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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럼 Nov 18. 2019

어떻게 박봉까지 사랑하겠어, 축구를 사랑하는 거지

축구 기자, 누구나 가슴속에 못다 이룬 꿈 하나쯤은 품고 살잖아요.



“넌 뭐가 되고 싶어?”

“나? 축구 기자.”
2014년 U리그, 마지막 경기의 시작을 기다리며


당당하게 말하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공무원, 간호사, 선생님 등등의 직업들 속에서 특이하다면 특이한 내 장래희망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 적도 있었다. 세미 관종인 나는 누군가 먼저 나의 꿈을 물어주길 바라기도 했다. 축구 기자와 전혀 상관없는 법학과에 진학한 후에도 전공 공부보다 대외활동에 신경 쓰며 ‘꿈을 향해 한 발짝씩 나아가는 나’에 심취했었다.


그래도 영 재능이 없는 건 아니었는지 대학 생활 내내 ‘경남 도내 프로축구팀’을 시작으로 ‘대한축구협회’, ‘한국 실업축구연맹’ 등 여러 기관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주말이면 내 상체만 한 노트북을 어깨에 짊어지고 창원, 부산, 경주, 남해 등을 돌아다니며 경기를 보고 기사를 썼고, 아무것도 아니던 대학생인 나를 ‘기자님’이라며 불러주는 인연들도 소중하고 감사했다. 대한축구협회 기자 OT에 참여하기 위해 처음으로 축구회관에 갔던 날은 아직도 생생하다.


당연히 졸업 후에도 축구 기자 쪽으로 취업을 알아봤다. 그런데 한 가지 내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으니. 바로 내가 서울에 집이 없다는 것과 축구 기자가 박봉이라는 점. 50만 원이 넘는 서울의 월세를 감당하기엔 월급이 턱 없이 모자랐다. 다 핑계지. 축구 기자를 포기한 가장 큰 이유는 이 모든 것을 감내할 간절함이 나에게 없었다는 것 아닐까.


2016년 어느 날 작성했던 축구 기자 지원서 중


얼마 전 친구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인생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세 번 주어진다면 어디에 쓸래?’.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축구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다고. 축구 기자라는 꿈을 포기한 후, 어느새 20대 중반이 되어 취업이 급해진 나는 그나마 전공과 관련 있는 법률사무소 취업을 택했기 때문이다. ‘축구 기자’를 위한 스펙만을 쌓아왔던 그 당시의 나는 ‘전공’이라는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했었다.


물론 후회만 남은 것은 아니다. 축구를 좋아한 덕분에 지금의 남자친구도 만났고, 함께 경기장을 다니던 언니들과는 아직까지 소중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아예 헛된 일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못다 이룬 꿈이 되어버렸지만 사실 나는 지금도 축구장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설렌다. 무거운 도시바 노트북을 들고 경기장까지 가는 길, 경기장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얕은 지식으로 전술 분석을 하고, 초면인 선수와 감독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며 휴대폰을 들이밀던 20대 초반의 나. 아직 살 날이 훨씬 많이 남았지만 그때처럼 열정적이고 똘망똘망했던 내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축구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내 대답이 무색하게도. 목젖까지 차오른 퇴사 욕구에 ‘사람인’을 둘러보다 축구 기자를 구한다는 글을 보면 심장이 벌렁거린다. ‘서울’, ‘급여: 회사 내규에 따름’이라는 문구를 보면 벌렁거리던 심장도 금세 가라앉지만, 이 두근거림이 ‘축구 기자’에 대한 내 미련이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쯤에서 묻고 싶다. 당신의 가슴속에 품고 있는, 못 이룬 꿈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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