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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모스 Nov 06. 2019

실은 몰라요, 진짜로 하고 싶은 일

그건 고민하면 머리 아프기만 한 것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뭘 배웠던가.


과외학생 수민이에게 소박하다, 해박하다, 쓸모 등의 단어를 설명하다가 생각했다. 내일모레가 국어 시험인데 수민이는 너무 태평했다. 수민이가 모르는 단어는 지뢰 찾기처럼 지문 곳곳에 심어져 있었다. 이것도 몰라? 하는 소리가 나오려는 것을 꾹꾹 눌러 담았다. 나도 이것도 몰랐던 때가 있었을 테니까.


embarrassed : 쑥스러운


이라는 단어는 사실 수치스럽다, 에 가까운 단어다. 나는 이 단어만 생각하면 말 그대로 수치스러워진다. 내가 영어학원에 다녔을 때, 그러니까 내가 수민이만 했을 때 짧은 일기를 써오라는 숙제를 받았다. 나는 '선생님께 칭찬을 받아서 쑥스러웠다'는 문장을 쓰고 싶어서 영어사전에서 '쑥스럽다'는 뜻의, 생전 처음 보는 'embarrassed'라는 단어를 찾아냈다. 일기의 마지막 대목에서 고개를 갸우뚱하시던 선생님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명하다. 그럴 만도 하다. 그러니까 나는 선생님 앞에서, '선생님께 칭찬을 받아서 저는 정말 수치스럽습니다'라는 문장을 발표한 거니까. 문제를 깨닫고 얼마나 수치스러웠는지 모른다.


몰라서 저지른 실수는 그 이후로도 셀 수 없이 많다. 불교에 '아니 불'자를 쓰는 줄 알고 '나는 불교야. 종교가 없어.'라고 한 것, 구지(굳이)와 무릎쓰고(무릅쓰고), 돼와 되 등의 맞춤법을 꾸준히 골고루 틀린 것 등.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갈 텐데 가만히 있는 편이 아니라서 모르는 건 다 들키고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갖은 실수를 반은 까먹고, 반은 또 웃어넘길 수 있는 건 어리다는 면죄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선생님들은 늘 모르는 건 창피한 일이 아니라고 말씀해주셨으니까. 하지만 내게 할당된 정규 교육 과정은 끝났고 이제 내겐 나라가 보장하는 선생님이 없다. 든든한 면죄부가 없어진 거다. 그래서 나는 모른다는 게 좀 창피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알아야 할 것을 모르거나, 모르는데도 알려도 노력하지 않는 내가 창피할 때가 많다.



그런데 지혜씬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이 뭔가요?

상당히 공격적인 질문이었다. 무례하다고 느껴질 만큼. 진짜로 하고 싶은 것. 그 질문을 받았을 때 고통스럽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실은 나도 모른다,라고 말하는 게 두려워 억지로 그 질문을 피하고 피하다가 여기까지 와버린 건데.

                                        <서른의 반격> 손원평



나는 최근에 자주 창피했다. 아마 살면서 받을 질문의 절반 정도는 취업준비를 할 때 받지 않을까. 나는 자기소개서 문항을 통해서, 면접에서, 그리고 취업준비 중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질문을 받으며 느껴본 적 없는 민망함을 느낀다. 아마 내가 아니면 누구도 대신 대답해 줄 수 없는 질문에조차 모른다고 대충 얼버무리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서인 것 같다.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이 뭐냐는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을 해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어떤 세계는 갈수록 어려워진다. 자기라는 세계가 그렇다. 우리는 스스로를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명료해지지 못한다.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대답을 하는 건 실은 나를 표현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주변을 곁눈질하면서 가능성을 살피는 일이다. 내 세계가 그 일에 어울리는지, 그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응당 그렇겠지,하는 능력 중 내게 좀 더 나은 게 있는지 살피는 것. 나의 가능성을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특히나 자기 세계의 수많은 사연과 핑계를 알고 있는 스스로로서는 자기에게 냉정한 평가를 내리기 뼈아플 때가 많다. 어떤 날은 그 누구보다 비관적으로, 또 어떤 날은 누구보다 너그럽게 스스로를 바라보다가 그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일에 지치면 결국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노력해보지 않은 것처럼 잘 모르겠다고 한다. 실패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나태한 사람이 되는 게 덜 창피하다고 여겼나 보다.


하지만 나는 안다. 마주 보기 어려운 스스로의 세계를 꾸준히 가꾸는 사람도 있다는 걸. 모르겠다고 내버려 두지 않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사람도 있다. 시시각각 바뀌는 마음에도 성실하게 팻말을 붙이고 물을 주는 사람들. 자기가 키운 게 초라한 기대든, 시절의 열등감이든 아무튼 그런 사람들은 최소한 모르겠다고 하지 않는다. 하고 싶다고 말하고 실패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래도 그게 꼭 자신의 부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안다.


아마 수민이는 소박하다와 해박하다, 쓸모 등의 단어를 알게 되는 데 한참이 더 걸릴 것 같다. 어떤 단어는 아직 나도 그 의미를 완전히 모르니까. 확실한 건 단어의 의미는 일단 문맥에 넣어봐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선생님이 저를 칭찬해주셔서 수치스러웠어요, 따위의 문장을 내뱉고 이상함을 감지하는 그런 좌충우돌을 겪어야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한 단어가 가진 의미조차 그렇게 격렬하게 깨달아왔다.


한 단어를 배우는데도 그쯤의 수치가 필요한데 하물며 자기의 세계, 그 복잡한 의미를 어떻게 공짜로 깨달을 수 있겠냐고 생각해본다. 조금 창피할 결심을 해 보면 어떨까. 열등감과 자격지심 등도 빼먹지 않고 골고루 느낄 준비를 하고서 마주 보는 것이다. 자기라는 그 복잡한 세계를. 그러다 보면 만나게 되지 않을까. 문장에 딱 들어맞는 단어를 넣은 것처럼 내가 있어서 완벽해지는,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뭐예요?라는 질문에 시원하게 대답하는 나를 상상한다. 아는 단어가 나왔다며 신나게 대답하는 수민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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