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삶이 나를 돕기 시작했다

– 아무도 내 편이 아니라고 믿던 시절이 끝나던 순간 [1장]

by 이도화
"모집 공고 앞에 멈춰 선 그 여름의 나."

1989년 여름, 나는 인생의 모퉁이에 서 있었다.


졸업을 앞두고 있었지만, 앞날을 떠올릴수록 마음 한쪽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사립대 사범대생. 교사가 되기 위한 길은 좁았고, 오래 기다려야 했다.
다른 직업의 문 또한 쉽게 열릴 것 같지 않았다.


스무 살 초반의 나는, 아직 세상에 내 자리가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내 인생이 나를 돕지 않는다고 믿으며 살았다.
삶은 늘 나를 시험하고, 밀어내고, 확인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언가 잘 풀려도 기뻐하지 않는 쪽을 택했고,
좋아지는 일 앞에서도 먼저 긴장하는 사람이었다.
기대하지 않는 법을, 나는 꽤 일찍부터 배워왔다.


그 여름방학, 나는 회현동의 한 정수기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무거운 기계를 들고 시장통을 돌며 알칼리수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일이었다.
몸이 바쁘면 마음이 덜 흔들리니까, 뭐라도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장통은 나를 더 심난하게 만들었다.
어릴 적, 엄마가 짐보따리를 이고 지고 장사하던 곳.
그곳에서 나는 또다시 무거운 물건을 들고, 같은 얼굴로 서 있었다.


‘여기를 벗어나고 싶다.’


그 생각 하나만이, 그 여름의 나를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 날, 함께 일하던 친구가 무심하게 말했다.
“나, 예전에 저기서 일했었어.”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K 항공 본사가 보였다.


그날 이후, 그 건물은 자꾸만 내 시야에 걸렸다.
며칠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사옥 게시판에서 스튜어디스 모집 공고를 보았다.


마감까지 3일.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날 밤 원서를 쓰고, 사진을 찍고, 마감일에 겨우 서류를 냈다.


일주일 뒤, 나는 다시 그 정문 앞에 서 있었다.
게시판에 붙은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찾았다.


서류 합격.


조용한 기쁨이 밀려왔다.


시험은 다섯 차례에 걸쳐 이어졌다.
영어·상식 필기, 집단 면접, 영어 인터뷰, 신체검사.


안경 금지, 정장과 구두 착용.
하지만 나는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돈도,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나는 이태원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하던 아르바이트 시간을 늘리고,
점장님께 월급을 가불 받아
콘택트렌즈와 정장, 그리고 구두를 마련했다.


새벽까지 준비한 답변을 외우고 또 외웠다.


면접장에 섰을 때,
학원에서 몇 년씩 준비한 지원자들 사이에서
정식으로 준비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나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많이 두렵지 않았다.
어떤 작은 용기가 나를 뒤에서 밀고 있었다.


마지막 관문은 신체검사였다.
결핵 완치 판정을 받은 지 반년쯤 된 때라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X-ray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오래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의사가 말했다.
“흔적은 있지만, 음성입니다.”


참고 있던 숨이 크게 터져 나왔다.


1989년 10월 4일.


나는 아직 졸업도 하지 않은 학생이었지만,
K 항공 객실승무원으로 최종 합격했다.


학교는 나를 축하해 주었고, 시험을 리포트로 대체해 주었다.
그 조용한 배려 덕분에 나는 졸업 요건을 채울 수 있었다.


교육 기간 동안, 나는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했고
유니폼을 입고, 이름표를 달았다.


아직 하늘을 날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미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매달, 내 이름으로 월급이 들어왔다.
그 첫 월급을 어머니께 드렸다.


그때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첫 비행 날 아침, 거울 앞에 섰다.
유니폼을 입은 내가 낯설었다.


공항의 소리, 엔진음, 차가운 공기.
이륙하며 멀어지는 활주로.
구름 위로 올라서자, 도시가 장난감처럼 작아졌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는 정말 다른 세계로 들어왔구나.


해외 스테이 중에 받는 돈이 있었다.
승무원들은 그것을 ‘퍼듐’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 돈을 모아 엄마와 동생들,
그리고 마음속에 오래 빚처럼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선물을 건넸다.


그렇게 하나씩 건네며
나는 아주 조금씩, 내 삶이 내 편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해 크리스마스 무렵, 파리 비행을 하게 되었다.


75% 세일 중이던 버버리 코트를 샀다.
내 인생 첫 명품.


그것은 사치라기보다, 작은 축복에 가까웠다.
그 코트는 내가 나에게 주는 첫 선물이었다.


내가 올라탄 것은 비행기만이 아니었다.
내 삶을 향해 열린, 한 방향이었다.


그 코트를 걸치고 출근하던 날,
나는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이제야 내 삶이 순항 궤도에 올랐구나.


그리고 알았다.
이곳은 누군가 정해준 자리가 아니라,
내가 선택해서 서 있는 자리라는 걸.


그렇게 하늘을 날던 그 시절,
나의 인생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 작가 노트

이 글은 제가 처음으로
‘내 인생이 나를 밀어내기만 하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 순간을 기록한 글입니다.


오랫동안 저는 삶을 시험지처럼 느끼며 살았습니다.
잘 풀리는 일 앞에서도 기뻐하기보다 먼저 긴장했고,
기대하지 않는 것이 나를 지키는 방식이라고 믿었습니다.


돌이켜보니, 삶이 나를 돕기 시작한 순간은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가 아니라
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선택했던 그 자리에 이미 있었습니다.


이 장은 ‘무엇이 되었다’는 이야기라기보다,
내 인생의 주도권이 아주 조금 내 쪽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순간에 대한 기록입니다.


** 연재 안내 **

이 글은 연재 에세이 **《하루, 나를 다음 날로 데려갔다》**의 첫 이야기입니다.
하루를 버티며, 조용히 다음 날로 건너온 시간들의 기록을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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