송영민 피아니스트가 오늘의 렉처 콘서트를 시작했고, 나는 다시 슈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슈만은 클라라와의 결혼 이후 심리적 안정을 얻게 되었다. 이전에는 복잡한 피아노 곡들을 많이 썼다면, 결혼 생활의 안정감 덕분에 따뜻한 하우스 무지크(가정 음악) 장르의 곡들을 많이 쓰게 된다.
큰 규모가 아닌 연주자와 청중이 가깝게 교감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위한 음악을. 그는 결혼 전날 밤, 클라라에게 ‘헌정’이라는 곡을 선물했다. 가사 첫 줄이 “당신은 나의 모든 것”으로 시작하는 아름다운 노래였고, 이는 클라라에게 준 결혼 선물이었다.
아… 나는 잠시 멈췄다.
잠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익숙한 이야기인데. 내가 알고 있던 딱 그 작곡가의 이야기일 뿐인데, 먼 훗날의 유령변주곡 선율이 자꾸 겹쳐 떠올라 마음이 참, 그랬다.
사람이 언제나 행복할 순 없고, 늘 밝을 순 없고, 아무 일도 없이 살 수는 없다는 걸 알지만… 그 생각들이 나를 더 많이 잠식해버리기 전에, 비올라와 피아노가 슈만의 아다지오와 알레그로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슈만 – 아다지오와 알레그로 Op.70
기다란 숨과 따라붙는 선이 있다. 내뱉는 표정이나 소리에 들여놓는 숨은 거대한데 소리는 왜 이리 담백하고 깔끔한지— 거기다 행복한 표정까지? 이렇게 행복하게 내놓을 수 있는 비올라가 있을까 싶었다. 피아노는 어떤가?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
현악기가 아래로 아치를 넓다랗게 늘여놓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참 좋다. 연주자는 작곡가보다 더 크게 웃어주면서 연주하는데, 소리는 세상 너그러워서 그 미묘한 갭 차이가 참 웃음이 났다. 여기 또 비올라 제대로 사랑하시는 분이 있네.
속도를 재촉하는 때는 어떠려나. 여기서도 안정감은 가득하다. 이 악기에서는 두터운 사선의 소리가 난다는 걸 아시는가?
바이올린이었으면 크게 높낮이를 가져다 놓고 이야기를 했을 텐데, 비올라는 중간 지대에서 안정된 너풀거림으로 매직펜을 그어내듯 특유의 리듬감을 이끌어내니 좋다. 피아노도 저렇게 노닐 줄 아니 대화가 충실히 이어진다.
가끔 바이올린이 날카로워 듣기 힘든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그럴 때 이런 비올라의 곡들을 들어보면 어떨까? 이렇게 재미나게, 또 행복하게 연주해주는 사람을 보면 참 좋아하실 텐데. 이 곡을 들으며 길게도 웃었던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 같다.
연주자가 너무 즐겁게 하는 게 다 보였다. 18일의 기억에 마음이 복잡했던 것도 단숨에 잊어버리고 이 악장에 한껏 소리 없이 웃느라 바빴다.
참, 그가 그려낸 슈만은 이만큼이나 즐겁게 웃고 있으니. 그의 세상엔 기다란 환희도 끝없는 탄식도 많이 모아두고 갔구나.
4. 22일
다시 돌아온 22일. 이렇게 상반되는 18일과 20일을 지나오고 나니, 나는 도저히 선을 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내가 슈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그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그를 온통 비어 있는 괄호 안에 음악만 골라 채워 넣어왔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 괄호 안에 머물다 간 이가 바로 ( 로베르트 슈만 )이었다는 것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기쁜 일이면서도, 막상 그를 마주하면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말로 붙잡을 수 없는 흔들림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도 괜찮은 걸까.
마음이 복잡해져서, 유령변주곡을 다시 들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첫 번째 변주까지 닿기도 전에, 나는 금세 예전부터 알고 있던 그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현악 4중주 3번의 3악장으로 향해버렸다. 진짜 이런 말은 하기 싫은데, 듣자마자 울었다.
슈만 – 현악 4중주 3번 A장조 3악장
원래 내가 알던 그 젊은 날의 환희와 기쁨, 낭만이 그대로 있는데. 방금 들었던 유령변주곡의 무너진 장면들이 겹쳐 떠올라 마음이 복잡했다.
많이 곤란했다. 이제 이 악장을 어떻게 들어야 하지. 슬픔이 선율을 많이도 앞섰다.
가련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이 사람이 이미 지나간 존재이며, 악보를 마주하는 순간—음악이 모습을 드러내는 그 찰나에만 이렇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거대한 사랑도 결국은 잊히는 것이고, 끝이 없을 것 같던 슬픔도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잔잔한 물결이다.
우리가 이렇게 인사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이 누군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은 채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있다가, 기다란 눈맞춤이 있고 나서야 서로의 이름을 나눠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비어 있는 괄호 안에서 너와 내가 눈을 맞췄으니, 내가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일지 모르겠다.
내가 기억한 첫 목소리는 결국 낯선 사람이었다. 이제 어떤 방향으로 당신을 마주해야 하는가?
고개를 떨굴 것인가? 글쎄. 앞으로도 자주 보게 될 텐데 굳이 그래야 하나. 그러게, 그럴 필요가 있나. 그냥— 우리 앞으로는 이렇게 인사해보면 어떨까.
책을 덮고, 눈을 감고, 책상에 손을 얹지 말고 그 위에 그대로 올라앉는 것. 그가 누구인지 묻지 않을 것. 만개하고 있는지, 잃은 것을 염원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것.
들려오는 대로 듣고, 알 수 없다면 그 자체로 흘려보낼 것. 지루하다면 그대로 솔직한 마음을 내뱉는 것. 그가 향기롭다면 기꺼이 그 순간을 마음 안에 고이 들여다놓을 것.
그리고 당신이 누구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볼 것. 그러다 불현듯 말 하나를 내려놓을 것.
“안녕하세요.”
우리는 이름과 한참 멀어지고 나서야 서로를 궁금해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겪은 오늘의 오고감을 내일의 당신도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을까.
참, 선을 참 많이도 넘는다, 요즘. 여전히 그 생각이 들었다. 새벽 4시가 지나온 22일의 지금, 나는 이 글의 끝을 목격하고 잠들겠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