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9년, 내 인생의 문이 열리던 소리. [2장]
그때는 몰랐다.
승무원이 되는 일이,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시간이 될 줄은.
1989년 10월,
나는 K 항공 공채에 합격해 공식적으로 승무원이 되었다.
평생 가난과 결핍 속에서 앞만 보고 걸어온 나에게,
그 한 줄의 합격 통보는 인생의 문 하나가 스스로 열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큰 환호도, 눈에 띄는 축하도 없었다.
단 한 사람, 독서실을 하던 사촌 오빠의 아내가 옷 한 벌을 선물해 주었다.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네가 이루었어.”
그 말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조용한 온기가 되었다.
그 시절, 해외 여행 자율화 이전의 한국에서
승무원이라는 직업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처럼 여겨졌다.
합격 이후의 시간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대신, 해야 할 일들이 하나씩 눈앞에 놓였다.
교육, 준비물, 규정, 생활 방식.
인생이 달라진다기보다, 생활이 바뀌고 있었다.
K 항공의 교육은 또 하나의 학교 같았다.
머리 모양, 걸음걸이, 말투, 표정, 매너, 안전 교육, 기내 서비스까지.
그동안 의식하지 않고 살던 것들이 하나의 기준 아래 놓였다.
나는 그 기준을 따라 하느라 하루를 다 써버리곤 했다.
정갈한 유니폼과 반짝이는 구두는 낯설었다.
거울 속의 내가 어색했고, 내가 아닌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과정이 싫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바꾸는 느낌보다,
내가 나를 새로 써 내려가는 감각에 가까웠다.
삶이 나를 밀어냈다고 느끼던 시간과 달리,
이 시간만큼은 삶이 나를 안쪽으로 데려오고 있었다.
입사 후 처음 비행기를 탔고, 처음 호텔에서 잠을 잤다.
정돈된 침구의 향기, 새벽 공기처럼 산뜻한 낯섦.
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그 설렘은 오래 마음에 남았다.
첫 비행은 마닐라였다.
새벽 4시에 집을 나서, 5시에 회사에 도착했다.
어피어런스 체크, 객실 브리핑, 운항 객실 합동 브리핑.
그 모든 과정을 지나서야 비로소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그 규칙들은 나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기 위한 준비처럼 느껴졌다.
비행기에 처음 발을 디딘 순간의 냄새를 아직도 기억한다.
엔진 기름 냄새, 갤리 오븐의 따뜻한 공기,
승객 좌석에 남은 온기, 활주로의 냄새.
그 모든 것이 ‘새로운 세계의 냄새’였다.
나는 그렇게 하늘을 날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
가난이 몸에 배어 있어서인지 돈을 쉽게 쓰지 못했다.
체재비는 모아 어머니께 드렸고,
해외에서 사 온 커피와 초콜릿, 화장품은
집안을 지탱하던 작은 숨구멍이 되었다.
나는 회사가 주는 혜택을
야무지게, 알뜰하게 모두 누렸다.
그렇게 돈을 모으며
나는 조금씩 독립적이고 단단한 사람이 되어 갔다.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내 월급으로 내 삶을 바꾸는 경험.
그것이 사람을 얼마나 단단하게 만드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하늘을 날던 시간들은
내 인생에서 가장 투명하고 깊은 푸른빛이었다.
그 빛은 지금도 내 안 어딘가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이 장은 제가 처음으로
삶의 방향이 실제로 바뀌고 있음을 몸으로 느꼈던 시간을 기록한 글입니다.
합격이라는 결과보다,
그 이후에 시작된 교육과 규칙, 노동의 시간들이
제 삶을 더 크게 바꾸었습니다.
유니폼을 입고, 규칙을 배우고, 비행을 하며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저는 처음으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내 삶을 책임지는 감각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은 화려하기보다 조용했고,
빠르기보다 단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