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은휘 Sep 18. 2023

아빠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밥


"언니, 내 얘기 좀 들어봐"


일요일 저녁에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 하느냐고 묻더니 자기 얘기를 들어보란다. 하는 말을 잠자코 들어 보니 아빠 이야기다. 나는 전화기에 귀를 기울이고 최대한 이야기에 집중했다.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고 했지만 하릴없이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움이 치민다.


"아빤 대체 왜 그래?"


곁에 있는 남편이 무슨 일인가 싶어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만 창피해도 멈출 수 없었다. 항상 천태만상으로 변하는 아빠의 기분 때문에 우리 가족은 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다시 상처를 입는다. 오늘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동생의 입장에서 들어 본 에피소드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집 근처로 독립한 동생은 주말에 자주 부모님을 모시고 외식을 한다. 일요일 저녁에 세 가족은 외식을 하기로 하고, 동네에 있는 고깃집 앞에서 만나 사이좋게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그곳은 갈비가 무한리필되는 식당인데, 갈비 말고 평소 못 보던 새로운 고기가 있었다고 한다. 인기가 많아서 나오는 족족 동이 나던 찰나에 동생도 새 고기를 가져와서 먹게 되었는데 맛이 있더란다. 특히 엄마가 잘 드시길래, 동났던 고기가 채워지는 걸 보고 더 먹으려고 또 가져온 순간 사달이 난 것이다.


"그만 가져와!"


아빠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먹을 게 남아 있는데 새 고기를 가져 온다고 역정을 낸 것이다. 마음에 안 들 때 험악하게 언성을 높이는 건 아빠의 대화 방식이다. 옆 자리의 사람들까지 깜짝 놀랐고, 동생은 수치심을 느꼈다고 했다. 분위기를 풀려는 엄마에게 면박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족의 생각과 감정은 안중에 없이 일삼는 그 무례함과 폭력적인 언사를 목도하면서 동생은 이제 다시 셋이서 외식을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다짐했다. 수군대는 사람들과 우리 테이블에만 감도는 냉랭한 분위기. 내가 독립하기 전에도 겪던 일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빠의 기분은 도통 종잡을 수가 없다.


우리 자매는 긴 통화 끝에, 참지 않고 할 말을 하는 쪽으로 대화를 정리했다. 동생은 아빠에게 연락해 어떤 상황이었는지, 어떻게 행동했는지, 그 일로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전하고 사과를 요구하기로 했다. 그토록 순하고 무던한 동생을 단단히 뿔 나게 만든 이 사건은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애석하게도 아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리며 대화를 거부했고, 동생은 결국 다음 주에 있을 가족모임을 취소할 테니 언니 부부도 서울에 오지 말라고 단톡방에 선언함으로써 전쟁을 선포했다.



일곱 살 무렵이었을까. 유치원 가는 차를 타기 위해 가방을 메고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불러 세웠다. 아빠가 왜 이 시간에 거기에 서 있는지 의아했지만 무척 반가운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밥은 먹었어?"라고 하며 손에 따뜻한 것을 쥐어 주었는데, 그건 은박지에 싸인 김밥 한 줄이었다. 아빠의 한 끼 식사였고, 그의 나이는 고작 서른한 살이었다.


아빠가 미워질 때마다, 일곱 살이 먹기에는 많았던 김밥 한 줄을 떠올린다. 무심하고 섬세하지 못하지만 어떤 변곡점도 없이 한결같던 아빠만의 사랑법이 있다. 그걸 알기에 나도 오랜 시간 참고 인내하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려 애썼다. 존경하고 감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제자리걸음 중이다.


항상 예의 바르고 사려 깊은 남편은 내게 말한다. 그동안 받아 왔던 사랑을 생각해야 한다고. 그래서 나는 떠올린다. 손을 꼭 잡고 목말을 태우던 일이나 생일 혹은 크리스마스에 사주었던 선물 같은 것들을. 어린 딸의 머리를 땋아 주고 맛있는 음식은 먼저 먹이던 다정한 손길을. 젊고 낭창하고 한없이 착했던 그 시절의 전혀 다른 사람을.


그때의 우리 아빠는 어디에 있을까.



이전 11화 외로움을 반찬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